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당 안은 덥지도 않은데 에어컨을 너무 켜놓아 썰렁했다.
한시간반정도 청소를 하고 나니 "아침식사 합시다" 하고 팀장언니의 부름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희고 차 보이는 팀장언니가 자기소개를 하라고 한다.
한국사람 앞에 기죽지 말아야지!
"전 중국 흑룡강에서 온 유나(별명)라고 합니다. 한국에 처음 왔고요, 식당일도 처음해요. 그러나 열심히 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홀에는 팀장인 한국언니 빼고는 심양언니, 연길언니, 대련언니, 그리고 나 흑룡강언니 해서 교포가 넷이고, 테블은 아래 위층 해서 185개다.
식사가 끝내자 팀장언니는 테블 번호, 메뉴, 손님접대 예법 등을 한꺼번에 알려주느라 짜증을 냈고, 나는 그걸 머리에 입력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다른 언니들은 일이 밀린다고 아우성이다. 식당 일이 처음이라 용어와 메뉴는 하나도 모르겠고, 중국과 틀려서 손님이 청하는 것을 갖다 주려면 언니들한테 자꾸 물어야 했다. 손님들이 밀려들면 말할 틈도 없다. 옆에서 또 물으니 언니들은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냐 듯 상을 찡그리고 저들끼리 수군거린다. 정말 쪽 팔렸다.
어느 날, 나는 홀서빙을 하다 주방에 들어가 그릇을 가시고 있는 자기를 발견했다. 이층 손님까지 서빙 마치고 내려오니 주방언니가 좀 도와달란다. 내 일이 아닌데? 그래도 나는 팔을 걷고 나섰다. 다음부터 문제가 생겼다. 언니들이 사방에서 날 불렀다. 여기 와서 상 치우라, 커피 뽑아오라, 손님 좀 받으라.…나는 바보가 돼 가고 있었다. 누구나 나를 부려 먹을 수 있으니까. 하루 종일 웃음 한 번 없이 식당 안은 팽팽 돌아갔다. 일이 끝나면 눈앞이 캄캄해 났다. 쉬는 날이 손꼽아 기다려졌다. 푹 자야지, 먹지 않고 씻지 않고, 실컷 자야지!…이 세상에 푹 자는 것만큼 좋을 것 없어 보였다.
이때 누군가가 내 앞을 막아섰다. 빗지 않은 머리에 퉁퉁한 얼굴, 입에 빨간 립스틱을 핏빛같이 바른 서른대여섯의 여인, 눈망울에 물음표를 달고 나를 쳐다본다. 가게 주인의 외동딸 영이언니다. 서빙 끝내고 돌아서다 가슴 철렁했다. 깜박 졸았던 모양, 영이언니가 씩 웃고 주방으로 뒤뚱거리며 간다. 사장님이 못나오게 해서 그녀는 주방 안에서만 맴돌았다. 바보천치 같았다. 홀 언니들은 사장님 낯을 가리지 않고 큰소리를 질렀다. “비켜, 방해 놓지 말구.” “어이구, 니 이러다 어떻게 시집갈래, 응?”…
그런데 나는 사장님께 감동 먹고 말았다. 영이언니는 사장님의 친딸이 아니라 양딸이란다. 장애인을 양딸로 삼았단다. 그녀는 장애인 학교를 졸업하고 식당도우미 하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부녀가 출 퇴근 길에 손잡고 다니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했다. 사장님은 양딸이 손님한테 불미스런 일을 저지를 까봐 문턱에 금을 그어놓고 홀에는 못나오게 했다. 발을 금에다 가져다 대고 목을 한껏 내밀고 나를 쳐다보는 영이언니가 가여웠다. 이 홀 안에서는 누구도 알아주려 하지 않고 찬바람만 씽씽 내니까.
"언니, 이 것 좀 받아 줘요." 나는 그릇을 내밀었다. "고마워" 나는 감사하다고 했다. 참을 먹고 나서 커피도 빼주었다. "언니, 일 잘하네" 칭찬도 했다. "유나가 일 잘 해유" 영이언니가 밉지 않게 웃었다. "저것들 노네." 하고 곁에서는 비웃는 눈초리들이다.
그러나 며칠 안 돼 홀에는 웃음이 넘쳤다. 영이언니가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라 다니다가 사장님만 보면 주방으로 달려가느라 오리엉덩이 걸음을 했고, 사장님은 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팔을 벌려 휘휘 쫓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 공주님은 나를 방패삼아 술래잡기를 논다. 나도 웃고 공주도 키득거리고 사장님도 허허 했다. 곁에서 입을 실룩거리던 언니들도 웃기 시작했다.
단체손님들이 빼곡히 앉았는데 영이언니는 문턱에 광어회그릇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언니, 언니"하고 부른다. "유나야, 사장님이 문턱을 못 넘어 가게 했어" 하고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친다. 내가 급히 달려가 받으며 "언니, 수고했어"하니 "손님, 수고했어."하고 대답해 좌중을 웃긴다. 식당 안에 웃음이 도니 갑갑하던 가슴이 한결 내려가는 듯싶다.
