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3년 9개 월 만에 박재호는 집으로 돌아왔다.
걸레 조각처럼 너덜너덜한 운동화를 신고 왔다.
집을 떠날 때에 신고 갔던 그 신이었다.
그리고 떠날 때에 달고 갔던 죄명도 줄지도 붇지도 않은, 우파분자에 역사 반혁명분자였다.
불과 한 달도 되기 전에 축출 영이 떨어졌다. 계급의 적은 도시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농촌으로 쫓아내어 노동개조를 계속하게 해야 한단다. 종백형 재준(在俊)씨가 사는 유하현(柳河縣)도 생각했고 구태로 되돌아갈 생각도 했다. 그러나 가고 싶다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호수가 적은 마을도 제외였다. 호수가 적으면 사람이 적고 사람이 적으면 감시하는 눈이 적으므로 적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란현 성에서 30리 떨어진 수곡(水曲)대대로 정해졌다.
백여 호에 7백 여명이었다. 순수 조선족들만 모여서 마을이었다. 토지가 비옥하고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므로 부근의 농촌에서는 잘 살기로 소문이 나있었다. 대대 당지부 박서기가 직접 나서서 초가 한 채를 주어 기거하게 했고 사원(社員: 촌민)들을 안배하여 집수리도 도와주었다. 순수하고 따뜻한 인정이 넘치는 농촌의 전원 풍경을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하였다.
그런데 그것도 순간이었다. 빈하중농도 이사를 오려고 해도 어려운 곳으로 반혁명분자가 끼여들 수 있었다는 것은 새로운 계급투쟁의 동향이란다. 그것을 빌미로 박서기가 쫓겨나고 외지에서 김서기가 부임되어 왔다.
그때로부터 박재호 일가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박재호 자신은 일은 남보다 곱절 하지만 받는 공수는 다른 사람의 절반밖에 안 되었다. 그리고 의무노동도 곱절 더 많았다. 하긴 그 부인의 노동공수는 깎고 싶어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공수를 많이 받지 못했다. 제일 큰애가 전실의 소생으로 겨우 13살, 그 아래로 조롱조롱 달린 아들 셋과 딸 하나는 어려서 전혀 사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연말이면 여느 집들에서는 분배를 타서 옷을 산다, 자전거를 산다, 시계를 산다, 라디오를 산다 야단들이었지만 그들은 쌀 값도 모자랐다. 마을에서 일년에 봄가을로 돼지를 잡고 소를 잡아 추념을 할 때면 고기를 먹겠다고 나설 엄두도 못 냈다. 그래도 마을의 노인들이 아무리 반혁명이라고 해도 다같이 한 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겨우 일년에 두 번밖에 맛보지 못하는 고기를 우리들만 먹고서 어찌 마음이 편 할건가, 한 집에서 고기 한 점씩 덜 집으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인정을 세웠다. 그 덕에 옆집의 고기 국 냄새에 속이 파 내리는 아픔은 덜었다.
몇 년 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박재호는 살아서 움직이는 짐승에 불과했다.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당서기의 허가가 없이는 마을 밖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외지에 사는 친척집에 경사나 상사가 있어도 허가를 주지 않았다. 그런 기회에 다른 마을에 있는 적들과 내통하여 복벽을 꿈꾼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 건너씩 하는 마을의 거의 모든 회의는 박재호를 투쟁하는 것이었다.
저녁녘이면 대대의 방송이 시작된다. 대대정부청사의 마당에 높이 세운 대위에 동서남북으로 매달린 스피카에서는 <<동방홍(東方紅)>>이 울려 퍼졌다.
동방이 붉어오니 태양이 솟아
중국에 모택동이 나타났네
그이는 인민을 위해 행복을 창조하니
그이는 인민의 구성이라네
그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당서기의 목소리가 왕왕 울려나온다.
<<사원 여러분, 오늘 저녁 대대 회의실에서는 우파분자이며 역사 반혁명 분자인 박재호 투쟁대회가 있겠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참가해야 합니다.>>
당서기의 말이면 법이었던 세월이라 사람들은 저녁 밥술을 놓기 바쁘게 회의장으로 모여들었다.
