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에 거품 이는 헤어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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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에 거품 이는 헤어크림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8.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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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수기>

1998년 7월 18일 심양의 날씨는 매우 험악했다.

김포 비행장에서 중국의 북방항공 비행기를 타고 심양에 내려 다시 연변 행 중국 국내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심양 공항 내에서 대기하는 동안에도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뿐 아니라 연변을 가기 위한 승객들로 심양 공항은 만원을 이루었다. 그 당시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가기 위해서는 심양 아니면 장춘 행 비행기에 탑승하고 거기에서 다시 중국 국내 비행기를 타든지 아니면 기차를 타고 가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심양에서 기차를 타고 연길에 가자면 15시간이나 걸리고, 조금 가까운 장춘에서도 연길까지는 11시간이나 걸리는 지루한 여행이 되기 때문에 한국인 관광객으로선 웬만큼 다부진 결심을 굳히지 않는다면 고행의 행군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김포 비행장에서 심양 가는 비행기는 북방항공 이외에 대한항공도 있지만, 당일로 연길로 가기 위해서는 북방항공을 타야만 한다. 대한항공으로 심양을 거쳐 연길에 당일로 가는 건 중국 국내선과 연계가 되지 않아 불가능하다. 그 까닭이야 북방항공에 더 많은 손님을 유치하기 위한 정책적인 발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 일행이 타야 할 국내선은 대련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로, 도착 예정 시간을 훨씬 넘기고도 일기불순으로 지연된다는 안내방송 뿐이다. 비행장 내 안내 표시판에는 계속 해 연착이란 안내문만 수시로 바뀌어 간다.

그런데 비행기의 지연보다 더 답답한 건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 것인지 아니면 아예 못 뜰 것인지를 알려주는 안내방송이 확실치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공항 내 손님 대부분이 우리나라 승객인데도 우리말 방송은 아예 한마디도 없는 불친절한 서비스였다. 확실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리저리 귀동냥을 해 보아도 과연 어떤 정보가 진실성이 있는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출발을 했다는 둥 또는 아예 오늘은 포기를 하라는 둥 정체를 알 수 없는 말이 일행의 맘을 어지럽게 흔들어 놓는다.

눈을 비비고 쳐다봐도 미국인이나 유럽인은 하나도 없는데 우리말 방송은 한마디도 없이 왜 영어 안내 방송이 필요한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서비스 개념의 본질을 모르던지, 아니면 아직도 조선과 청나라 양국 관계로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인 관광객을 무시하는 태도인데도 국가 차원에서 잘못된 중국의 태도에 시정을 요구한 공직자가 아마 한 명도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우리말을 하는 승객만 있으면 주책없게 달라붙어 정확한 정보를 얻어 보려 애썼지만 그 모두가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탑승 수속을 마친 지 벌써 여섯 시간이나 흘러갔다. 기다림에 지친 승객들이 여기저기서 고성을 지르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공항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고, 공항의 책임자도 도망치다시피 다 사라졌다. 책임질 능력도 없는 공항 여직원 몇 명이 분주히 움직이며 승객을 설득시키려 하지만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승객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에는 때늦은 감이 있었다.

우리 일행은 그 날 비행기를 못 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만약 다음 날도 비행기가 출발을 못 한다면 20일 오전 숭선진 고성에서의 행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게 큰 문제다.

우려했던 일은 거짓말처럼 착착 현실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연변 행 비행기가 결항되었다며, 항공사에서 제공한 버스로 탑승객을 시내에 있는 호텔로 옮겨 갔다. 오후 2시 경에 도착해 심양 공항에서 장장 8시간을 체류한 것이다. 그러고도 항의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주는 밥이나 얻어먹고 잤다.

