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아해했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어째서? 나는 자식 공부를 위해서 외국행을 택했다. 그 때 나는 두 나라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불란서 파리냐 아니면 한국이냐? 여러 날 고민 끝에 한 피 줄이고 한민족이고 언어도 같은 민족-한국을 선택했다. 우리 조선족 대부분 성씨 원적은 한국에 있고 나의 성씨 원적도 인동이다. 조상이 있는 곳도 가보고 싶고 돈도 벌고 자식들도 원만히 공부를 할 수 있고 자본주의 사회란 어떤 것인지? 말이나 책에서 보던 서울이란 어떤 곳이고 한강은 어느 만큼 클까? 정말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때기라 속으로 생각했다.
그 후 일하면서 거의 벙어리 행세를 했다. 딱 필요한 말만 생각을 많이 한 후에 간단히 말했다. 그리고 되지도 않는 ‘---요’를 붙이기 어찌 그리 힘들던지 길을 걸으면서도 항상 조심했고 경찰복이나 군복이 보이면 마음을 조였고 피할 생각부터 했다 그 후 처음 단속이라는 것을 맞이하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 숙소에서 단속 기간이 끝 날 때까지 두문불출이냐 아니면? 그 때는 문밖에 나서는 것이 어찌나 그리 두렵던지! 두려움을 안고
(이자 돈 때문에)계속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어디서 몇 명 붙잡혀 가고 어디서 얼마다식이었다. 재수 없는 사람이 붙잡혔다. 그 사람들의 운명이니 방법이 없이 한탄 뿐이였다. 욕설과 울분을 동반하면 서 누구하나 붙잡힌 사람을 빼나와야 된다는 것을 생각도 못하고 상상도 못했다 붙잡히면 응당 강제 추방이라 생각했다. 저 사람 빛도 못 갚고 추방되면 집에 가 어찌할까 값싼 동정이나 보낼 뿐이었다. 그 후 단속에서도 그 되풀이였다. 동포들은 그저 당하기만 했고 말 할 곳도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더구나 임금체불, 사기, 인권유린, 학대를 당하면서도 강제 추방이 두려워 자식 아내 가정을 위해 묵묵히 속에 담고 있어야 했다.
눈물도 속으로 삼키고 부르르 떨리는 주먹도 호주머니 속에 감추어야 했다.
이 때 동포들의 눈길이 서울 조선족 교회에 쏠리게 됐다. 담임 목사 서경석 목사가 이끄는 조선족교회가 동포들의 이러한 사정을 눈뜨고 앉아서 볼 수만 없기에 동포들의 질고를 해결하기 위해 심신을 다 받혀 발 벗고 나선 것이다. 하여 나의 발걸음도 서울 조선족 교회로 돌려졌다 처음 교회에 들어서니 마치도 고향집에 온 것만 같았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놓고 웃어보았다 중국말도 해보았다. 그야 말로 듣던 것처럼 따뜻한 고향집이었다. 교회에 들어서니 체불임금 상담실 인권센터 실 구인구직실… 등이 눈에 띄우니 신기하여 칸칸이 기웃기웃하며 들여다보니 임금 상담실에서는 노동부분과 변호사분 등 몇 분이 임금체불 상담을 하고 있었는데 한 40대 되여 보이는 분이 “정말감사 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서경석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하며 연신 감사를 연발했다. 알고 보니 그 분의 임금을 받아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야!!!”하고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나는 또 인권 센터 실에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서도 목사님 한 분이 상담하고 있었다. 한 30대로 되어 보이는 여성 분이 눈물을 흘리면서 국제 결혼해 온 슬픈 사연을 하소연하면서 “목사님 제발 저를 살려 주십시오. 교회에서 돌봐 주지 않으면 저는 죽음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하면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는 자애로움으로 그 여성을 달래면서 “꼭 최선을 다해 해결해보겠습니다”면서 아주 따뜻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 후 그 여성이 몇 년을 하루같이 교회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하고있다. 나는 또 구인구직 실에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서도 선생님 두 분이 취직하려고 찾아 온 동포들에게 일일이 일 자리를 소개해주었다 일 자리를 찾아 떠나는 분마다 연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하면서 기뿐 마음으로 일 자리를 행해 떠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서울 조선족교회가 정말 진정으로 동포들의 믿음의 집 보금자리였고 구심점이였다. 그 후부터 동포들의 처지는 확연히 달라졌다. 서경석 목사와 서울조선족교회가 정부 여러 부처와 교섭으로 붙잡힌 많은 동포들이 풀려났고 동포들의 처우도 많이 개선됐다.
서경석 목사님은 동포들에게 더욱 많은 혜택과 체류 시간을 연장해주기 위하여 여러 차례 삭발하고 단식으로 인해 피를 토하면서(단식과 과로로 하여 여러 번 피를 토하고 쓰러져 부득불 병원에 입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도 신체가 많이 망가진 것으로 알고 있다 서경석 목사님 로고가 너무 많습니다)정부에 청원하여 동포들의 체류 기간을 연장해주었고 한국 사회와 시민 단체에 호소하여 정부의 동정과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얻어냈다.
때문에 동포와 외국인들은2002년 자진 신고 때부터 2004년 2월말까지 합법적 신분으로 마음 편하게 일 할 수 있었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진정으로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러 나는 동포애나 인간미가 없다면 역사적으로나 그 어느 다른 나라에도 없었던 일을 할 수 없었다.
대한 민국 정부이기에 동포와 외국인들에게 출국 기한을 여러 차례 연장해주었다. 또 5천 7백여 명의 헌법 소원도 (결과가 좀 달라졌지만 )6개월 후 재 입국을 정부 차원에서 보증한다는 것을 받아 낸 것도 대단히 큰 성적이다.
서경석 목사가 이끄는 서울조선족교회였기에 이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도적인 한국 정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기에 나는 서경석목사님과 서울 조선족교회 여러 목사님들 시민단체와 대한민국 정부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천지맑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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