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의 코리아타운 서탑 (西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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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의 코리아타운 서탑 (西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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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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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탑’이란 원래 청나라 초기 심양의 동, 서, 남, 북 네곳에 세운 4개 탑중 서쪽의 탑을 가리키는 탑 이름이였다. 그런데 지금 서탑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탑보다 심양 조선족집거구를 상기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서탑’은 지금 심양의 ‘코리아타운’(조선족거리)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되고있다.

조선족집거구의 형성

그럼 우선 서탑이 어떻게 조선족집거구로 형성되였는가를 살펴보자.
‘심양도성황묘비(沈陽都城隍廟碑)’에 의하면 심양에 서탑을 세우기 200여년전 즉 14세기 원나라때 심양시 서탑지구에 이미 고려녀진만호부(高麗女眞萬戶府)를 두었다고 하였고 명나라 초기의 료동지(遼東志)에도 14세기중엽 료하를 중심으로 하여 심양 일대의 조선인인구가 이 지역 총인구의 10분의 3을 차지했다고 한다. 이것은 14세기때 심양과 서탑지구에 조선인이 적지 않게 살고있었음을 말해준다. 서탑을 포함한 심양의 4개 탑은 청조숭덕8년(1643년)부터 건축하기 시작하여 3년에 걸쳐 동서남북에 4개 탑과 4개 절이 준공되였다. 서탑 연수사(延壽寺)의 대전에는 장수불상이 모셔져있는데 음력 5월 초하루가 장부술의 탄신일이라 하여 매년 이날이 되면 하루종일 법회가 굉장히 크게 열리군 하였다. 서탑은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여 탑체가 위험했으므로 1969년에 정부에서 헐어버리고 1998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서탑지구에 조선인들이 드나들기 시작한것은 19세기 70, 80년대 기독교신도들로부터라고 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1882년부터 1887년까지 가간에 조선인 서상륜(徐相倫), 백홍준(白鴻俊)이 서탑에서 조선문 ‘성경’을 번역, 출판하였다고 한다.19세기 중엽부터 많은 조선 리재민들이 심양 부근의 혼하, 료하, 포하 량안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서탑지역은 중계역이였다. 그때부터 점차 서탑지역에 조선인들이 더욱 많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1900년 5월에 조선 평안북도 녕성군의 농민 안봉태가 서탑 밑에 집을 잡고 중국상인 왕씨와 장사를 하였다. 1901년에는 조선기독교회의 백목사가 서탑에 와서 전도하였다. 이렇게 조선인들이 한집 두집 탑밑에 모여 판자와 양철로 림시주택을 짓고 장사도 하고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짜서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대 조선인들이 모여사는 곳을 ‘새끼골목’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많은 조선인들이 나라 잃은 설음을 안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해왔다. 1910년 전후 서탑지구에 정착한 조선인은 50여호나 되였다. 1911년에 압록강철교가 부설되고 1912년에 안봉선(安奉線 단동-심양선)이 개통되면서 조선인들이 떼를 지어 서탑으로 이주해왔다. 통계에 의하면 1910년부터 1920년까지 매년 동북지구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은 1만 2천여명이였다. 20세기 2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압록강 이북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9만 8,657명이나 되였다. 1919년 조선의 3.1운동이후 일부 애국지사들도 국경선을 넘어 서탑으로 와 반일독립활동을 하였다. 조선인들이 서탑지역에 모여들어 집거지구를 형성하게 된 원인은 서탑지구는 봉천 기차역과 가깝고 화물적 재고가 있으며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여 장사하기에 유리하였기때문이였다.

조선인들은 이런 우월한 조건을 리용하여 고무신공장, 정미소, 사진관, 려관 등을 차렸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마니틀을 마련해 새끼꼬기, 가마니짜기 등으로 돈벌이를 하였다. 1945년 8.15직전까지 서탑지구에는 조선인들이 경영하는 소형기업이 7개, 상업체가 30개,봉사업체가 28개였다. 이렇게 서탑지역은 조선인들의 집거지역으로 형성되였으며 점차 조선족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심양의 코리아타운

1945년 8.15직후 돈이나 권세가 있는 조선인들은 거의다 조선으로 나가고 나갈 형편이 못되는 300여호는 그냥 눌러앉아 있다가 국민당이 들어오는 바람에 살길을 찾아 여기저기 타지방으로 떠났다. 서탑은 또 다시 쇠퇴의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그러다가 1948년 11월 2일 심양이 해방되자 당의 민족정책의 혜택으로 국내 각 지역에서 조선족들이 서탑으로 운집하기 시작하여 서탑은 다시 흥성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탑이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한 것은 1988년부터였다. 20세기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서탑은 게딱지같은 판자집, 양철집들이 질서없이 여기저기 올망졸망 널려있어 빈민굴을 련상케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똥집’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게다가 사회치안질서도 어지러워 서탑사람과
는 혼인을 안한다고까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서탑사람들도 서탑지역을 벗어나려고 모지름을 썼다.

바로 이때 김학수라는 기업인이 서탑을 세인들이 주목하는 조선족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개조할 큰 뜻을 품고 설계도를 펼쳤다. 중심가의 길을 넓히고연장하여 상업가로, 길 량쪽에는 조선족상품무역청사, 백화점, 문화센터, 병원, 호텔 등 16~20층의 현대화건물을 짓고 대형지하주차장, 조선족공원까지 기획하고 3억 6천만원을 투자하여 41만평방메터에 달하는 서탑지역을 개발할 목적으로 달포 남짓한 사이에 주민들을 전부 이주시키고 낡은 주택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여기에 쓴돈이 5,300만원이였다. 그런데 그후 여러가지 사정으로 하여 김학수는 큰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유감을 품고 타계하였다. 서탑 개발계획의 류산으로 인하여 철거하였던 서탑의 원주민들은 6년간이나 막심한 불편을 겪었다. 그후 심양시정부가 이에 대해 중시를 돌리고 시정부에서 2억원의 거금을 투입해 33만평방메터에 달하는 아빠트를 짓고 2,400여호의 주민을 새집에 이주시켰으며 1,000여호의 거주, 경제활동 조건을 크게 개변시켰다.

그리하여 당년에 김학수가 설계했던 ‘심양코리아타운’의 꿈과 우리 겨레들의 숙망이 대부분 실현되였다. 새 건물이 일떠서자 조선족들은 서탑의 조선족집거구의 우세, 교통의 우세 등을 충분히 리용하여 조선족의 음식오락업과 상업 등을 발전시켰다. 1995년에 종합무역시장이 확건되면서부터 서탑은 동북지역 조선족용품과 한국제품의 집산지로 되였다.

중한수교 이후 량국간의 경제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서탑은 한국투자업체, 한국인들의 상담, 교제, 휴식, 식사, 오락 등 활동의 중심지로 되였다. 근년에 많은 활동들이 서탑민족거리에서 막을 올리군 한다. 2002년 한국주간을 서탑민족거리에서 성공적으로 진행한 심양시인민정부에서는 금후 해마다 한국주간행
사를 펼치기로 결정했다. 2003년 7월 18일부터 7월 25일까지 심양에서 펼쳐진 한국주간 행사는 외자유치 등 분야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번 한국주 기간 코리아타운으로 불리우는 서탑에서는 광환야(狂歡夜)가 펼쳐지기도 했다. 또한 올해부터 시작해 심양시정부에서는 서탑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족문화생태보호구를 조성하게 된다고 한다.


/푸른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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