회의장 앞에 놓인 책상 위에 걸상을 얹어 놓았는데 그 위에 박재호가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어야 한다. 머리에는 양철 연통에 가마니를 둘둘 말아서 만든 고깔모자를 씌워졌다. 여간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는 쇠줄로 목에 건 나무 푯말에는 <<우파, 역사반혁명, 제국주의 간첩 박재호>>라는 글씨가 비뚤비뚤 씌어져 있었다.
벌써 오래 전에 공민권을 박탈당한 그한테 차려진 것이라면 투쟁을 받을 권리밖에 없었다. 대구를 해서도 안되었다. 오직 묻는 말에만 대답해야 했다. 그리고 사실의 여하를 물론하고 김서기네 억측에 따라 죄명이 새록새록 불어났다.
<<일본에 가서 무얼 했느냐?>>
<<고학을 했습니다.>>
<<닥?! 네 놈이 일본에서 간첩훈련을 받은 사실을 고백하란 말이다!>>
그는 하루 저녁에 일본 간첩이 되었다.
<<독립당에 참가하여 무얼 했느냐?>>
<<독립당은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조직입니다. 한국임시정부 산하의 조직입니다. 나는 조선인으로서 독립당에 참가한 것을 지금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닥?! 한국은 미제국주의 괴뢰 정부가 아닌가? 네 놈은 한국 간첩이다.>>
그는 또 한국 간첩이 되었다.
<<일본경찰을 하면서 지은 죄를 이실직고해라.>>
<<처음에 경찰 시험을 친 것은 생계 때문이었고 후에 경찰에 복귀한 것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입니다.>>
<<이놈아, 나발 불지 마라. 네놈이 공산당을 얼마나 죽였는지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는 오늘 저녁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뒤따르는 것은 매였다. 무지몽매한 사람들은 자신의 적극성을 보이기 위하여 목이 터져라 하고 <<박재호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고 너도나도 매 손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어떤 청년들은 손목 만치 굵은 장작을 들고 사정없이 후려쳤다. 한 번은 김서기가 손수 나서서 매를 치라고 고동을 하는 바람에 홍위병(紅衛兵)들이 바자 기둥을 뽑아서 박재호의 머리를 까려고 하였다. 마침 당시의 대대 민병연장(民兵連長 연장은 중대장임)이 나서서 말렸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그 날이 그의 제삿날이 되었을 것이었다.
박재호를 투쟁할 때면 그 아내를 꼭 옆에 세워놓고 함께 투쟁을 했다. 남편이 투쟁을 맞는 것을 옆에서 보는 그녀의 가슴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아프고 쓰렸다. 밤중이 되어서 투쟁대회가 끝나면 그녀는 남편을 부축하여 집으로 왔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녀가 대회장으로 가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 이튿날 새벽까지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지도 오래된 시간이라 그녀는 어둠 속을 헤덤비며 찾고 찾았다. 날이 희붐이 밝아올 무렵 남편은 윗마을 쪽에서 비칠비칠 걸어오고 있었다. 모진 투쟁에 정신을 잃고 집으로 오는 길을 잃고 온 밤을 방황했다는 것이었다.
그 날 집에 들어온 남편은 아내를 보고 말했다.
<<도망이라도 가야지 집에 있다간 살지를 못할 것 같소.>>
아내는 반대했다.
<<갈려면 나도 애들도 죽이고 갑소. 당신이 도망가면 무슨 큰 죄라도 있다고 생각할게 아임둥? 그러면 집에 있는 식구들이 당할 고초를 생각해봅소.>>
그 말을 듣고 남편은 휴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투쟁을 맞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투쟁을 하는 사람들도 지치었다. 최일룡이라고 하는 사람은 회의에서 당서기를 보고
<<이봅소 서기, 맨 날 투쟁을 해봐야 한 말을 곱씹긴데 이제 또 무얼 바라고 회의를 하는게요? 그만하고 좀 우리도 잠이나 잡시다. 우리가 살아야 투쟁도 할게 아이겠소?>>
라고 부르튼 소리를 했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아이들이 깊은 잠에 든 때 남편한테 솜 신 한 켤레와 몰래 모아둔 수 십 근 전국 양표(全國糧票: 전국 각지에서 쓸 수 있는 양표. 당시에는 각 성마다 자체로 발행하는 양표가 있었다. 양표가 없으면 어디로 가든 밥을 사 먹을 수가 없었다)를 주면서
<<여봅소, 당신 이 곳에 더 있다간 살지를 못할게꾸마. 도망을 갑소. 애들은 내가 맡아서 키웁지비.>>
라고 했다.
