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님, 오늘 바쁘신 일이 없으시면 저와 함께 창성시장을 가보았으면 고맙겠습니다.”
“마침 저도 오늘 별로 할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또 멀리 한국에서 연변까지 와 길 좀 안내해 달라는데 ‘나 시간이 없어서 안 되겠습니다.’라고 말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제가 꼭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내 부탁을 듣고 망설임 없이 김 선생이 허락해 주었다.
호텔방을 나와 식당에 들러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곧 창성시장을 둘러보기 위해 택시를 탔다. 택시는 연신다리를 넘어 하남 방향의 대로를 질주하다가 좌회전하여 허름한 뒷골목 어떤 아파트 단지 네거리에서 멈춰 선다.
가는 동안 택시 안에서 9년 전의 창성시장을 연상해 봤다. 물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연길시는 한국경제를 등에 업고 급속한 변화로 한해만 지나도 다른 도시에 온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발전 속도가 매우 빨랐다.
창성시장에 다 왔다는 김 선생의 말에 나는 택시에서 내려 좌우를 둘러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9년 전 밤에 처음 들렸을 때만해도 길가엔 가로등도 없었고 썰렁한 시장 골목에 띄엄띄엄 있는 가게에 매달려 졸고 있는 듯한 흐린 불빛이 전부였었다. 흙길이던 도로는 말끔히 포장되었고 가로등이 길가의 전신주를 따라 죽 도열되어 있는 게 오히려 몹시 낯설게만 보였다. 그리고 코를 막고 지나가게 만들던 길가의 악취도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처음 도입된 중국에서 아주 영세하게 처음으로 형성된 시장터였기 때문에, 창성시장은 그 당시만 해도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다기 보다는 오히려 두려움이 전신을 휘감고 돌던 그런 곳이었다.
여기저기 웃통을 훌렁 벗은 젊은이들이 빈 수레 둘레에 빙 둘러 앉아 지나가는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야릇한 눈빛을 피해 고개 돌려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거리, 소매를 끌다시피 하며 한 푼 보태달라고 매달리던 꽃제비가 득실대던 곳이기도 했다. 흔히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우범지대 같은 느낌을 받던 거리였다.
섭씨30°를 넘나드는 폭염 아래 좌판대에 즐비하게 진열된 소․돼지의 고깃덩어리가 내 눈길을 강하게 잡아끌던 거리였다. 널판때기 위에 생선도 그대로 진열되어 비릿한 냄새가 더욱 코끝을 강하게 자극했고, 여기저기 쌓인 쓰레기 더미에서 흘러내린 썩은 물에 질퍽이던 흙길이었다.
지금 그 옛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죽죽 뻗은 아스팔트길을 사이에 두고 높이 솟아있는 아파트 군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초창기에 주상복합건물로 지어진 낡은 건물엔 아직도 「창성시장」이란 간판이 붙어있어 그 건물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장 안을 둘러보았으나 그 옛날을 연상시킬만한 그런 시장이 아니다. 조금은 조잡하나 매대 위에 진열된 농산물과 생필품이 시장경제에 잘 길들여진 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한 귀퉁이에 아주 영세하나마 옹기종기 붙어 있는 음식점들이 옛 모습을 상징하듯 아직도 남아있다.
“김 선생님! 그 옛날의 시장 모습이 다 사라져 버렸네요. 나는 상상 속의 옛 거리를 연상하고 이 곳에 오자고 했는데 아주 아득한 옛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가 되었군요.”
김 선생에게 나는 그 순간에 느꼈던 내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선생님 말이 맞아요. 이 곳이 재개발되기 이전에는 우범지대였으니까요. 우범지대라기보다는 연변의 대표적인 빈민가 거리였지요.”
“지금 김 선생이 말씀하신 그런 거리일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왔는데…, 더 이상 둘러볼 필요가 없겠습니다.”
정확하게 햇수로 9년 전 여름이었다. 내가 이곳에 찾아오기 전 날 비가 내려 비포장도로의 시장골목은 말이 도로이지 그 때의 상황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흙탕길을 피해 일보전진 일보후퇴 하기를 거듭하며 목적지인 아파트를 찾아갔다.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거리를 더듬더듬 지나 격한 냄새가 욱신 풍기는 건물 앞에 도착해 칠흑 속의 계단을 감각만으로 한발 한발 더듬는다. 혹시라도 발을 헛디딜까 조심조심 3층까지 올라가 낯선 현관문 앞에 섰다.
