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로부터 옹근 15년동안 숭선진에서는 11월 22일이 되면 <<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웨치면서 불발탄 성토대회를 가졌다. 이 불발탄은 1992년 연변박물관에 수장되였다.
<<50년 겨울 내가 부동촌 촌장이였어요. 당시 인민군이 중국으로 들어오고 우리는 전문 군량을 운반하였습니다. 민병을 동원하여 소수레를 몰고 무산에 건너가 실어들였는데 부동과 용암골에 수만톤 쌀이 산더미를 이루었지요. 이듬해 강이 풀리면서 다시 건네갈수 없어 겨울에 강이 언 다음에야 되실어갔지요. >>
천중백로인의 말이다.
삼합진 북흥촌에서 자위단으로 있다가 남으로 간 김학봉은 전쟁이 나자 회령 오봉산에 와서 무장대를 조직했다. 어느날 밤 그는 무장인원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자기의 고향 비전으로 왔다. 비전촌 민병패장 허창호(김학봉이 개구쟁의 친구)의 집을 습격하고 내려오면서 민병실을 쳐서 총을 가져가고 김원호를 총으로 쏘아죽였다.
당시 민심은 황황하기가 짝이 없었다. 생사를 가늠할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식구들이 살아있을 때 먹는다고 가축들을 잡아 얼구어두고 먹어댔다. 군인모집이 나오면 적령청년들은 물론 온 집안이 숨이 한줌만했다. 참군하면 영광이라고 온 마을이 나서서 환송했지만 참군 당사자와 가족들은 상사가 난 집모양으로 울음바다였다.
김행주(金行周 63세, 원적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동포동. 평강벌 고향. 현재 연길시에 거주)는 1950년 11월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하던 당시를 회상한다.
<<형님께서 장백사(오늘의 연길시 장백향)의 민병영장이였다오. 형님께서 적령청년들을 모아놓고 군에 가라고 입이 닳도록 동원을 했지만 누구 하나 자원하는 사람이 없었다오. 가마목에 앉았던 사람이 엉뎅이가 뜨거워서 주춤 일어서면 좌중에서 박수를 쳐서 자원한걸로 만들기도 했소. 어떤 사람들은 <참군하면 영광이라는데 너는 왜 동생한테 그런 영광을 주지 않고 남만 동원하느냐?>라고 쏘았소. 당시 나는 열여섯살이고 중학교 학생이였소. 아직 군에 갈 나이가 아니였는데 그런 말을 듣고 밸김에 군에 간다고 자보를 했구만. 모두들 박수를 치더구만.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가 가마목에 누워있는데 베개가 눈물에 젖었더라오. 아버지는 밤을 자지 못하고 곰방대만 뻑뻑 빨고―마을에서는 내가 군대를 간다고 집집마다 닭을 잡고 식사를 초대했다오. >>
마을에 렬사증이 내려오면 군인가속들은 잔뜩 긴장해서 촌장하고 야단을 쳤다. 국가를 위해 죽는것은 영광이요 뭐요 하고 말꼭지를 뗄라치면 개나발을 불지 말고 이름부터 대라고 한다. 일단 희생자를 알게 되면 가속들은 기혼해번저지고 다른 가속들은 자기의 불행처럼 여겨 통곡을 했다.
화룡시 로과진 로과촌의 조창렬로인의 막내 동생 조창호(趙昌浩 1930년생)는 1946년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여 중대장으로 승급, 중국 광동성 류주시에서 희생되였다. 둘째 동생 조봉룡(趙峰龍 1926년 생)은 1945년에 참군하여 국내전쟁을 겪고 조선전쟁에 참가하여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전사했다. 당시 그는 소대장이였다.
<<렬사증과 함께 무휼금 280원이 나왔더군요. 지금도 매달 45원씩 줍니다. 부모 대신 내가 받고있어요. 동생들의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니 돈을 받아 쥘 때마다 가슴이 미여집니다. >>
벌써 86세 고령인 조창렬로인은 벽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두 동생의 렬사증을 머주하니 바라보며 한숨을 짓는다.
