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 동흥, 은진, 명신, 영신, 광명 등 6개 중학교가 룡정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중학교들은 대부분 종교계에서 설립했거나 심지어 일본인이 경영하는 학교도 있었지만 교원들 대다수는 강렬한 민족의식과 진보적인 시대적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이런 중학교들에는 연변 뿐만 아니라 당시의 남만, 북만, 조선반도, 로씨야 연해주의 학생들까지 와서 공부했다.
6개 중학교를 졸업한 많은 우수한 학생들은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그 중에는 유명인사들도 적지 않게 배출되었다.
이들 졸업생 가운데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무장대오에 참가하여 총칼을 들고 일제와 싸운 저명한 항일투사들도 있었고 교육사업에 정진하여 후에 조선족교육사업의 지도일군으로 성장한 교육가도 있었으며 문학인으로 성장하여 자신의 문학작품으로 일제 암흑기의 어둠을 찢은 문인도 있었다.
‘집 팔아 자식 공부시킨다’는 속담도 있지만 우리 조선민족은 그 어느 민족보다도 후대교육을 중시하는 민족이다.
이주 초기에는 생계유지를 위한 몸부림을 치다보니 후대교육에는 아직 눈길을 돌릴 새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주 초기에는 연변에 학교가 없었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조선의 많은 유지인사들과 교육자들이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해 이주민이 많이 모여사는 연변에 망명하였으며 그들에 의해 이주민사회에는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1906년 리상설 등에 의해 룡정에 설립된 근대식학교인 ‘서전서숙’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물론 그 전에 일부 구식서당들도 있었다. 이런 서당들은 주로 네가지 류형이었다. 훈장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거나 자신의 교육취미에 의해 설립된 서당, 가정형편이 괜찮은 가정들에
서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훈장을 모셔다가 세운 서당, 마을의 몇몇 사람들이 훈장을 모셔다가 세운 서당, 온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자식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서당 등이다. 이런 서당에서는 근대적인 문명을 외면하고 수백년간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형성된 구식교육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흔히 천자문, 동문선습, 통감 등 유교적인 교리와 륜리도덕을 가르쳤고 사서오경을 주요한 교과목으로 하였다. 1905년 이후 조선의 애국문화운동과 반일민족문화계몽의 영향으로 연변에서도 사립학교설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뒤떨어진 봉건교육을 고수하던 구식서당도 근대적인 반일민족사립학교로 개편되기 시작하였으며 단순한 글방으로부터 근대적인 과학지식을 전수하는 동시에 조선어, 조선력사, 조선지리 등을 가르치는 학교로 전변되어 학도들을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키우고 반일사상을 양성하는 교양기관으로, 반일운동의 요람으로 변해갔다. 1906년 룡정에 설립된 ‘서전서숙’은 연변에서 제일 처음으로 세워진 근대식학교였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이며 ‘헤이그밀사’인 리상설에 의해 설립되었다. 1906년 가산을 처분하고 해외로 망명한 리상설은 상해, 청도, 로씨야의 연해주를 거쳐 10월에 룡정에 도착했다. 룡정에서 그는 최병익의 팔간집을 사서 리동녕, 려조현, 전순만, 박정세, 김우용, 황달영 등 동지들과 함께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이 서숙은 숙장 리상설 외에 교원이 4명이였으며 학생은 22명이었다. 학생들은 갑, 을 두개반이였는데 갑반은 고급반이고 을반은 초급반이엇다. 과목으로는 력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공법, 법률 등이였다. 교원들이 모두 열렬한 반일민족운동가들이였기 때문에 이 서숙에서는 근대적인 학교교육을 진행했으며 일제의 노화교육을 반대하고 반일사상으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그러나 근대교육의 요람인 이 서숙은 일제의 간섭으로 하여 설립된지 8개월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이 서숙이 문을 닫은 후 일부 교원들과 재학생들은 훈춘방면으로 이동하여 탑도구에서 서숙을 회복하고 학생들을 계속 모집하였으며 1년간의 단기속성과정으로 3개 학급의 74명을 졸업시키고 서숙의 해산을 선포했다.