박재호는 솜 신을 만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고맙소. 그런데 도망을 간들 어디로 가겠소. 죽어도 여기에서 맞아 죽겠소. 나 하나 살겠다고 당신이나 아이들한테 고통을 전가해줄 수는 없는 일이오.>>
추운 겨울 날 홍위병들이 그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간첩이니 무전기를 내놓으라고 핍박했다. 없다고 하자 무지막지한 홍위병들은 깔개를 걷어내고 곡괭이로 구들 돌을 파헤쳤다. 그리고 책이며 일기장이며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의 재판이었다.
그의 집 출입문 위에는 <<반혁명분자의 집>>이라는 간판을 써서 붙였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사는 모든 식구들은 적으로 되었다.
학교를 다니는 자식들은 매일과 같이 학교내의 오류분자(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우파분자, 나쁜 분자의 총칭)들과 함께 일하고 투쟁을 받았다.
<<혁명적>> 선생들과 학생들이 투쟁대회 때마다 죄를 탄백(坦白)하라고 하는데 그들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유치원시절에 벌써 우파의 새끼로 되었고 그때로부터 줄곧 학교에서나 마을에서나 언제 한번 허리를 펴고 큰 소리 한번 하지 못한 그들이었다. 간이 콩알만해서 언제나 남의 눈치를 보고 앉을 자리 설자리 조심하며 살아온 그들이었다.
그들은 이름 보다 <<반동의 새끼>>로 잘 통했다. 그들도 스스로 자기의 아버지는 반동이고 자기들도 반동이라고 믿었다.
<<아버지는 일본놈 경찰을 하면서 혁명동지들을 얼마나 죽였습니까? 노실하게 탄백하십시오. 아버지 때문에 우리 모두 무슨 개 고생입니까?>>
그들은 아버지한테 화풀이를 했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머리를 돌리고 땅 꺼지는 한숨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내가 나쁜 일을 했다면 그때 남조선으로 도망을 갔을 것이다.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위해 일 했을 뿐이란다. 이 다음 너도 알게 될게다.>>
어떤 날 투쟁대회에서 전신이 피 못이 되게 얻어맞고 돌아가면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흐느껴 울었다.
천하 부모의 마음은 하나,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박재호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차라리 자기가 죽어서 처자가 곤경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서슴없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상사는 그같이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학교에서는 반동의 새끼는 공부를 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쫓아냈다. 그들 형제는 마을에 와서 아버지하고 함께 투쟁을 당해야 했다. 박재호씨는 아들 넷, 딸 하나를 두었다. 그 중에서 막내아들(世鎭 1960년 생)과 막내딸(仙嬌 1964년 생)은 너무 어려서 투쟁은 면할 수 있었지만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는 매일반이었다. 다행이 맏아들(吉鎭 1947년)은 타고장에 있는 처녀와 결혼하고 처가살이를 갔으므로 무사했다. 그러나 둘째 수진(守鎭)은 애들의 매를 맞아 종신고질이 되었고 셋째 경진(京鎭)과 넷째 세진(世鎭)은 돌림 매가 무서워 학교를 중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한테는 천진난만한 동년이 없었고 생기발랄한 학창시절이 없었다.
식구들 중 어느 누구라 없이 병이 나도 대대의 의사는 아예 진찰을 거부했다. 반동가정을 치료해주는 것은 역시 반동적 행위로 낙인찍히는 세월이었다.
그런 모진 세월에도 마을 사람들은 모름지기 도와주고 용기를 주었다. 쌀이 떨어지면 저녁이면 남의 눈을 피해 가져다 주기도 하고 투쟁대회가 있는 날이면
<<오늘 저녁 투쟁대회를 한다누만. 찰밥을 해서 대접하라우. 찰진 밥을 먹어야 끈기를 잃지 않을게 아이우.>>
라고 하면서 찹쌀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바로 그러한 분들의 마음에 감화되어 그들 일가는 힘겨운 나날을 용케 이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