피곤으로 아침에는 도저히 이부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꼬부랑 할머니처럼 허리 굽히고 겨우 일어나 한걸음 두 걸음 걷기 시작했고, 두 손과 두 발은 부어서 곰발이 됐다. 저녁에 누우면 온 저녁 잠꼬대를 한다.…
오매에도 기다리던 휴일이 돌아왔다. 그런데 팀장이 나를 휴식하지 말고 나오라 했다.
"언니 미안해요, 전 면접 때 사장님과 한 약속을 지킬게요"하고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넌 왜 이래 특별하게 나오는 거니? 참, 중국 애들은 이상하다니까."
“언니 왜 '중국 애'를 들먹이죠? 아예 조센징이라고 하지, 언니하고는 할 말이 없으니 사장님께 여쭐게요." 하고 칼로 자르듯 말했다.
사장님도 내가 그만 두는 줄 알았는지 짜증을 냈다.
“됐어, 칫, 쉬어라 쉬어.” 누가 화를 내야 하는데? 어이구 속 터져! 참자. 참자. 이번 주말에 실컷 잘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데?
후에 알고 보니, 원래 있던 홀 언니들이 규정보다 한 번씩 더 쉬려고 했던 거다.
그로부터 나는 팀장언니에 의해 무작정 내쳐 버렸다. 두 주일이 지나도록 메뉴를 주문받지 못하게 하고 무겁고 지저분하고, 저들이 하기 싫은 일만 시켰다.
한번은 띵동, 소리가 울려 손님상으로 달려갔더니 두꺼비를 달란다. 내가 두꺼비가 뭔지 알아야지, 주방에 메뉴를 넣었더니 금방 폭소가 터졌다. 참이슬 소주를 달란 말이란다.…
얼마 후 팀장언니가 열이 있어 출근하지 못했는데 그날따라 손님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사장님이 나더러 빨리 가서 메뉴를 주문 받으라 독촉했다. 그래, 이제 기회가 왔구나. 잘해야지! 나는 얼굴에 웃음을 환하게 발랐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 분을 잘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인사말을 떼고 나서 메뉴주문을 받고 음식을 올리고 “맛있게 드세요. 부족한 거 말씀하세요, 물 따라드릴까요? 감사합니다”등 살갑게 인사를 했더니, 오 이게 웬일인가! 드시고 나가는 손님들마다 카운터 앞에 있는 사장님한테 “오늘 최고로 서빙을 잘하는 언니가 잘 챙겨주어 기분 좋게 맛나게 먹고 갑니다.”하며 입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 한 어머님은 “ 사장님, 어디서 저렇게 예쁘고 맘씨 곱고 일 잘하는 언니 데려 왔소? 정말 잘 먹고 갑니다. 후에 자주 올게요.”하고 말했다.
이튿날부터 사장님은 예약손님 대부분을 나한테 주문 맡겼다. 사장님의 명령이라 다들 처음에는 의아하고 심술이 났겠지만, 팀장언니마저 별다른 내색을 안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손님이 만족 해 할까, 손님들이 바라는 건 무엇일까?”를 빨리 포착하고 빠른 시간에 해결해주기 위해 힘썼다. 궂은일 마른 밀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물론 영이언니와 간간히 농을 하면서 에어컨이 돌아가는 식당 안에 웃음폭탄을 선물했다. 놀리는 게 아니고, 말하고 행동하다 보면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둘은 어느덧 친구가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술 상자를 정리하던 팀장언니가 아야, 소리를 질렀다. 깨진 술병에 손을 다쳐 피가 벌겋게 났었다. 카운터에도 사놓은 벤드가 없기에 나는 급히 약국으로 달려가 약과 벤드를 사가지고 왔다.
“언니, 빨리 와, 싸매줄게. 많이 아프지? 언니 오늘 밥 열 공기 드셔, 그래야 피를 보충 받아 내일 일 많이 할게 아니야. 그래야 우리도 쉽지, 킥.”
“유나야-, 고맙다.”
팀장언니가 나의 손을 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그후로 팀장과 나는 가끔 술도 마시고 속도 터놓으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나의 단골손님도 점점 늘어났다. 입담 좋고 말하기 좋아하는 황사장님도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는 “이 언니는 팀장언니랑 똑같아, 완전 한국인이야. 가려낼 수 없단 말이야.”하고 말하는가 하면, 황사장님의 친구는 “그래, 난 한국언닌 줄 알았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정말 모르겠는걸.”하고 기분 좋게 웃어준다.
영이언니도 뒤에서 박수를 치고는 "유나언니는 본래 한국 언니야" 한다.
사장님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유나야, 니 무슨 마법이 있기에 니만 오면 식당에 웃음이 떠날 줄 모르냐, 응? 절대 우리 가게 떠나면 안 된다. 노임 많이 올려 줄 게.”하고 등을 다독여 주었다.
나는 인생을 새로 배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