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와 강과 그리고 나 (연재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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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강과 그리고 나 (연재 15)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08.10.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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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연산의 장편답사기>

윤동주의 부모들은 1900년에 명동촌에 이주했고 시인은 1917년에 여기에 태를 묻었다. 1925년에 명동학교에 입학했고 그후 달라자, 룡정 은진중학, 광명학원, 서울 연희전문학교, 동경 입교대학에 입학, 1943년 독립운동혐의로 피체되여 1945년 3월 6일 잔인한 인체실험으로 옥사했고 지금은 룡정 뒤산 공동묘지에 그와 함께 옥사한 고종사촌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송몽규와 가지런히 누워있다.

윤동주생가와 서쪽켠에 동향으로 앉은 사랑채사이 공간에는 커다란 기석이 있었다. 모르고 보면 옛날 석마돌을 놓았던 자리로 오해하기가 적당했다. 그런데 명동촌 촌장 겸 당지부서기 송길련(宋吉連 40세)의 말을 들어보면 그것은 룡정시 지신향정부와 룡정시 문학예술련합회에서 공동으로 만든 <<윤동주생가옛터>> 기념비를 놓을 기석으로 만든것인데 뜻대로 되지 못해 쓸쓸히 때를 기다린다는것이였다. 1999년 봄에야 다시 올려진 그 생가의 비문은 <<윤동주생가옛터>>라는 제목아래 아래와 같은 해석이 씌여있다. <<시인 윤동주생가는 1900년경 그의 조부 윤하현선생이 지은 집으로서 기와를 얹은 10간과 곳간이 달린 전통구조로 된 집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이 집에서 태여났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매도되여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에 허물어졌다. 1993년 4월 명동촌은 연변대학 조선연구센터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의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력사적 유물로서 윤동주생가를 복원하였다. >>

그날 복원식에는 <<반일민족독립투사 김약연, 저항시인 윤동주 사진전람>>이 교회당에 설치되였었다. 그 전람의 머리글은 이렇게 썼다.

―우리 민족의 성산―백두산 정기를 머금고 력사의 견증자로 우뚝 선 선바위, 밝은 동녘(명동)을 꿈꾸며 일어선 겨레의 개척지―명동촌!
반일과 독립의 발자취는 세월의 흐름속에서 더더욱 력력하고 향토애, 민족애, 조국애로 가슴을 태우며 몸과 마음을 갈던 의사들의 배움터―명동학교는 새롭습니다.
력사는 인간을 깨우치는 솔직한 교과서입니다. 옛간도 문화교육과 독립투쟁의 력사로 손색없는 명동마을 모습을 되새기며 지구촌에서 사는 우리 민족의 넋을 키워가는것이 우리의 옳바른 자세일것입니다.

륙도하기슭에 남긴 독립투사들의 발자국, 선바위에 비낀 애국지사들의 그림자―력사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도록 우리를 이끄는 선각자들의 빛나는 령혼은 하늘의 별처럼 반짝입니다. ―의사들의 념원은 다름아닌 우리 동포들의 아기자기한 모임입니다. 그 꿈을 위해 의사들의 기념비는 그들이 실천한 터전우에 떳떳이 일어서야 합니다.

1995년 2월 나는 세번째로 명동촌을 찾아갔다. 려로에 룡정 합성리 공동묘지에 세워진 <<3. 13 반일지사릉>>이라고 씌여진 비석을 찾아 묵도를 올렸다. 1990년 5월 19일에 세워진 비석뒤면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새겨져있었다.

1919년 3월 13일 반일 대시위는 연변지구 조선족인민군중이 분발하여 일떠나서 일본제국주의 침조침화(侵朝侵華)정책에 저항하고 민족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한차례 군중성적 혁명투쟁이였다.

같은 달 17일 룡정 합성리 공동묘지에서는 순난자들에 대한 안장의식을 성대히 거행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지방 당국의 잔폭한 폭행에 항의했다.
19명 순난의사 명단:채창헌(蔡昌憲), 김흥식(金興植), 박문호(朴文鎬), 공덕흡(孔德洽), 현봉률(玄鳳律), 김승록(金承祿), 김태균(金太均), 장학관(張學觀), 김종묵(金鍾黙), 허준언(許俊彦), 김병준(金炳俊), 박상진(朴尙振), 최익선(崔益善), 정시익(鄭時益), 현남로(玄南魯), 리유주(李裕周), 차정룡(車正龍), 원인선(元仁先), 김진세(金鎭世).