똑똑똑 하고 철대문 두드리던 소리가 멈춘 뒤 어둠과 어우러진 고요가 한층 불안한 내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자극한다. 정적 속에 심장 뛰는 소리가 콩닥콩닥 들리는 듯했다.
잠시 후 현관문 안에서 누구냐고 카랑카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어둠 속의 싸늘한 밤공기를 가르고 들려온다.
“저 한국에서 온 이상규라는 사람입니다.”
내 신분을 알려 주자,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또 정적의 시간이 이어진다. 한참 후에 삐걱하고 현관문이 열리며 흐릿한 실내 정경이 내 눈앞에 어슴푸레 와 닿는다.
현관문을 열어준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아주머니가 어서 들어오라고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나는 그 순간의 묘한 분위기로 하여 머뭇거리다가 마음을 다기지게 고쳐먹고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말없이 한참을 현관문 안에 서서 두리번거리며 선뜻 들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험악한 곳에서 생활하면 불안하지 않습니까? 불법 입국자 색출 지시가 떨어지면 제일 먼저 당국에서 조사를 나올 것 같은데….”
너무나 험악한 분위기에 머리끝이 쭈뼛 서와, 말끝을 맺지 못한다.
“할 수 없잖아요.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돈도 없고 또 돈벌이를 할 수도 없고 그냥 두려움을 감수하며 사는 데까지 살아가야지요. 이게 다 제 운명이니까요.”
그녀는 체념 섞인 가냘픈 음성으로 자신의 처지를 대변한다.
“아주머니는 혼자가 아니잖아요. 어머니가 계시고 또 자식도 있고 여동생과 남동생도 있으니 가장이나 마찬가지지요. 여하튼 아주머니는 몸조심을 하셔야지요. 내가 앞으로 약간의 도움을 드릴 테니 다른 아파트로 되도록 빨리 이사를 가세요.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둑한 불빛에 두려운 마음마저 느껴지는 좁은 공간에서 한순간 순간이 불안하고 초조해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오히려 내 행동이 어색해지던 순간이었다.
그날 밤 남동생이 북한으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북한 보위부에 잡혀가면 수용소에서 겪어야 할 엄청난 고통의 세월을 대충 알고 있기에 주머니를 털어 약간의 비용을 넘겨주며 동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줄 것을 당부하게 되었다.
훗날 그 아주머니는 좀 널찍하고 깨끗한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이사 간 새집을 방문하였을 때 북한으로 잡혀간 남동생이 출소하여 인편으로 전해온 편지 한 장을 건네받게 되었다.
이렇게 편지를 받게 된 과정과 그 후 상복이가 또 탈북하는 과정은 아래와 같다.
상복(가명)이가 북한으로 잡혀가게 된 동기는 조선족청년 동남이와 북대시장에서 사소한 시비 끝에 싸움을 한 게 원인이었다. 동남이가 탈북자 길수와 형국이를 내놓으라는 협박에 모른다고 말했더니 모른다는 게 시비가 되어 싸움의 시초가 되었고 그래서 또 북한으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다.
마침 다투던 현장 근처에 있던 동남이 가족들이 상복이를 붙잡아 집에 가두고 하남파출소에 근무하는 동남이 삼촌이 파출소에 신고를 해 붙잡혀 가게 되었다.
파출소에서 하루를 감금당하고 화룡변방부대로 넘겨졌다. 거기에서 이틀간 조서를 받고 용정시에 속한 삼합변방부대로 또 이첩되었다. 그 다음날 삼합교두보에서 북한 회령시 보위부에 인계되었고 시 보위부에서 경제사범 탈북자로 분류되어 안전부로 넘겨져 3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회령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2000년 공산당 창건 55돌을 맞아 대 사면령으로 7월 12일 출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교화소에서 모진 고문과 중노동과 부실한 음식물 섭취로 인하여 얻은 영양실조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출소를 하게 된다.
그 후유증으로 늑막염 및 심장병 등 온갖 질병에 걸려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라는 편지 내용이었다. 또 명환이 문제는 알아보았는데 잘못된 것이 분명하여 곧 산으로 찾아가 보겠다는 불운한 내용과 마지막엔 병든 어머니를 잘 모셔달라는 인사말로 끝을 맺고 있다.
