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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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情)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8.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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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수필집 <1부>

숨통이 콱콱 막히도록 답답한 서울, 하지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열악(劣惡)한 교통 환경, 심각한 경지까지 왔다는 대기 오염, 그러나 우리는 이런 굴레에서 잠시도 벗어나 살아갈 방법은 없다.

하루를 눈코 뜰 새 없이 이리저리 바삐 뛰다 보면 심신은 그야말로 소금에 절인 파김치 마냥 축 처질 수밖에 없다.

조금도 쉴 겨를이 없는 일과(日課)에 쫓기다 보면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나는 것이 서울 생활이다. 이런 때일수록 대개는 피로에 겹친 몸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자연 속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심신에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나는 언제부터인가 버릇처럼 찾아가는 곳이 있다. 그리운 사람이나 정다운 이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얘기라도 나누고 싶을 때 꼭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구파발 삼거리를 지나 북한산성 쪽으로 우회, 오백 미터쯤 가다가 보면 일영 방면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곳을 조금만 지나면 다리 하나가 나오는데 이 다리를 넘으면 경기도 고양군에 이르게 된다.

길가에 드문드문 화훼 재배 농가가 자리 잡고 있는 이 곳의 도로는 도시 못지않게 잘 포장돼 있는 것이 특색이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다 보면 좌우의 경관이 한 폭의 산수화를 방불케 한다.

봄이면 딸기를 파는 원두막이 길목을 지키고, 가을철엔 소복소복 길옆을 메우는 코스모스. 이는 추석 때면 찾아가던 고향 길을 연상케 한다.

다정한 연인과 정담을 나누던 운치 있는 원두막, 그러나 겨울철엔 꼭 흉물처럼 섬뜩하게 느껴짐은 어쩐 사연일까.

일영 유원지와 장흥 유원지 입구를 지나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신흥 유원지 푯말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좁은 길을 따라 일 킬로쯤 가게 되면 고옥(古屋)을 만나게 된다. 간판도 없는 ‘할머니집’,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이 초가(草家)야말로 격세지감이 들만치 보기 드문 산 속의 명물이리라.

산자수명한 금수강산, 외로이 자리 잡은 ‘할머니 집’이 노고산 정기를 받은 나그네의 쉼터로서 이름남은 당연하다.

송추에서 비롯된 물줄기가 일영까지 아홉 구비나 돌아간다 하여 구곡수라고도 불리는데 서울 근교에서는 이만한 명소가 또 어디 있겠는가.

사업에 시달릴 때나 인간에 싫증날 때면 나는 으레 이 ‘할머니집’을 찾곤 하는데 그 이유가 어릴 적 옛집의 구수한 숭늉 맛과 빼어난 경치를 찾고자 함만은 결코 아닐 게다.

불룩 튀어나온 흙 담벼락만큼이나 등이 굽은 할머니의 고객을 맞는 그 정성이 더없이 고마워서 라고나 할지?

깔끔한 반찬, 정성껏 끓인 백숙은 마치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 그것이어서 두고 온 옛집에서의 어머니의 환영이 여지없이 되살아난다.

잡목 사이에 자리 잡은 ‘할머니 집’의 원두막, 내가 자라던 어린 시절을 연상하며, 시심(詩心)을 가다듬기에는 너무나 안성맞춤이었다.

현대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이 원두막에서 잠시나마 사랑하던 사람들과 학창시절에 꾸던 그 황홀한 청운의 꿈을 되새겨 본다는 건 망중한이 아니고 무엇이랴.

언제부터인가 물질 만능주의에 깊숙이 빠진 우리 사회의 현실, 조상 대대로 전래되어 오던 순수한 정이 여지없이 퇴색되어 가는 삭막한 이 사회이지만 ‘할머니 집’의 원두막만큼은 내일을 설계하는 현대인에게 있어선 더없는 행복의 요람지가 될 것이다.

같은 값의 물건을 주고받는 상거래라 할지라도 대인관계의 정성만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그 등 굽은 할머니의 정성어린 눈빛이 자꾸 떠오름은 아마 내게도 작은 정의 옹달샘이 마음 어디엔가 스며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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