[수기] 민족의 비운/유유명
상태바
[수기] 민족의 비운/유유명
  • 려호길
  • 승인 2008.12.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한국어능력시험수험생의 이야기(려호길 정리)
조상의 땅을 밟아 보겠다는데 시험까지 쳐야 하다니.

( 1 )
무연고동포의 방문취업제는 한국이 중국동포들에게 베푼 최고의 우혜정책이다. 그러나 한국말과 한글을 어느 나라 동포보다 더 잘하고 더 잘 쓰는 중국동포들에게는 어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힘없는 소수민족인 조선족은 이 한국의 '햇빛정책'에 감지덕지 해야할 뿐 왈가불가 할 수가 없다.

2007년, 이 정책의 혜택으로 많은 무연고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갈수 있었다. 2008년, 약 42,223명이 등록했고 그중에는 나도 끼여 있었다. 한국어능력시험장은 중국 전역 19개 성(省)시에 분포되어 있는데 운이좋은 극 소수 사람들만 연길의 연변대학 시험장에 배치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성(省)에 가서 시험을 보게 되었다. 시험에 합격되어도 23.752명만이 당첨된다고 한다.

4월15일부터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였고 운명의 작간으로 나는 광동외국어무역대학의 시험장에 배치되어 광주(廣州)로 가야했다. 너무 한심하여 포기하려 할 때 주변 사람들은 시험자격을 가진 것만으로도 행운인데 언제 변할지 모를 한국정책을 기회가 생겼을 때 광주인들 어찌 포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4월17일, 나는 영광스럽게도 전례없는 광주행 수험생전용기차를 타고 118명 Yes영도팀?의 대원들과 함께 광주로 떠나게 되였다. 시험보러가는 수험생들은 다소 생활형편의 차이는 있었지만 공동한 희망은 한국이라는 부유한 고국에 가서 돈 벌어 잘 살아 보겠다는 것이다. 90%사람들이 남편이나 아내 자식이 한국에 있기에 이 기회에 이산가족의 회포를 풀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돈 벌어 잘 살아보려는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자그마한 무역회사를 차리고 있는 나도 5년 간의 자유출입국이 크나큰 유혹으로 다가왔다. 한국에 갈 때마다 한국회사에 비용을 주면서 초청장을 요구햐야 했고 나는 또 여행사에 위탁하여 심양 영사관에 비자를 신청하는데 비용은 말치 않고라도 근 1개월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한 번은 급한 대목에 캔썰까지 되어 사업에 큰 지장을 빚고 말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난 머나먼 광주에 가서라도 시험을 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 2 )
17일, 오전 7시30분까지 연길고려호텔 8층 회의실에 모이라는 학교측?의 공지에 따라 약속장소에 도착하고 보니 아직 7시인데도 이미 여러 명의 수험생이 와 있었다. 모두들 트렁크며 여행용가방이며 손짐까지 들고 들어오는 모습이 광주행이 아니라 한국행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북방에서 남방의 한끝까지 가야했고 광주에 도착하는 24일(근 1주)까지 기차에서 먹고 입고 생활해야 하는데다가 적도에 가까운 광주와 북방 연길의 기온 차이를 감안하고 한여름 옷을 더 챙겨야 했기 때문이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서는 사람들로 큰 회의실은 금시 발디딜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약속시간이 반시간 지났는데도 학교측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초조하고 불안하여 8층 사무실에 올라가 보니 정장차림의 한국인 부장님과 한 젊은 여직원만 분주히 서류를 뒤적이고 있을 뿐 다른 직원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먼 행차도 행차지만 118명의 대군을 거느릴 직원들이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은것이 무척 기분이 나빴다.

8시 20분이 되어서야 젊은 선생들이 잰 걸음으로 들어오더니 저희들끼리 무언가 수군거리면서 마이크 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아홉시가 되어 출석체크가 시작되었고 특제기차표와 신분증,시험장에서 쓸 볼펜을 넣은 작은 비닐팩을 나누어 주고 또 광주팀만은 특별히 Yes 영도마크?가 찍힌 반팔 T를 나누어 주고 118명을 5개 소조를 나눠 이미 정해진 조의 조장을 소개해 준다.아무튼 계획이 없고 째이지 못하고 어설프고 두서없는 것은 이포단장과는 관계없이 이 지방 전통이다.