상복이는 왜 화룡변방부대로 이첩되었을까? 연길시에서 체포된 탈북자는 대부분 용정변방부대로 이첩되는 게 관례이나 동남이 친구가 근무하는 화룡변방부대로 보낸 이유는 상복이를 꼭 북한으로 보내 고생시키겠다는 확고한 보복행위임에 틀림없다. 약자에게 가해진 짐승 같은 강자의 유희였다.
연길에서 탈북자가 조선족과 다툼질을 했다는 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범에게 덤벼든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과거에도 상복이는 먹고 살기 위해 탈북을 했다가 붙잡혀가 3년이란 긴 세월을 교화소에서 젊은 날을 썩혀야 했다.
상복이는 무슨 정치적인 이념이 철철 끓어 넘쳐 연변으로 탈북을 한 것도 아니다. 먹고 살기 위해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복이의 기구한 운명의 내력을 듣게 되어 ‘민둥산 다람쥐’ 란 시를 읊조리게 되었다.
민둥산 다람쥐
압록강 강변
이천리 물길 따라
벌거숭이 민둥산
녹슨 철책에 갇혀
긴 세월
주린 배 움켜쥐고 체념이나 삼키다가
도토리 주워, 강냉이 주워
주린 배 채우려고
저승길 보다 더 두려운 압록강을
남 몰래 넘는다
가난이 죄가 되어
숨죽여 넘어야 하고
가난이 죄가 되어
목숨을 잃는
이 처참한 현실을
압록강아! 너는 아느냐
언제나
저 헐벗은 산야에
푸른 초목 무성하여
도토리 줍고 강냉이 주워
주린 배 채워 보려나.
우연한 기회에 상복이가 가족과 함께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해 한국으로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 그 후 금희(가명)에게 전화로 동생을 만나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었다.
며칠 뒤 상복이네 집에서 첫 대면을 했으며, 그 자리엔 누님이 되는 금희도 함께 자리를 했다. 금희의 소개로 상복이와 나는 인사를 나누었다.
“네가 회령 교화소에 있을 때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신 분이 바로 여기에 계신 이 선생님이야.”
금희가 동생에게 나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해준다.
“바쁘실 텐데 오늘 만나 뵙자고 한건 다름 아니라 북한으로 잡혀가 생활하던 교화소 생활을 들어보려 이렇게 결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상복에게 도리가 아닌 줄 잘 알면서도 기억하기 싫을 교화소 생활을 말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정말이지 북한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들은 두 번 다시 떠올리지 않으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 이 선생님의 부탁이니 하는 수 없지요.”
처음 교화소에서 출소한 한동안은 꿈조차 자신을 괴롭혀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루었다고 고백한다.
우선 탈북자가 잡혀오면 정치범을 다루는 기관인 보위부에서 정치범인가 아니면 경제범인가 분류를 하게 된다. 즉 한국으로의 밀입국을 시도했거나 한국인을 만난 사실이 탈로나면 영락없이 정치범으로 몰려 중형 아니면 종신형으로 수용소에 수감되게 된다. 먹고 살기 위한 단순한 월경죄를 저질렀다면 경제범으로 분류되어 치안을 다루는 안전부로 넘겨져 교화소(敎化所)에 수감된다.
교화소 생활은 새벽 5시에 기상을 해 밤 10시에 취침을 한다. 하루의 일과는 교화소 내에서 중노동하는 게 대부분이며 간혹 먼 곳으로 땔감을 구하러 교화소 밖으로 나가는 날도 있다. 큰 나무토막을 몇 십리 밖에서 어깨에 메고 오는 중노동이지만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있어 그래도 그 날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교화소 내에서의 노동은 원시적인 중노동으로 모든 시간을 때운다. 말이 중노동이지 정확하게 꼬집어 말한다면 고문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사는 정확히 세 끼니를 다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세끼가 문제가 아니라 음식이 문제라며 옥수수를 속까지 분쇄해 짐승도 먹지 못할 가루를 물에 버무려 주먹 만하게 기계틀로 찍어낸 주먹밥을 하나씩 준다고 말한다.