조선전쟁 당시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의 호소를 받들고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한 조선인 장병은 무려 2만여명이라는 통계이다. 도문철도국에서는 선후로 500여명의 철도종업원들이 조선에 나가 수송전선에 싸웠고 연변전원공서에서는 1, 000여명의 간호원을 양성하여 전선에 보냈다.
항일전쟁, 국내 해방전쟁, 조선전쟁에서 희생된 연변의 렬사는 사책에 오른것만 해도 1만 6천여명인데 그중 조선족이 93. 13%를 점한다. 그들의 선혈로 중국조선족들은 중국국민으로 이 땅에서 떳떳이 살수 있는 자격을 바꾸어왔다.
선렬들의 위훈을 기리여 연변 마을마다에는 <<혁명렬사기념비>>가 세워졌는데 무려 600여개이다. 렬사의 이름으로 세워진 기념비나 묘비로는 룡정시 합성리 동쪽산 공동묘지에 묻힌 윤동주묘비, 왕청현 남산 왕청현 혁명렬사릉원에 세워진 <<김상화렬사기념비>>, 왕청현 십리평향 동풍촌 동북쪽으로 2km 떨어진 대북구 산차구 북산기슭에 세워진 <<동장영렬사비>>, 돈화시 인민정부 울안에 모셔진 <<진한장장군기념비>>, 연변혁명렬사릉원 혁명공동묘지에 <<천추정기(千秋正氣)>>라는 글이 새겨진 <<박락권렬사기념비>>, 연길공원 북산에 우뚝 솟은 <<주덕해동지기념비>> 등이고 대형 기념비와 기념탑을 든다면 화룡시 화룡진 인민체육장에 1981년 8월 1일에 세워진 어랑촌 <<13용사기념비>>, 훈춘현 영안진 대황구 회암산기슭에 1962년에 세운 대황구 <<13렬사묘비>>, 돈화시 북산에 1975년에 세운 돈화시 <<혁명렬사기념탑>>, 도문시 <<동북해방기념탑>> 등을 들수 있다.
<<연변혁명렬사릉원>>은 1992년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의연금으로 세워진것이다. 연길공원 북쪽 산언덕의 20만㎡의 부지를 차지한 이 릉원은 문루, 혁명렬사기념비, 혁명기념관, 공동묘지, 유해실로 이루어졌다. 문루의 처마밑에 걸려있는 구리판 편액에는 <<연변혁명렬사릉원>>이라는 송임궁의 친필제사가 새겨져있다. 혁명기념관은 대청과 네개의 큰 전시청으로 되여있는데 각각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 사회주의 건설시기의 렬사들의 사적이 전시되여있다. 그리고 묘지에는 500여명 혁명렬사들을 안장하였으며 유해실에는 400여명 혁명렬사와 지명인사들의 골회함이 모셔져있다. 기념관앞에 높이 솟은 기념비 량측에는 바람에 나붓기는 붉은기 모형이 붙어있는데 기발의 높이가 16m, 1만 6천여명 렬사들을 상징한다. 비석 정면에는 중공중앙 총서기 강택민동지의 친필 제사 <<혁명렬사 영생하리(革命烈士永垂不朽)>>라는 한자가 조선문과 나란히 진달래조각에 받들려있다. 이는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기념비>>라고 하는 연변을 상징한것으로서 산마다의 진달래는 수천수만의 렬사들에게 드리는 화환이고 마을마다의 기념비는 렬사들에 대한 송가이다.
할아버지 때로부터 3대를 내려오며 돌과 사귀여온 지성일(53세)일가는 1956년 주장 주덕해동지의 알선으로 연길로 이사와서부터 전문 혁명렬사기념비를 만드는 업에 종사해왔다. 이 석공가문은 삼대를 내려오면서 혁명렬사기념비 외에도 연변대학 제1임 교장 림민호동지(연변대학 도서관앞에 있다), 연변의학원의 로기순교수(연변의학원 뜰안), 백두산 기상처의 김처장(백두산 주봉 천문봉기슭에 있다) 등의 조각상과 리욱시비(화룡시 로과진 두만강기슭에 있다), 김성휘시비(룡정시 고중 뜰안에 있다)도 만들었다.