다음날의 날씨도 문제였으나, 더 큰 문제는 항공사의 성의였다. 전날 승객만 해도 비행기가 만석인데, 또 오늘 김포 비행장에서 연길 가는 승객과 겹쳐 탑승객 전원을 수송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만 명 중에 한 명도 없다. 항공사 담당자는 이미 항공권은 팔았으니까 뿔뿔이 흩어져 줬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다. 점심이 지나서도 비행장으로 호텔 승객을 수송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우리 일행뿐만 아니라 많은 탑승객들이 아예 기차 편으로 연길을 향해 출발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비행기 표 환불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저녁 기차 편으로 연길을 향해 가며, 솟구치는 울분을 바보인 양 15시간 동안 2등 침대칸에서 잠재울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김문경, 김경우, 김형술 그리고 필자까지 4명이다. 각자 회비는 3백만원이니까 총 1천2백만원의 거금을 갹출했다. 이중 사백 만원은 여행 경비로 쓰고 나머지 8백만원 중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아리랑>잡지 출판 기금으로 5백만원, 그리고 흑룡강 신문사에서 시상하는 <수필실화 문학상>기금으로 3백만원을 지원할 목적으로 갹출한 것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연변 문학을 돕자는 의견의 일치로, 궁핍한 가정 살림에도 불구하고 뜻있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 당시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결심을 한 친구들에게 작으나마 내 성의를 표하기 위해 간단한 세면도구가 든 조그만 여행용 비닐 백을 하나씩 나누어줬다. 그런데 숭선진에서 이게 문제가 되어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나게 된다.

행사 날 아침 7시에 연길 역에 도착했다. 늘 많은 조선족에게 존경받고 있으며 시인으로서 조선족 자치주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조용남 선생께서 역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숙소인 호텔에 들러 대충 소지품을 정리하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숭선진 행사장을 향해 달렸다. 세 시간 여를 달려 두만강 상류 숭선진 행사장에 도착했으나 이미 행사는 끝나고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간 후였다. 뒤늦게 합류한 우리 일행은 인사를 나누고 심양에서 있었던 악몽 같던 이틀간의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다.

다음 날, 회의에 참석했던 일행과 함께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두만강 발원지를 향해 아침 일찍 출발을 했다. 두만강 발원지로 가는 길은 백두산 동쪽 아래로, 인가나 인적도 없는 원시림 숲 속의 비포장 군사도로다. 한참을 흙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산 속을 빙글빙글 돌며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운전기사가 보닛을 열고 이것저것 만져 보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일행은 차에서 내려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하늘은 엷은 구름층으로 덮여 흐렸고, 도로 양 옆에 하늘을 찌를 듯 우거진 원시림 사이에서 밀려 나오는 산들산들한 바람으로, 찌들었던 마음 뿐 아니라 발걸음마저 가벼웠다.

생애 처음으로 걸어보는 원시림의 샛길이다. 더구나 속세를 벗어난 이국의 산 속에서 속삭이는 이름 모를 이성과의 낭만이 꽃으로 피어나 더욱 더 황홀하던 순간이었다. 원시적 정적을 흔들어 깨우는 아름다운 산새들의 지저귐, 이런 상쾌하고 즐거운 마음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랴. 이게 바로 천국이다.

한 시간 여를 걸었을까, 수리를 끝낸 버스가 와 다시 일행은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북한과 중국은 두만강과 압록강의 강 중심을 국경선으로 정했기 때문에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 서편의 국경 경계비 이외에 다른 지역엔 경계비가 없다. 간혹 강물 줄기가 변형된 한두 곳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두만강 발원지 조·중 국경 경계비는 백두산 천지에서 시작하여 21번째로 동쪽 끄트머리에 세워진 국경 경계비다.

두만강 발원지를 구경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북한 땅으로의 불법 침입자가 된다. 북한 땅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덜컥 가슴이 내려앉으며 착잡한 마음이 무섭도록 전신을 짓누른다. 무엇 때문일까? 깊은 산중에 꽂힌 시멘트 국경 경계비가 무엇이기에, 그 경계비로 하여 이제껏 살아오면서 느끼지 못했던 야릇한 감정이 왜 이토록 강렬하게 달아오르는 것일까? 이 모든 현상이 그저 신비로울 뿐이다.