10시가 되어 조 순으로 역에 나가는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내가 소속된 제 5조 만은 마지막까지 방치되었다가 갑자기 나타난 yes관리팀 아가씨의 "빨리 빨리"하는 독촉에 개미떼처럼 우르르 버스를 향해 밀려갔다.우리 제 5조는 50대들이 많은데다가 무게운 짐을 끌고 들고 새파란 yes관리팀 아가씨를 쫓아가야 했다. 버스에서 내려 허둥지둥 홈으로 나가니 기차가 막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우리는 남자건 여자건 가릴 사이 없이 필사적으로 열차에 끌어 올렸다. 우리 조가 기차에 다 오르자 기차는 욕만 처 먹고 자란 열차승무원들의 걸직한 욕지거리를 연길역에 남겨두고 서서히 연길역을 떠났다. 우리 일행 중 여러 명의 트렁크바퀴가 빠져나갔고 나는 뛰다가 넘어져 두 무릎이 벗겨졌고 발목을 접지른 사람 긁힌사람 신발굽이 빠진 사람들로 온통 사고천지였다.

( 3 )
목에 건 특제 기차표는 언제 런닝안으로 흘러들어갔는지 가슴에 착 달라 붙었고 땀에 젖은 머리 카락은 얼룩진 얼굴에 진드기처럼 붙어 해괴한 몰골이 되었다. 간신히 숨을 돌리고 땀을 들여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에! 어느 고물 더미에서 끌어 왔는지 먼지투성인 열차는 더럽기 짝이 없었다. 어디라없이 먼지 투성이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는 당장 질식할 것만 같았다. 심장이 좋지 않은 나는 벌써 호흡곤란이 왔으며 산소결핍으로 구토를 시작했다...

누군가 창문을 열어주어 환풍을 시켜서야 나는 겨우 구토를 멈추고 진정할 수 있었다. 먼지투성인 기차는 우리가 걸레가 되어 먼지를 닦았고 우리의 코가 청소기가 되어 먼지를 흡입하였다. 결국 우리는 손수 의자며 선반이며 바닥을 쓸고 닦아서야 열차는 제 모양새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착한 사람과 바보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한다. 나는 워낙 비행기를 이용하려고 했으나 기차를 타고 단체로 움직여야 한다는 학교측의 규정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용기차를 이용하여 山海關 이남 시험장으로 가는 수험생은 7000여명에 달하고 제일 장거리리인 화동과 광동지역 수험생만도 1800여 명이라고 한다. 결국 T로만 구분되지 않아 모자도 빨간모자, 흰모자, 노란모자로 다양했고 안내기(旗)도 각양각색이었다. 동북3성에서 몰려온 이 사람들은 생김새와 이포단장이 다르지만 같은 말 같은 글을 쓰는 똑 같은 민족, 조선족들이다. 금시 내 가슴속에서는 서러움이 울컥 치밀었다. 불쌍한 우리 조선족들의 기구한 운명으로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언젠가 역사는 한국의 방문취업제로 중국 19개 省에 허무하게 뿌린 가난한 조선족들의 피땀에 대한 옳고 그름이 판명날 것이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시험기간 연길시는 텅 비다 싶이 되었고 어떤 곳에서는 장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족들은 조선족이 없으면 연길시가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한다.

Yes영도팀은 다른 여행사팀과 배석때문에 모순이 있었지만 서로 얼굴을 붉히는 사람은 없었고 결국 서로 양보하고 사이좋게 보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고향을 떠나니 모두들 민족심이 생겨나 서로 배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전용열차에 한족은 몇 몇 열차원과 청년여행사 마사장, 그리고 여행사직원 몇 명 뿐이었는데 마사장은 열차에서 기고만장해 다니는 모습이 전용기차를 낸 자신의 '관시'를 과시하려는 것이 역역했다.

이때 누군가 한국에서 무상입국조건으로 체조를 시키고 있다고 해서 폭소를 터뜨렸다...... (2008.05.07)

(려호길 정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