<<아버지께서는 <글을 새길 때 도정신해라. 획마다 글자마다에 렬사의 넋이 고이게 하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가문의 예술품은 렬사들의 고매한 뜻과 함께 남는다고 생각하니 돌을 깎고 쫗는 일이 아무리 고되여도 힘이 솟습니다. >>
지성일석공은 이렇게 속심을 털어놓았다.
두만강답사를 하면서 나는 마을마다의 기념비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묵념에 잠겼다.
력사의 흐름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바쳤던가?!
하지만 렬사명부에 오르고 사책에 남은 사람은 고작 몇이던가?!
더구나 오랜 세월 리념의 갈등으로 버림받은 선렬들의 혼령은 어디에 깃들었을가?!
<<동북해방기념탑>>이 세워진 도문시에서 북으로 10여리 떨어진 고려령은 1920년 홍범도, 최명록, 안무 등 애국장령들이 령도한 독립투사들이 일본군 150명을 섬멸한 유명한 <<봉오동전적지>>이다. 당시 독립군이 주둔했던 봉오동의 상, 중, 하촌은 벌써 오래전에 이사를 하고 여기에 저수지가 들어앉았다. 해마다 봄부터 가을까지 사람들은 이 저수지에 와서 천렵놀이를 한다. 저수지의 고기를 잡아서 저수지의 물에 끓여서 저수지 숲속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면서도 그들 태반은 연변에서 활동했던 반일무장부대가 중국에서의 첫번째 항일의 총소리를 여기에서 울렸던 장쾌한 력사를 모른다.
고요한 푸른 물은 하촌을 물에 삼키고 중촌의 변두리에까지 넘실댄다. 고려령 산기슭으로 난 울퉁불퉁한 달구지길로 저수지를 에돌아가면 중촌과 상촌의 집터자리와 당시 학교자리가 나무와 풀속에 숨어서 <<침묵>>하고있다. 하지만 1990년 마가을에 박청산씨와 함께 력사탐방을 갔을 때 우리는 침묵을 고집하는 력사의 잔해들이 속삭이는 비장한 력사이야기를 정녕 들었다. 개혁개방이후 력사학자들은 <<봉오동전투>>에 대해 적지 않은 글을 발표했고 강룡권선생이 <<홍범도장군>>이란 책을 발간하여 이 전투를 대서특필하기까지 했지만 전적지엔 기념비 하나 없다. 다만 저수지땜 왼손켠 언덕에 <<봉오동전적지>>라고 쓰고 몇줄로 요약해서 봉오동전투를 소개한 자그마한 콩크리트판이 가냘픈 소리로 중외를 진감한 <<봉오동 대승리>>를 말해줄뿐이였다.
어랑촌 <<13용사기념비>>가 세워진 화룡시에서 서쪽으로 20리 가면 청산리마을이 있고 계속해서 골짜기로 10여리 가노라면 산언덕 풀밭속에 일반인의 묘비를 상상케 하는 나무 패말 하나가 <<청산리전적지>>라는 희미한 글을 안고 서있다. 1920년 10월 백운평, 천수동, 완루구, 어랑촌 등에서 홍범도, 김좌진, 서일 등 독립투사들이 일본군 19사단 37려단을 주력으로 하는 일본군 1, 000여명을 섬멸한 대첩의 전적지에는 여직껏 기념비가 없다는 사실에 나의 마음 한구석은 여간 허전하지 않았다.
항일투쟁시기 수천수만의 항일렬사중 렬사명부에 오른 사람은 근근히 2, 726명,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률은 93%이다. 그들은 모두 1930년 5월부터 광복까지 희생된 혁명투사들이다. 연변에서의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은 그에 썩 앞서 본세기초부터이나 그것은 민족주의투쟁이라는데서 배제되고있는 상태이다. 이는 한국에서 공산당의 항일을 <<공산게릴라>>의 <<비적행위>>로 몰면서 독립운동사에서 밀어내치는것에는 비할바가 아니나 공산당의 계렬이 아니라고 해서 도외시하고있는것만은 사실이다. 기실 민족주의 독립운동은 공산당의 항일투쟁의 기반인것이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을 떠나서 항일운동을 운운하는것은 뿌리 없는 나무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개혁개방이후 점차 리념에 매운 학술연구가 수그러들고 민족적 차원에서의 옳바른 연구가 시도되고있어서 리념의 골짜기가 꽤나 메워져가고있다. 하지만 광복후 수십년 세월동안 력사연구가 정치투쟁의 수요에 따른 공구에 불과했던바 임자없이 쓸쓸히 있던 독립투사들의 묘지는 풍우의 시달림에 자취를 잃었거나 훼손되였다.
