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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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 여행
  • 려호길
  • 승인 2008.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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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호길 수필>

중국에서 명색이 조문계(국문과)를 졸업한 나에게도 한국말은 첩첩 산이었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한국말들을 들어보면 우리보다 분명하게 쓰이고 광범위하게 쓰이는 반면 영어를 대량 사용하고 산업현장을 비롯한 노동현장에서는 공 도구를 비롯한 일부 상용어들을 일어로 하고 있어 알듯 말듯 하다가도 오리무중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한국말에 자신이 없는데다가 한국인들이 야간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가난한 나라에서 온 동포라고 얕잡아 보고 함부로 대하는 바람에 인격이 무시당하고 심적으로 상처를 받다보니 자연 한국인들을 멀리하고 대화를 기피하고 꼭 해야 할 말도 생략하고 간결하게 해야 했다.

큰 맘 먹고 한 말들은 한국인들의 소일거리로 충분했다. 이를테면 ‘범띠’하면 '호랑이띠', ‘반시간’하면 ‘30분’, ‘낮’하면 ‘주간’, ‘밤’하면 ‘야간’, ‘고뿌’하면 ‘컵’, 심지어 어떤 얍삽한 한국인들은 ‘호각’하면 ‘호루라기’, ‘호루라기’하면 ‘호각’이라고 말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어 슈퍼나 가게, 직장에서 한국인들과 꼭 대화가 필요할 때면 사전(事前)에 글짓기를 하듯 적절한 어구로 다듬어야 했고 사전(辭典)까지 뒤져가며 준비를 해야 했다. 그리고 융통할만한 한국인이나 한국에 온지 오래된 중국동포들에게 전화를 걸어 문의하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그러나 간신이 준비한 말도 일단 상대가 엉뚱한 데로 화제를 끌어가면 다시 입을 굳게 닫아 매는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건 고국이 아니라 양키나라나 쪽발이 땅에 온 거야.”

욕이 저절로 나갔다. 결국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나는 한국어를 공락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TV와 라디오를 열심히 보고 듣는 것이고 한국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대여하여다가 열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심성이 착한 한국인을 지정해 놓고는 아양을 떨어가며 문의하고 가르침을 받곤 하였다.

언어의 장벽은 그 사회의 문화와 풍속 역사지식의 결핍과도 관계된다. 나는 휴일이면 한국의 역사문화명소들을 찾아 다녔다. 처음에는 1일 관광이 되던 것이 수도권을 벗어나면서부터는 1박2일 2박3일로 차츰 길어져 경비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그래서 여관 대신 여인숙을 찾고 여인숙 대신 찜질방을 찾기에 이르렀다. 나는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관광을 통하여 한국을 요해할 수 있었다. 그 참에 한국사와 한국역사서들을 탐독하면서 민족의 정취를 폐부로 느끼게 되였다. 그리고 항상 아낙네들이 가계부를 적듯이 수첩에 생면부지의 단어들을 메모해서는 인터넷검색창에 띄워 뜻과 사용사례들을 보는 습관을 길렀다.

한국에 온지 3개월이 되면서 나는 더 이상 언어의 장벽으로 연연하지 않았다. 나는 한국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습관을 길렀다. 뜻밖으로 한국인들은 그런 나를 잘 대해주었다. 그리고 낯 선 사람들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중국동폽니다.” “연변에서 왔어요.” “물 건너서 왔어요.” 등 말로 신분을 밝히면서 틀리더라도 상대가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1년이 되자 나는 제법 한국인 흉내를 낼 수 있었다. 물론 본의 아니게 흉내를 내다가 ‘빨갱이’로 색출되어 머쓱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시절은 조선어와 평생 씨름한 중국동포가 고국에서 언어장애로 서러움을 만끽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 요상한 언어를 터득하여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눈높이를 맞추어보려는 나의 의지는 처절하게 굳어갔다. 그것이 내가 한국에서 살아남는 길이고 경제적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언어의 장벽은 그 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 등 분야의 지식의 결핍에서도 온다. 나는 열심히 시사프로그램을 보면서 여야의 대립과 공방, 국회와 청와대의 초점에 따라 사회이슈들을 주목하고 관찰했다. 차츰 나는 한국인들의 대화에 스스럼없이 끼어들어 주견을 내 놓는 단계에 들어섰다.

한번은 광주에 갔다가 내가 먼저 한국인들에게 ‘5.18국립묘지’로 가 보자고 제의를 해서 10여명 한국인동료들이 민망하게 따라나서는 해프닝을 빚기도 하였다. 나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스포츠와 시위 선거운동 등에도 슬쩍 끼여 한국인들과 연대도 해보고 그들과 교감도 쌓아 보았다. 하여 한국인동료들은 국내사정에 밝은 나를 더 이상 차별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주 그들의 견해를 시정해 주어 부담스러운 존재로 되였다. 차츰 그들은 장벽을 깨고 나와 친구로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요즘 나는 한국말이 전혀 부담되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마치 고향에서 맞는 일상이다. 동네에 가면 동네사람들이 반기고 직장에 가면 경비원아저씨로부터 동료들, 사장에 이르기까지 나를 외면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나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를 즐기고 나의 견해를 듣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때론 한국인 친구들과 사사로이 술잔을 나누면서 국정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 같다.”

요즘 한국인들은 나를 한국인으로 곧 잘 착각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오히려 성급히 중국동포라고 신상을 밝히는 나다. 나는 해외동포를 배려하지 않고 오히려 말장난을 치는 한국인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에 출장 갈 때도 동료한국인들은 2인실 3인실에 함께 투숙하자고 제의해 오지만 나는 핑계를 대고 고향사람들을 찾아 다인실로 가고 만다. 고향사람들은 처음엔 한국인인줄 알았다며 반색한다. 요즘 나는 고향사람들한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해 준다. 그리고 그들의 ‘한국말교사’가 되어 시도 때도 없는 질문에 답변을 주느라고 바쁘고 바쁘다. 나는 기회만 있으면 그들한테 한국생활을 편하게 하려면 한국말을 빨리 배워 한국인들과 교감을 쌓아야 하는 중요성을 구구히 설명하곤 한다.

그런데 최근에 난감한 일 하나 생겼다. 한국말에 들어가서는 내 노라는 나지만 정작 한국인들이 세금과 보험, 국민연금과 같은 화제를 꺼내면 벌벌 기기 때문이다. 이건 누구한테 전화 한 통화해서 알아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하다. 마침 나도 그 방면의 공부를 하고 싶던 차라 서점이나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 공부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차일피일 미루기만 한다. 어제도 휴일이었지만 하루 종일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어 밥도 결국 두끼나 배달시켜 먹었다. 나도 이제 마음먹고 게을러지려나 보다.

2008년8월10일 인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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