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제가 한국 자유시인 협회의 회원 자격으로 7월에 이어 재차 방문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나와 계신 모 선생으로부터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 전집> 출판에 대한 중요성과 출판에 드는 비용의 어려움을 자세히 전해 듣고 저는 감동도 하고 또한 그 중요성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중요 대사는 마땅히 그것이 역사의 뒤편으로 자취도 없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이 시대 지성인들의 참여로 수집, 발굴, 정리, 출판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깊이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것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그 후 저는 몹시 고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약속한 이쪽의 몇몇 행사는 계속 해마다 거행되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용단을 내렸습니다. 최악의 경우 저 하나만의 희생으로라도 2백만 동포들의 숙원사업에 보탬을 주겠다는 책임감과 자신감을 나름대로 가진 것입니다.
그 뒤 고국에 돌아가 저는 우선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동포들의 참모습을 소개하였으며 아울러 우리들의 자그마한 관심으로 여러분들의 선조들이 쌓아놓은 문학 업적을 집대성하여 후세의 자손들에게 남겨주는 일에 함께 참여하자는 글을 써서 잡지에 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거래하는 회사들에도 제가 추진하고 있는 이 후원 사업에 협조 공문을 발송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둘 뜻있는 분들과 뜻있는 회사의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금한 후원금으로 1만5천불 한화로 대략 2천2백만원을 협조할 수 있게 되리라 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여러분들 앞에 길이 있고 또한 제 앞에 길이 있으리라 봅니다. 손잡고 한 길에서 분투노력해 나갑시다.……’
이 인사말은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 전집> 발굴, 정리, 출판에 관한 신문 방송 홍보회에서의 인사말이었다.
이 인사말을 하는 도중에 나는 두세 번 정도 목이 메어 인사말을 멈추게 되었다. 그 까닭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왜 이 같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을까? 그건 현실과 매우 동떨어진 인사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기는 나라 경제도 어려워 IMF 체제로 들어가 있을 때다. 그렇게 어려운 시기에 조선족 사회에서 계획하고 출판하는 관심 밖의 문학 전집을 발간하는 데 드는 비용을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놓을 사람이며 회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후원해 주기로 마음먹은 터라, 그 곳 조선족 사회에 더 밝은 희망의 빛을 주기 위해 이 같은 거짓 인사말을 하게 되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의의 거짓말이었기에 조금도 양심의 가책은 받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한 첫 문학 사료집으로 <심연수 문학편>이 탄생하게 되었다. 심연수 문학편은 그 당시 중국과 한국에서 대단히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문학 작품이었으며 불우한 가정 형편을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애송되는 시인 <서시>의 작가 윤동주와 살아온 과정이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심연수 선생도 용정에서 동흥중학교를 졸업했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문예창작과를 다녔고, 졸업 후 용정으로 돌아와 신안진에서 김좌진 장군이 설립한 초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으며 8.15 해방 며칠 전 왕청현 춘양진에서 일본군의 하수인에게 붙잡혀 억울하게 28세에 작고한 강릉 출신 시인이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8․15 해방 전에 작고한 심연수라는 분의 작품을 발굴하였다며 급히 연변에 와 주기를 부탁하는 전화였다. 나는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연변행 비행기를 탔다. 연변에 도착해 심연수라는 미지의 작가가 쓴 복사본 시작품 몇편을 보게 되었다. 출판을 해 주겠다고 복사본 작품을 보관하고 계시던 분과 함께 심연수 선생의 동생되시는 심호수라는 분의 집을 찾아갔다.
용정시내를 지나 논두렁 같은 좁은 농로를 지나 길안툰에 사시는 심호수 댁을 찾아가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심연수 선생의 작품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을 해 드릴테니 다른 작품이 또 있으면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출판에 들어가는 비용이 한국인의 협조로 이루어 진다는 말을 듣고는 심호수씨가 완강히 거절을 했다.
우리 일행은 또 다음 날 심호수 댁을 찾아가 일체 한국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작품을 보여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어렵사리 허락한 심호수씨가 작품을 가지러 간다며 볏짚이 수북히 쌓여 있는 헛간으로 갔다. 이 장면을 <비디오 저널리스트>인 조천현 선생께서 생생하게 녹화해 후일 모방송을 통해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어렵게 발굴된 작품이 또 한번 수난을 겪게 된다. 연변에서 출간될 때 시의 많은 부분이 엉터리로 수정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그 후 한국에서 원본 그대로를 또 재출간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연변보다는 오히려 우리 문단에서 더 소중한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고 그 뒤 많은 단체에서 심연수 선생 문학 심포지엄을 개최하게 되었다.
처음엔 몇 편의 시 복사본을 언론사에 제시하고 자세한 발굴 과정을 설명했으나 냉혹하게 푸대접을 받는 시련도 겪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작품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언론계, 문학계에서 금과옥조 같은 귀한 작품이라며 너도나도 선생을 등에 업고 자신을 홍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