룡정시 삼합진 안미대(雁尾臺)골로 얼마간 들어가다가 화선누비골에 있는 묘지앞에는 돌비석 하나가 쓸쓸히 서있었다고 한다. 비석에는 <<김병덕(金炳德)지묘>>라고 씌여있었다. 부근 마을사람들은 이 지대에서 활동했던 독립군 대장의 묘라고 했다. 똑같은 항일투사의 묘지였지만 계급투쟁세월에 그 누군들 감히 돌볼수가 있었으랴! 몇해전 김병덕의 묘지는 파엎어졌고 대리석 비석도 도난을 당했다. 오소리가 묘지에 굴을 뚫고 보금자리를 꾸민것을 발견한 부근의 사람이 묘를 헤치고 오소리를 잡았던것이다. 후에 알고보니 삼합진 북흥촌의 누군가 안미대로 나무하러 갔다가 대리석 비석을 발구에 실어 내려다 망치로 부셔서 세멘트에 섞어 부엌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은 김병덕의 해골이 묻힌 곳을 찾기가 꽤 힘들거라는 당지 사람들의 추측이다.
1993년 여름 연변대학 김동화교수가 한국 기자분을 모시고 삼합진 북흥촌에 와서 장경락로인을 찾았다. 광복전 개울 건너 밀밭에 묘지가 있었는데 그것이 경신년 대토벌 당시 희생된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張德俊)의사의 묘라고 했다. 로인은 그들을 그 자리로 인도했다. 마을 복판 옛 밀밭자리는 오간데 없고 백양이 꽉 들어섰다. 묘자리는 딱 짚어서 말할수 없다. 묘가 있었던 자리를 짐작으로 파면 해골이 나올것은 번연한 사실, 그런데 연변 력사계에서는 장덕준의 묘가 거기에 있을수 없다고 입을 모으고있다. 그날 저녁 장덕준의사는 룡정에 거주했었는데 저녁에 일본토벌대에서 파견한 사람들과 함께 마차에 앉아 연길로 떠나서 실종되였던바 연길과 반대 방향이고 100여리 떨어진 이런 곳에 시체를 파묻었을리 만무하며 일단 일본놈들이 비밀리에 살해하고 거기에 묻었다고 하더라도 집근처에서 땅을 파는 동정을 마을에서 모를리 없다는것이며 아울러 일본놈들이 시체를 마을 가까이 묻을수도 없다는것이다. 그곳에는 독립군의 한 책임자였던 김덕형의사의 묘가 있었던것만은 사실이다.
독립군 김덕형의사는 웅진, 라진 등 두만강연안의 조선을 다니며 군자금을 전문 모았다. 경신년의 그날 저녁 군자금을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 북흥에 있는 집으로 들어왔다가 토벌대의 포위에 걸려 희생되였다. 그가 죽은후 식구들은 군자금을 독립군에 전달할수가 없었다. 많은 액수의 군자금은 그 집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김덕형의 아들 두 형제는 시름없이 공부를 하였다. 광복이 나고 1947년 토지개혁을 하게 되자 생활이 유족했던 그 일가는 청산을 당해 로씨야제 김부끼표 재봉침마저 빼앗겼다. 다른 사람의 소유로 되였던 재봉침은 고장이 나자 페철로 팔아버린지가 옛날이다. 큰아들은 조선에 건너가서 별세하고 둘째 김성록은 지금 한국에 산다. 그는 조선전쟁 당시 국군 장교였던바 대령군함을 달고 포로교환소에서 일하는것을 인민군 포로로 살다가 포로교환에 넘어온 북흥촌의 고향 친구가 보았었다는 이야기이다. 말하자면 고향 친구끼리 총을 맞대고 싸웠던것이 조선전쟁의 현실이라 하겠다. 1993년 김성록은 북경에 이르러 혈압이 갑자기 올라서 고향에 와서 아버지의 골회를 모셔가려던 소원을 성취하지 못하고 아쉬운 심정을 안고 귀국했다고 한다.