그날 시위에는 명동학교 <<충렬대(忠烈隊)>>가 앞장에 섰는데 순난의사 김흥식은 바로 명동학교 학생이였다. 3. 13만세운동에 앞서 2월에 명동학교 최봉익교원이 서울에서 <<조선독립선언서>>를 가져왔다. <<독립선언서>>에 고무된 연변의 유지인사들인 김약연(金躍淵), 배형제(裵亨提), 김내범(金乃范), 리하영(李夏永), 최창석(崔昌錫), 구춘선(具春先), 강구우(姜九禹), 신명덕(申明德), 김승문(金承文), 차의범(車義范), 김하준(金河俊), 박도용(朴道容), 남인상(南仁相), 방우룡(方雨龍), 마진(馬晋), 지병학(池炳學) 등은 <<조선독립선언서 포고문>>을 작성하여 전 만주에 폈다. 포고문은 아래와 같다.

오, 우리 동포들은 마침내 오늘에 이르러 우리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세계 인도적이고 정의적인 평화를 눈앞에 보노라. 금일 마음을 다잡고 4천년 신성하고 장엄한 력사를 되새기며 2천만 활발하고 용감한 정신으로 당당히 독립을 선언하노라.
동포여, 들으라. 금일의 독립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진것도 아니고 아울러 타인의것을 빼앗은것도 아니다. 우리가 고유했던것을 회복하는것이므로 떳떳이 선양하는 바이다. 아, 십년간의 굴레의 속박을 어찌 잊으랴. 3천리 강토는 여전히 양춘과 함께 숨쉬며 수천설지(水天雪池)중에 있노라. 순환공도(循環公道)는 이러하거니 오인(吾人)의 주장과 태도는 광명정대한것이다.
조선건국 사천이백오십이년 삼월 십삼일
재남북만주 조선인대표

3월 13일 룡정 각지에서 모여온 2만여명 조선족들이 성세호대한 집회와 시위를 단행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목청 터지게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집회가 끝난후 명동학교 학생을 선두로 한 시위대렬이 일본령사관을 향해 호호탕탕 출발했다. 일본령사관의 구원을 요청받은 지방 군벌 맹복덕퇀장은 병사를 거느리고 시위군중을 저격하여 당장에서 13명의 사망자를 냈고 19명이 부상을 당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당시 동북에 거주한 조선족중 시위에 나선 사람이 근 10만이라고 한다. 3. 13운동후 두만강 연안 연변지구에만도 7개의 반일조직이 결성되였는데 그 인수는 2, 900여명, 장총 2, 600여자루에 기관총 5정이 있었다. 유명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바로 이런 반일단체들의 빛나는 전과였다.


하지만 력사가 70년이 흐르도록 반일의사들이 묻힌 곳이 미지수로 남아있었다. 광복전 일제통치하에서는 물론 광복후에도 의사들의 묘지를 찾아서 술 한잔 붓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개혁개방이 되면서 원 룡정시건설위원회 최근갑(72세)주임은 우정식, 김규칠, 박송죽 등과 함께 <<3. 13반일의사릉 수선위원회>>를 세우고 자진 회장이 되였다. 그리고 1989년 10월부터 1990년 4월까지 당년의 관계인사 30여명을 방문, 력사자료를 뒤지고 현지답사를 해 룡정시 광신향 룡남촌에서 2. 5키로메터 떨어진 합성리공동묘지라는것을 확인했다. 1990년 5월 19일 그들은 나무비석을 세우고 추모회를 가진 뒤를 이어 묘소수선을 끈질기게 밀어 1995년 8월 돌비석으로 바꾸게 되였다는것이다.


비석을 어루쓸며 당시의 노호한 시위군중의 물결을 머리에 되새기는 나의 복장을 울리는 메아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난해 8월 29일 <<반일민족독립투사 김약연, 저항시인 윤동주 사진전람>>의 머리글 맨 마지막 구절이였다.
<<력사와 더불어 의사들의 충혼은 영원할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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