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족도 우리 한민족의 핏줄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나 다를 바 없지요. 조선족의 할아버지들은 독립투쟁을 위해 만주로 건너갔으니 조선족은 엄연히 독립군의 후손들이지요. 때문에 조선족은 대한민국을 향해 이 땅에 와서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외쳐야 합니다. 미주교포들과 똑 같은 대우를 달라고 말입니다.”
정 원장은 누구보다 뱃장이 실하고 대가 센 지성인이다. 그는 조선족들에게 “절대 비굴하거나 비겁하게 살지 말고 동정심 같은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하”며 “재한조선족사회가 뭉쳐서 이 땅에서 죽기 살기로 튼튼한 삶의 기반을 닦아나가야 한다”고 했다.
정 원장의 가문을 보면 박사생만 해도 13명이나 되니 주위 사람들은 모두가 부러워하며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만 하다”고 혀를 찬다. 누가 박사를 만들어준 게 아니고, 그들 가문의 형제자매와 그 슬하 자식들이 스스로 역경을 딛고 이뤄낸 장한 인생이었다.
정 원장은 1934년 4월에 중국 무순시 만달옥에서 태어나 무순시 ‘조일초등학교’에 다니다가 5학년 때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나 ‘8‧15’해방을 맞았다.
“조일국민학교를 다니며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선생한테 얻어맞던 일입니다. 한국말을 하다가 일본선생한테 발견되기만 하면 꿇어앉아 의자를 머리위에 올려드는 벌을 받아야 했었지요. 걸상이 내려오면 선생은 가차 없이 뺨을 치고 발로 차면서 못살게 굴었어요, 그런데 집에 와서 내가 일본말을 하면 이번엔 삼촌이 달려들어 때렸어요. ‘쪽발이 말’을 한다고…삼촌은 애국 독립투사였으니까요.”
해방 후 그는 심양시 근교에 있는, 현제는 중국에서 조선족 부유촌으로 유명해진 만융촌으로 이사를 했다. 거기서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부근 신흥중학교에서 중학 1학년까지 다니었다. 국내전쟁이 터지자 그들 가문은 미국선교부에서 주선해준 33인승 쌍날개비행기를 타고 천진으로 피난했다. 기와집이며 가장집물은 팔리지 않아 그냥 버리고 갔다. 그들은 천진에서 6개월 간 어렵게 지내다가 한국 정부가 보내준 배를 타고 입국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감회가 깊다.
“한국에 오니 친척도 친구도 없구, 알거지나 다름없었어요. 먹을 것도 없고, 천막을 치고 살다가 가지고 있던 패물을 처리해서 종로구 숭인동에 작은 집 한 칸 마련했지요. 그러나 1950년도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우리 집은 다시 불타고, 우린 또다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어요, 전쟁이 끝나자 다행스럽게도 해외귀환동포는 어느 학교에서나 받아주었어요. 중학교에 입학하자 우리는 서울역 남대문 부근으로 이사를 했어요. 당시 서울시내는 먹는 물도 귀하고, 기차도 시간표 없이 다니고, 참 힘든 세월이었지.…”
그는 어린나이에도 돈을 벌 목적으로 주전자에 수돗물을 담아들고 나가 한잔에 십 원씩 받고 팔았으며 서울신문사에 가서 신문을 받아 책가방을 든 채로 신문장사를 했다. 저녁까지 여관 같은 데로 다니면서 “신문사시오”를 외쳤다. 그러다 보니 밤에 잠도 안자고 새벽 2시까지 숙제를 해야 했다. 덕분에 중학교 1~2학년에는 전교 1등을 할 수 있었다. ‘6.25’때는 부산에서 반년 살다가 제주로 피난하다 보니 고등학교 1학년밖에 못 다녀졌지만 제주도 오현고등학교 분교에 2-3학년을 다녀 수석으로 졸업을 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부에 입학했었다.
그는 5남매 중에 맏이다. 할아버지, 아버지는 중국에서 농사만 짓다가 오시다보니 서울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고혈압 병마저 얻게 됐다. 그는 서울대 4년 동안 가정교사로 뛰면서 점심 한 번 제대로 먹은 적이 없다고 한다. 학생네 집에서 점심을 싸주면 강의가 끝나기 바쁘게 집에 뛰어가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공양했다. 물론 그들 형제들도 공부하면서 모두 가정교사로 뛰었다고 한다.
결혼 할 때도 너무 궁색했다. 돈이 없다보니 색시한테 가짜 다이야몬드반지를 끼워주고 식을 올렸고, 장인이 옛날 돈 1만원을 주어 방 한 칸 전세를 냈었는데, 부엌은 밖에 있는 가정집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1972년 서울대를 졸업하자 그는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로 취직을 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미국 시카코 대학 사회심리학 석사과정을 밟았고 1982년에는 동경대학 보건사회학(사회학이론과 방법론으로 인간의 보건에 적용하는 과학) 박사과정 맞혔다.
1996년에 그는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뿐만 아니라 유엔국제관계 세계위생기구본부 고문, 유엔경제사회 이사회 고문, 유엔가족계 기금고문 등 국제사회 관련 요직을 맡아 해외로 자주 출장 나가서 유엔의 사무도 보고 대학 강의도 했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외국사람들은 ‘KK’(그의 성과 마지막 이름 첫 영문 자모)라고 친절하게 불렀다.
정 원장은 재한조선족동포들에게 이렇게 신신당부했다.
“아직도 보면 한국정부가 우리 조선족을 차별하고 있는데 우리가 똘똘 뭉쳐 이 나라의 떳떳한 국민의 자격을 쟁취해야 합니다. 동북아신문과 같은 언론단체들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정부가 우리의 옳은 의견을 수렴 받아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하지요. 그리고 한 가지, 우리 조선족동포들은 조선족의 권익을 위해 희생봉사하시는 서경석 목사님께 항상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조선족은 총명하고 그 어떤 역경 하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일어날 수 있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자기만 노력한다면 꼭 잘살 수가 있습니다.”
이동렬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