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와 강과 그리고 나 (연재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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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강과 그리고 나 (연재 18)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08.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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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연산의 장편답사기>

945년 8월 18일 새벽이였다.

<<똑똑똑>>

다급한 노크소리와 함께 <<불을 켜시오, 불을. 일본놈들이 망했다오. 이제는 해방이라오. >>라고 말하는 앞집 아주머니의 기쁨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어느새 등잔불을 밝히자 방안은 삽시에 환해졌다. ―형님은 기쁨에 못이겨 문을 차고 밖으로 나갔고 아버지는 <<우리도 나라를 찾게 되였구나>>라고 하시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

날밝기전에 우리 형제는 아침을 대충 설치고 연길로 떠났다. 마을밖에 이르니 수많은 농민들이 비행장 군수품창고를 털어 새 군복, 새 담요, 새 군화 등을 꿍져메고 오는것이였다. 호기심에 끌린 우리 형제도 비행장으로 갔다. 비행장에는 왜놈들이라곤 한놈도 없었다. 비행기 넉대가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모두 합판으로 만든 가짜 비행기였다. ―

―연길시내에 들어서니 사람들의 얼굴에는 전에 볼수 없던 웃음꽃이 환하게 피였고 저마다 해방맞은 기쁨을 자랑하는것이였다. 우리가 지금의 제2백화상점앞에 갔을 때 쏘련 땅크 한대가 먼지를 일구며 달려왔다. 길가던 사람들은 너나없이 두손을 높이 추켜들고 <<쏘련군대 만세!>>를 목청껏 웨쳤다. 달리던 땅크가 우리앞에 와 멈춰서더니 쏘련 홍군 한사람이 땅크에서 내려 모여선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하면서 뭐라고 말하였지만 우리는 도무지 알아들을수 없었다. 그러자 그 병사는 땅바닥에 청천백일기, 태극기, 일본기를 그려놓고 나에게 어느것인가를 가르키라고 손시늉을 하였다. 어려서 내가 조선에서 살 때 집에 감추어둔 태극기를 본적이 있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태극기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 병사는 기뻐하며 <<하라쑈, 까레스끼!>>하고는 엄지손가락을 내밀어보였다. ―

(태극기를 앞세운) 행진대오는 어느덧 천여명으로 늘어났다. 경축행진에 참가하지 못한 남녀로소들은 행길 량켠에 줄지어 서서 만세를 웨쳤다. ―이따금 쏘련 군대들은 군용차를 타고 우리 곁을 지나면서 <<우라!>>를 부르기도 하고 손을 젓기도 하고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이기도 했다. 또 일본군용차는 백기를 꽂고 무기를 바치러 가고있었다. 우리는 일본군용차를 볼 때마다 젖먹던 힘까지 다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불렀다. 저녁때가 되였다. 나는 형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자 바람으로 흰천에 태극기를 그려 긴 나무에 동여매고 꽂아놓았다. ―

<<저것이 바로 우리 나라의 태극기요. 우리는 저 태극기를 들고 3. 1운동 때 만세를 불렀소. >>

아래집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감동된 군중들은 <<만세, 조선독립만세!>>하고 소리높이 웨쳤다.

당시 <<한민일보(韓民日報 연길에서 발간된 조선문신문)>>의 기재에 의하면 그해 9월 18일 쏘련 홍군과 함께 연변으로 온 동북항일련군 연변분견대(分遣隊)의 강신태(姜信泰), 최명석(崔明錫), 박락권(朴洛權), 김만익(金万益) 등 동지들이 연길에 진주하여 강신태가 간도주군경비사령부(間島駐軍警備司令部) 부사령원을 맡았고 동시에 연변 각지 군중들은 자발적으로 <<별동대(別動隊)>>, <<보안대(保安隊)>>, <<자위대(自衛隊)>> 등 지방무장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위만주국군 잔여세력 및 비적을 청산하였다.

장동운(張東雲 70세 전라남도 영암군 태생. 현재 료녕성 단동시 거주)선생은 말한다.