1994년 10월 두만강답사길 첫 코스로 나는 라철, 서일, 김교헌의 묘소를 찾았다. 단군교의 이 삼종사의 묘소는 화룡시 룡성향 청호촌(龍城鄕淸湖村) 동산에 있다. 화룡시와는 10리 상거이고 연길―화룡도로에서 100여메터 되는 곳이였다.
묘소가 있는 언덕은 벽돌로 계단을 쌓고 그우에 콩크리트로 다졌으며 묘소주위에는 장방형으로 쇠담장을 둘렀다. 그속에 둥두렷한 봉분 세개가 가지런히 있고 묘소앞에는 돌비석이 나란히 세워있었다. 복판 비석에는 <<대종교 대종사 홍암 라선생 신해지장(大倧敎大宗師弘巖羅先生神骸之藏)>>이라 새겨있고 왼손켠 묘소의 비석에는 <<대종교 종사 백포 철형 서일 신해지장(大倧敎宗師白圃喆兄徐一神骸之藏)>>이라 씌여있고 오른손켠 비석에는 <<대종교 종사 김교헌 신해지장(大倧敎宗師 金敎獻神骸之藏)>>이라고 밝혔다.
바로 여기에 묻힌 세분께서 우리 민족의 위대한 대종교 본사를 1911년에 여기에 옮기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을 펼쳤었다. 그때로부터 경신년 대토벌을 맞기까지 청호는 대종교의 성지로 되였었다. 하지만 이 세분의 골회는 여기에 이장된후로 성도들에 의해 지켜오다가 광복후로 버림을 받아왔었다. 다행이 뜻을 가진 분이 있어서 1989년에 드디여 새롭게 평토가 된 봉분이 일어서게 되였다. 그분이 바로 연변력사연구소의 강룡권(姜龍權 52세)선생이다.
강룡권선생은 1987년에 서일의 묘소를 찾기 시작해서 꼭 3년만에 소원성취를 했는데 우연히 서일의 묘비옆에서 땅에 묻힌 라철교주의 비석을 발견했다. 1990년 청명날 강룡권선생은 라철교주의 다섯째 아들 정기(正紀)의 차자 라일석(羅日錫 연변뻐스공장 직원), 삼자 라종석(羅鍾錫 룡정시 팔도향농기계공장 로동자), 서일의 아들 서윤제의 장자 서경섭(徐京燮), 그리고 청호촌의 여러분들과 함께 묘소에 가토를 하고 비석을 다시 세운다음 제를 지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대종교총본사와 후손들과 청호촌 촌민들은 뜻을 하나로 모아서 오늘 우리가 보는 삼종사의 묘를 수건했던것이다. 김교헌종사의 비석은 끝내 찾지 못해 후에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강룡권선생은 <<서일묘소를 찾기까지>>라는 글에서 <<―백포 서일이 여기에 안치된 1927년으로부터 63년, 임오교변으로부터 48년만에 교도가 아닌 백성들이 이와 같이 성대한 모임을 가지고 성묘하였으니 삼종사의 넋은 오늘 무한한 즐거움과 위안을 받았으리라고 믿는다―>>라고 적었다.
나는 <<동북해방기념탑>>앞에 숙연히 서서 가슴 아픈 사연을 좇았다.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선렬들이 이 땅에 피를 뿌렸던가! 그제날 저 높은 가을 하늘과 같이 푸른 두만강물인양 맑은 마음들이, 동산에 둥실 솟는 저 태양과 같이 조국애에 끓던 심장들이 이 땅 그 어느 고개, 어느 한 골짜기, 어느 나무, 어느 돌밑엔들 잠들어있지 않으리!
애닯다, 저 혼탁해진 두만강과 같이 너무나도 찌든 우리들의 모습이여!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