“반찬이요? 뭐 반찬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찝찔한 물에 푸르뎅뎅한 배추이파리 몇 개를 띄워준답니다. 배추나 양배추를 소금에 절여 커다란 통을 땅에 묻고 거기에 절인 배추를 보관했다가 반찬으로 주는데, 배추절인 짠물에 맹물을 부어 찝찔하게 만들고 또 절인 배추를 잘게 썰어 몇 조각 띄워 주는 게 반찬입니다. 이걸 먹고 15시간 중노동을 해야 하니 거기에서 살아남는다는 게 오히려 기적이지요.”
상복이는 경제범으로 분류되어 3년 징역형을 받고 교화소에 수감되었고 그 후 당 창건일에 대 사면령으로 1년 만에 출옥을 하게 되었다.
수감될 때 68킬로그램이던 몸무게가 1년 만에 29킬로그램으로 빠졌다니 이건 살이 빠진 게 아니라 뼈다귀와 살가죽만 남기고 온통 살을 뜯어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2000년 출소하기 전까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두 분의 죄상이 특이해 선생님께 말해 주려고 합니다.”
상복이는 7년 전의 추억을 더듬는 듯 한참동안 말문을 닫았다.
당시 45세 정도의 방씨 성을 가진 수감자는 1999년에 붙잡혀 온 한국 국적의 국민이었다고 말한다. 그 분은 원래 북한 출신인데 외화벌이로 소련에 가서 벌목공으로 일하다가 이탈하여 한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방씨는 조선족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정착금을 밑천으로 중국 훈춘에서 장사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방씨는 처남과 금전문제로 다투게 되었고 처남이 방씨의 신분을 북한 보위부에 밀고하게 되어 북한으로 잡혀가 수감되었다.
정치범인 방씨가 교화소 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2000년 당시 회령에 정치범 수용소를 짓고 있었던 관계로 임시로 일반범죄자와 함께 교화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고, 수용소 공사가 마무리 되는대로 이송될 예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형기는 17년이지만 그곳에서 17년간 생명을 부지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최홍재라고 하는 또 한 분은 15년 징역형을 받았는데 죄목(罪目)이 인신매매 죄였다고 한다. 1990년경 조선족 사회에서는 조선족 처녀들이 한국 농촌 총각한테 시집가는 게 한때 대유행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조선족 사회에서 아주 많은 수의 조선족 처녀들이 한국으로 시집가게 되었으니 그 수만큼 조선족 청년들이 장가를 못 가게 되었다. 이 틈새를 타 북한 처녀들을 조선족 농촌 총각과 짝을 맺어주기 시작했고, 그 대가로 돈벌이를 했으니, 즉 이게 인신매매 죄가 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결혼 중개업인데 북한에서는 인신매매가 되는 셈이다. 우리나라도 짝을 맺어주면 수수료를 받는 게 당연한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출소 후 상복이는 청진에서 결혼을 해 딸을 낳았고 고심 끝에 또 가족을 데리고 탈북을 결심하게 된다. 이번엔 한국으로의 탈출을 위해서다.
중국으로 탈출한 상복이는 탈북자를 제3국으로 탈출시키는 전문 브로커 손에 넘겨져 흑룡강성 치치얼로 가게 된다. 전국 각 지역에서 이들과 연결된 탈북자들도 속속 그 곳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물론 탈출에 필요한 계약금과 성공 후 잔금을 지불하는 조건이다. 예전에는 한 사람당 일천만원 가까이 되었지만 지금은 탈출 수수료도 몇 백만원 정도로 내렸다고 한다. 상복이도 아내와 딸을 데리고 그 대열에 합류했다. 과연 이번 탈출계획이 성공 할 수 있을까 비장한 마음의 결심을 한다.
탈출 동기는 자유를 찾아서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한 상복이의 마지막 수단이었다.
굶는다는 건 곧 죽음과 직결되기 때문에 그래서 굶어본 자만이 빵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알게 된다.
북한에서 생활할 때 인육(人肉)을 빼고는 안 먹어 본 것이 없다며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어간다. 식도락가라서 이것저것 먹어본 게 아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다. 이 배고픔을 떨쳐내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한 탈출을 계획하게 되었다.
흑룡강성의 치치얼을 떠나 장장 24시간 동안 소먹이 풀을 실은 화물트럭의 풀 더미 속에 숨어 죽음의 공포와 싸운다.