<<1945년 8월 5일 일본 나고야로 강제징병을 가게 되자 도망하여 연변으로 왔어유. 안도현 명월구에 와서 며칠후 광복을 맞았지요. 이듬해 1월 5일 조선의용군에 참가했습니다. 당시 총을 메면 밥을 얻어 먹을수 있었으니 그보다 더 편한 일이 없었다구요. 연변의 조선의용군은 제5지대였고 후에 독립6사로 되고 전우가 사단장이였고 최채동지가 부정위였답니다. 1947년 9월 공산당에 들었고 중대의 문화간사로 되였지요. 연변내에서 토비를 숙청하고 화전 등지에서 국민당군대와 수없이 싸웠답니다. 고점자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연길로 돌아왔답니다. >>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1945년 11월 초순 심양에서 조직되였다. 정위는 박일우(원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 부교장), 길림성 화룡현 사람으로서 1930년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45년 중국공산당제7차 당대표대회 대표였다. 지대장 리익성, 참모장 전우와 리권무 등도 모두 항일투사들이였다. 1945년 12월 31일에 연길에 도착한 900여명 5지대는 연변 경비1, 2퇀과 합병하여 조선의용군 15, 16 두개 퇀을 편성, 1948년 1월 동북군구 독립6사에 편입되여 16퇀으로, 1948년 11월에는 제4야전군 43군 156퇀, 466퇀으로 개칭되였다. 이 조선인부대는 토비숙청, 동만철도경비, 길림전투, 장춘포위전, 평진전역, 남하행군, 도하작전, 남창위수, 강서에서의 토비숙청에서 수다한 공훈을 세웠고 이 퇀의 2영 7련― <<김성범련>>은 사단의 영웅련대로 이름을 떨쳤다. 1949년 11월 이 퇀의 리순임, 정형련은 1급 전투영웅으로, 19명이 2, 3, 4급 전투영웅으로, 김성범, 주광문, 박문수 등 13명의 렬사들은 인민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국내 해방전쟁기간 동북3성에서 6만 3천여명 조선인 청장년들이 참군했는데 이는 전 민족 17명당 한사람이 참가한 셈이였다. 연변에서만도 3만 4, 855명이 참군, 전 연변의 참군자수의 85%를 점한다. 그리고 담가대, 운수대 등 전선근무대에 참가한 사람은 연인수로 20만 2, 300명이고 우마차 등 여러가지 운수도구는 1만 9, 200대가 동원되였다. 담가대와 운수대에서만도 3, 427명이 공을 세웠고 1, 582명이 모범근무자로 당선되였다.

중국인민해방군부대의 조선인 장병들과 마찬가지로 1949년과 1950년초에 모택동과 주덕총사령의 명령에 좇아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인민군으로 편입되였다. 박일우동지는 조선의 내무상으로 되고 전우동지는 사단장으로 되였다.

화룡시 숭선진 고성리촌의 김성묵(金星黙 70세)은 1947년에 참군, 1950년 4월 조선으로 나가 인민군 7사에 편입되였다. 두달동안 훈련을 받다가 전쟁에 휘말려들었다.

<<6월 25일 새벽, 맹렬한 포사격이 끝나자 국군진지로 돌격해보니 한개 분대의 국군밖에 없더군요. 녀자 방송원이 하나 있고―참말로 포탄 값도 못한 셈이지요. 닭 쫓듯 진군했어요. 당시 우리 군이 땅크를 몰고 서울에 들어가자 국군병사들은 쏘련군인줄로 알았다고 했어요. 인민군이 땅크에서 나오자 깜짝 놀랐다는거지요. 내가 소속된 사는 이천에서 국군의 반격을 받아 쌍방이 숱한 사망자를 냈어요. 국군의 포탄이 대피호에 떨어지면서 나는 부상을 당했답니다. 팔이 끊어지고 다리를 상했지요. 평양 웽그리아병원으로 이송, 치료를 받다가 매일 20리씩 길을 줄여서 신의주로 와서 압록강을 건너 유수현에서 치료를 받다가 다시 이듬해 3월 전선으로 나갔답니다. >>

김성묵로인의 전쟁담이다.