서전서숙의 숙장 리상설은 1907년 4월에 조선 고종황제의 친서를 받고 리준, 리위종 등과 함께 특사로 임명되여 화란의 수도 헤그에 파견되었다.
그 후 그는 구라파, 씨베리아,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하며 대한광복군정부를 설립했다. 그러다가 1917년 3월에 로씨야 연해주의 니콜리스크에서 48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다. 서전서숙의 설립은 중국에서의 우리 민족 교육이 전통적인 구식서당교육에서 근대적인 학교교육으로 전변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중국조선족의 근대적인 학교의 첫 시작이 이미 반일적인 성격을 띠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서전서숙이 해산된 후 일부 교원들과 졸업생들은 연변 각지에 흩어져서 민중을 발동하고 일제의 노화교육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구식서당을 개혁하여 근대과학문화와 반일민족사상을 전수하는 사립학교들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1908년 서전서숙의 교원이었던 박정세와 졸업생들인 김학연, 최기학 등은 명동에 가서 김약연을 설복하여 구식서당인 규암재를 개혁하여 근대적학교인 명동서숙을 설립하였다. 이외에도 오상근, 리병희 남성우 등은 연길에서 서쪽으로 10여리 상거해 있는 와룡동(지금의 민흥촌)에 창동학교를 설립하였고 강백규, 강희헌 등은 광개향에 정동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이 사립학교들이 우후죽순마냥 연변 각지에서 설립되였는바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1916년 연변에 설립된 사립학교는 156개나 되였다고 한다. 1920년대에 진입한후에도 연변지역에서는 계속 사립학교들이 설립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룡정에는 대성중학교를 비롯한 6개 중학교가 설립되여 민족교육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성중학교는 1921년 7월 11일 대성유교의 한사람인 강훈에 희아혀 룡정에 설립되었다. 이 중학교는 대성유교파인 석화준과 청림교의 림창세 등 사람들이 지방부호인 남군필의 기부금을 받아들이고 장지량 등 사람들이 조선, 로씨야 연해주 등지의 조선족 4천여명의 기부금을 받아 자금을 마련하고 강훈이 연길도윤공서의 인가를 받아 세우게 된 것이다. 초기의 교주는 강훈이였고 교도주임은 림봉규, 교원으로는 현기형, 한장순, 김소연, 리정렬 등 5명이었다. 학생들은 주로 연변 각지와 로씨야 연해주 그리고 남북만에서 모집하였는데 초기에는 160명이였다. 유교파에서 세운 학교였기 때문에 교수내용에는 봉건적인 유교사상이 짙었다. 2층 강당에는 공자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달 초하루 아침이면 교직원과 학생들이 향을 피워놓고 제사를 올렸다. 옛터는 현재 룡정중학교에 있다. 설립 초기인 1922년에 대성중학교에는 조기 공산주의자들인 리주화, 리림구 등의 지도하에 진보적인 학
생들로 구성된 ‘맑스-레닌주의 과외써클’이 조직되여 맑스주의에 대한 연구활동이 전개되었다. 1924년에는 진보적교원 김성호의 지도하에 맑스주의연구단체인 ‘독서회’가 설립되었다. 진보적인 조직에 가입한 학생들은 방학을 리용하여 농촌에 내려가 야학을 꾸리고 선진적인 사상을 전수했다. 이런 조직적인 활동을 통하여 학생들은 맑스주의에 대한 신앙을 확립하고 반일민족사상을 확고히 하였
다. 이런 과정에서 대성중학교 졸업생 가운데는 김정길, 리환 등 저명한 항일렬사들이 배출되었다. 중국조선족 소설문학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김창걸도 대성중학교 재학 중에 진보적인 조직에 가입했었다. 1930년대 조선족 소설문단에서 활동하던 김창걸은 그 후 향토작가로 성장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소설창작을 진행하는 한편 주로는 연변대학교의 교수로 있으면서 우리 민족의 후대양성에 정진하였다.
/noy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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