안내자는 몽고국경에서 1키로 쯤 떨어진 중국자치구 네이멍구 허허벌판 길가에 일행을 내려놓았다. 하늘이 도왔던지 두 살배기 어린 딸은 풀 더미 속에 갇혀서 만 하루를 가는 동안에 울음 한번 없었다고 말한다. 만약 검문소에 멈춰 검문할 때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는 곧 죽음의 전주곡이 된다. 혹시 죽지 않았나 하고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품에 안은 자식의 입에 손을 대보는 게 전부였다며 그 당시를 회상하는지 고통스러운 얼굴 모습을 짓는다.
네이멍구 허허벌판은 4월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몹시 추웠고, 벌판 위에는 아직도 잔설이 희끗희끗 덮여 있었다.
한 밤중 허허벌판 눈밭에 짐짝 부리듯 풀 더미 속에서 일행을 끄집어내려 보이지도 않는 깜깜한 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여기서 1킬로미터만 더 가면 몽고 국경이라고 알려주고는 탈출 전문 브로커는 트럭에 올라 줄행랑친다.
1킬로미터만 더 가면 일행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벌판에 눈이 쌓여 있기 때문에 칠흑절벽은 아니었다. 일행은 손으로 가리킨 쪽을 향해 더듬더듬 걷기 시작하지만 국경선은 보이지 않았다. 눈밭에서 방향을 잃고 세 시간여를 헤맸다. 국경을 찾지 못한 일행은 점점 두려운 마음이 전신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왕좌왕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일행 앞에 총을 든 군인 두 명이 나타나 정지하라고 명령한다. 일행은 놀라 멈칫멈칫하며 어느 나라 국경 경비병일까 두려운 마음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경비병은 일행과 말이 통하지 않자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의 총을 발사하며 본부에 연락을 취하는 것 같았다.
일행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채 10분도 안 되어 먼 눈밭 어둠 속에서 검은 물체가 수도 없이 다가왔고 그 모습에 놀란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 산지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총성이 들렸고 살려달라는 애절한 울부짖음과 처절한 비명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눈 덮인 캄캄한 들녘에 메아리가 져 갔다. 일행 중 6명은 몽고로 탈출에 성공했으나 나머지는 중국 국경경비병에게 모조리 체포되었다. 체포되는 순간 ‘아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이번뿐만이 아닌 탈북 전과자다. 또 자신 뿐 아니라 처자식은 어떻게 될까.’ 너무나 믿었던 자신의 행동에 후회를 해 보지만 현실은 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강을 넘고 말았다.
중국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압송되는 순간 북한 보위부에서 받을 고문과 또 정치범 수용소 생활의 환상이 전신을 짓누른다. ‘어린 자식을 데리고 내가 너무 무모한 짓을 했구나.’ 하고 후회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체포된 탈북자들은 말을 잃은 채 사색이 되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기쁨도 잠시, 몽고로 탈출에 실패한 탈북자들은 만주리 감옥에 투옥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있은 며칠 뒤 탈북자들이 네이멍구에서 몽고로 탈출하려다 탈북자 한명이 중국 국경경비병의 총탄에 사살되었고 6명은 몽고로 탈출에 성공했으나 17명은 중국국경수비대에 체포되었다는 보도가 전 세계 언론에 긴급 뉴스로 발표되었다. 바로 이 보도가 17명의 생명을 살려 내게 되었다.
그 후 이 사건이 국제사회에 많은 물의를 빚자 중국당국에서는 서둘러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네이멍구에서 체포한 탈북자 전원을 하얼빈 비행장에서 우리 정부에 인계했다.
한명의 희생이 나머지 탈북자 23명에게 광명의 빛을 안겨준 순교자적 역할을 한 셈이다.
오늘 이 순간에도 굶주림에 지친 북한 동포들의 죽음의 지옥 탈출 행렬은 계속해 이어질 것이며, 지옥 탈출자의 목숨을 담보로 한 돈벌이나 인권운동을 빙자한 생색내기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번 탈출 사건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 확률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탈북자마다 배후에 연관된 사람들이 직간접으로 참여를 했기 때문이다.
네이멍구에서 몽고로의 실패한 집단탈출사건은 곧바로 암암리에 전파를 통해 흘러나갔고, 이 사건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던 전문가 한 사람이 급히 하얼빈으로 날아가 사건내용을 자세히 파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수집한 사건 내용을 언론사에 넘겼고 급기야는 그 내용이 전 세계적인 뉴스거리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위 두 내용은 금희를 처음 만나게 된 동기와 또 금희로 하여금 탈북을 하게 된 친 남동생의 실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