련합군의 인천상륙으로 후퇴한 조선인민군은 중국경내로 전이했다. 겨울에 두만강을 건너온 인민군은 연변의 화룡, 룡정, 연길, 훈춘 등에 집중하여 사민들 집에 10여명씩 거주했다. 중국에 친척이 있는 백성들도 강을 건너 피난을 했고 그외는 산속에 땅굴을 파고있었다.

그해 음력 10월 1일(상사날), 미군 비행기가 무산을 처음으로 폭격했고 이틀후에 두번째로 폭격했다. 당시 상황을 화룡시 덕화진의 천중백은 말한다.

<<첫 폭격에 무산에서 17살 최호림학생이 죽었답니다. 비행기는 중국쪽에서 선회하여 조선측으로 꼰지면서 대두병같은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들이댔지요. 비행기가 어찌도 낮게 떴든지 자루가 긴 꽉지로 걸어서 당길것 같았답니다. 조선 쪽에서 폭파하는 진동에 중국쪽 마을 유리며 문짝이 떨어져나갔답니다. 공습 싸이렌이 울리면 조선사람들은 새까맣게 두만강으로 해서 중국으로 건너오기 시작했지요. 그러면 중국쪽에서 못오게 막았답니다. 사람들은 울면서 같이 삽시다고 손이 발이 되게 빌었거든요. >>

화룡시 숭선진 고성리와 조선의 량강도 삼장리는 한 마을이나 다름없어 폭탄의 세례를 무던히도 당했다.

류일복씨는 <<<11. 22>사건과 불발탄>>이라는 글에서 당시 정경을 아래와 같이 썼다.

―1950년 11월 22일 아침 6시 30분경이였다. 홀연 하늘 공중에서 <<우릉우릉―>>하는비행기소리가 들려오더니 미군 비행기 석대가 남쪽으로부터 숭선변경상공에 날아와 빙빙 돌다가 사라졌다. 온 마을사람들이 뒤숭숭하여 어쩔바를 모르고있는데 8시 40분경에 동구밖 홰나무에 달아놓은 구리종소리가 둔탁하게 들려왔다.

떵떵떵―

과연 전투기 세대가 삼각형을 이루면서 군함산과 조선 선녀봉사이로 기습해왔다. 한대는 숭선 동북쪽 휴양소마을 꼭대기로, 한대는 숭선 동남쪽 조선 서두수물결을 타고, 다른 한대는 숭선 서쪽 상천벌상공으로 돌진해왔다.

당시 숭선학교운동장에서 자위단(민병)훈련이 진행되군 했는데 숭선학교 토목집을 군사요충지로 잘못 안 미군은 폭격을 들이댔다.

고공 200m 높이에서부터 기총소사를 해대고 폭탄을 투하하였는데 비행기 앞머리에 새긴 영문문자가 한눈에 안겨왔다. 학교 기둥에는 칼자루만큼한 탄약깍지가 들이박히고 폭탄이 떨어지면서 학교 모퉁이가 몽창 내려앉으며 불이 달렸다.

― ―미군 비행기는 10여분사이에 13개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6발은 중국측에, 7발은 조선측에 떨어졌다. 두만강엔 집채같은 물기둥이 일고 폭격을 맞은 숭선소학교는 찌그러졌으며 뒤마당에는 흙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그중 폭탄 하나는 떨어져 땅에 꽂힌대로 있었다. 이런 불발탄은 조선측에도 하나 있었다.

그후 심양군구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불발탄주위에 2m 높이의 울바자를 치고 <<미제국주의가 낳은 산물>> <<위험>>이라는 글을 백지에 써서 붙여놓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근처에 얼씬하지 못하게 밤낮으로 보초를 섰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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