경계비는 상징적인 인간의 조형물이다. 거기엔 상징적인 것 이외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경계비를 바라보며 많은 상상 속으로 빠져드는 것도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불행이다. 경계선을 넘나드는 짐승이나 날짐승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하찮은 자연물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푯말로, 국가 간에 다툼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두만강 발원지에서 백두산 정상 쪽에 있는 만족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천녀욕궁지(天女浴躬池)를 관광하고 점심은 두만강 가에서 먹기로 했다. 식사를 하기로 한 두만강 건너편에는 김일성 장군이 앉아 낚시를 했다는 바위 주위를 북한 군인이 경비를 서고 있다. 원래는 북한과 중국을 연결하는 작은 다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끊어진 형태로 남아 있다.

낚시터 바위를 바라보며 점심을 먹기로 자리를 잡았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뜨거운 햇살 걱정은 없다. 두만강 여울물 소리가 한층 더 시원한 마음에 청량감을 더해 준다. 그 때 일행 중 한 청년이, 저쪽 군인은 제때에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어 배가 고플 터인데 먹을 것을 좀 넘겨주자고 제의한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닭죽인데, 강 건너 북한 병사에게 닭죽을 넘겨줄 수는 없어 비닐봉지에 음료수와 맥주, 담배 등을 담아 던져 주었다. 북한 병사는 던져준 비닐봉지를 주워 들고 끊어진 다리 아래 간이 막사로 다급하게 사라졌다.

한참 닭죽 점심을 먹고 있는데 시커먼 하늘에서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숭선진은 백두산 바로 아래 지형인지라 날씨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고산지대 날씨다. 순식간에 퍼붓기 시작하는 장대비를 피할 방법은 없다. 버스 속으로 달아나기도 체면이 말이 아니고 하여 우리 일행 넷은 숲 속 나무 아래로 들어가 닭죽을 계속 먹었다.

먹성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닌 우리 일행은 죽 그릇에 떨어진 빗물로 인해 순식간에 물에 죽을 말은 꼴이 된 닭죽을 더 이상 먹지 못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김 사장 머리에서 거품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선 채로 비를 맞으며 식사를 하는 동안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으로 훔쳐 내리려 쓰다듬은 게 원인이 되었다. 옆에 있던 한 친구가 김 사장에게 물었다.

“김 사장, 머리에 그게 뭐야?”

“왜, 내 머리가 어때서?”

김 사장이 대답하며 머리를 쓰다듬으니 쏟아져 내리는 빗물로 인해 더욱 거품이 탐스럽게 부풀어 오른다. 그 모습이야말로 정말 가관이었다.

“아니, 김 사장 머리에 뭘 발랐기에 거품이 부글부글 일는 거야?”

일행은 들고 있던 닭죽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넋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김 사장 머리를 쳐다봤다.

“오늘 아침에 이 형이 준 여행용 세면가방에 들어있는 헤어크림을 발랐는데…….”

아차! 내가 여행용 세면가방을 주면서 용도를 일일이 알려주지 못한 게 큰 잘못이었구나. 나이가 들어 일찍이 노안 현상으로 잔글씨가 안 보여 김 사장이 실수를 한 거다.

아예 나는 이참에 한술 더 떠 김 사장을 놀려 줄 작정으로 그 샴푸에 대한 엉터리 설명을 해 주기로 작정했다.

“그 제품은 최신형 샴푸 겸용 헤어크림인데, 원래의 제품명은 「헤어 샴푸 크림」이라고 하지. 그런데 꼭 주의할 점이 있어. 비 오는 날은 절대로 피해 사용해야 하는 약점이 있거든. 사용상의 주의사항도 읽어보지 않고 사용했나 봐.”

내 설명이 거짓이라고 대충 눈치 챈 일행은 배를 잡고 박장대소한다. 강 건너 인민군 경비병만 빼고는 바로 옆의 조선족 일행도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웃음이 전염병처럼 번져나가 키득키득 웃기 시작한다.

머리에 바른 머릿기름이 헤어크림이 아니라 샴푸임을 눈치 챈 김 사장은 곧바로 두만강 가로 달려가 강물에 머리를 박고 흔들어 대니 강물에 거품 떠가는 모습이 낙동강 하구의 철세 떼 모습보다 더한 장관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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