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상징 ‘601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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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상징 ‘6013번’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8.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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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수필

‘6013번’이란 숫자는 형무소의 재소자 수의 (囚衣)에 부착된 번호도 아니며 더군다나 떼돈을 벌 수 있는 아파트 청약 일련번호도 아니다. ‘6013’이란 일련번호는 현재 한국에서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꿈과 희망에 부풀던 한때의 처지와 매우 흡사한 운명의 번호였다.

며칠 전 연변 돈화시에서 친척의 초청으로 돈 벌러 온 조선족 아가씨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전날 밤에 출입국 관리소 직원에게 잡혀 와 현재 목동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 구금되어 있다는 하소연이었다. 면회를 와 주었으면 좋겠다며, 벌금 낼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참으로 딱한 사정이다.

자국도 아닌 외국에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우랴. 고국이라면 그래도 주위에 친구도 있고 아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또 자국민끼리니 그런 대로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게다. 다른 아이들은 면회가 있어 벌금을 내고 석방되는데, 자기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불안해하는 음성임이 역력했다.

벌금 액수가 대충 얼마나 되냐고 물었더니, 한 백만 원에서 백 오십만 원 정도 될 것이라고 알려 준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 돈 좀 벌어 인간답게 살아보겠다고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찾아와 3D 업종에 근무하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 몇 달 치를 다 털어 바치는 꼴이다. 인간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서럽게 이를 악물고 벌은 돈이라 더 원통하게 느껴질 것이다.

중국에서 한국에 나와 돈벌이를 하는 조선족들의 공통된 하소연이라고 하면 조선족에 대한 편견과 차별 대우가 제일 먼저 꼽힌다. 직장에서 까닭 없이 멸시당하고 천대받을 땐 정말 돈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뿐이란다.

연락을 받고 나서 곧바로 예금도 별로 없는 빈 깡통 통장과 도장을 지참하고 목동 출입국 관리 사무소로 물어물어 찾아갔다. 필요로 하는 액수만큼 마이너스 대출을 받을 각오로 통장과 도장만을 지참하였다. 출입국 관리사무소 1층 안내실에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5층으로 올라가라고 일러준다.

5층에 올라가 면회신청서를 작성하여 창구에 제출을 하고 한참을 우두커니 기다렸다. 면회신청서 제출 창구에 뒤늦게 나타난 직원이 물품을 넣어줄 게 있느냐고 묻기에, 그런 건 없고 그냥 면회만 하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곧이어 옆 창구에 가서 면회를 하라고 말한다. 그 때 나는 그 아가씨가 내 앞으로 나와 면회를 할 거라는 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깨달았다. 그 아가씨와 방탄 유리창 같아 보이는 콩알만한 구멍 뚫린 칸막이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 아가씨 옆엔 건장한 젊은 청년이 그 아가씨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며 둘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나까지 머쓱해지며 마음까지 긴장되었다. 나라 팔아먹을 대단한 죄나 지은 것 같은 삭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네가 불법 체류자이기 때문에 잡혀 왔나?” 하고 나는 그 아가씨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내가 취직을 하고 신고를 안 했다고 잡혀 왔어요. 별다른 건 없어요.”

“그러면 혹시 나쁜 곳에서 죄를 짓다가 잡혀 왔나?”

“아니에요. 중국식 음식점에서 종업원으로 근무를 하다가 붙들려 왔어요. 제가 식당에 취직을 하게 되면 그 즉시 어디에 취직을 했다고 신고를 해야 하는데, 신고를 못 했기 때문에 잡혀온 거예요. 벌금만 물면 풀려난대요.”

“그러면 절차를 어떻게 밟아야 하지?”

“6층에 올라가 보면 안대요.”

이렇게 연변에서 온 아가씨와의 면회는 끝났다. 면회를 나온 그 아가씨를 보고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래위로 수의복 같은 연녹색 복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척 초청으로 들어와 여기에서 직장에 다니려면 국가에서 허락하는 업종에 취직을 하고, 취직한 후 곧바로 출입국 관리소에 신고를 해야 한단다. 그런데 중식당에 취직한 지 20일이 지나도록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잡혀오게 된 것이다.

누구나 법규를 잘 지켜야 하겠지만, 말을 잘 듣지 않았다고 죽일 놈 취급하며 몰아세워서야 어디 같은 민족으로서 민족주의를 부르짖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6층에 올라가 이러저러한 여자가 붙들려 왔는데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서류를 뒤적여 이름을 찾더니 한씨라는 실장을 만나보라고 알려 준다. 나는 조사실을 찾아 한씨라는 실장 명패를 확인하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여러 사람을 앞에 놓고 서로가 대화를 하는 걸로 보아 아마도 이와 비슷한 사건으로 잡혀와 심문 조서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거기에 서 있자니, 그 실장이 무슨 일로 왔냐고 물어, 자초지종을 대충 말했다. 그 실장은 명단을 뒤적이더니 이름을 확인하고, 나더러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30여 분이 지나도록 그 실장은 내 곁을 오락가락 지나다니면서도 까마득하니 이져버렸는지 이렇다 할 아무런 말 한마디도 없다. 그 사이 걱정이 태산 같은 아가씨는 몇 번인가 전화를 해 경과를 물어본다. 나는 그 때마다, 아직 담당 사법 경찰을 못 만났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불친절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혹시 나의 돌출된 행동으로 그 아가씨에게 불이익이 갈까 꾹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30여 분이 훨씬 지난 뒤 그 아가씨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그 내용인즉 자기가 근무하던 식당 사장이 와 해결을 할 것 같으니 돌아가도 된다는 연락이었다. 도와주러 왔다가 도와주지도 못하고 화만 머리끝까지 치밀어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전에 조선족 취업자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친척 초청으로 모국을 방문해 취업을 하려고 하면 취업 준비 기간으로 3개월을 준다. 이 기간 내에 취업을 못하면 다시 취업 신청서를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제출해야 한다.

설상 3개월 내에 취업이 된다고 해도 사업주를 대동하고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취업약정서류를 작성해서 계약을 체결해야 하고, 만약에 본인이 적성에 맞지 않아 직장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면 다시 사업주를 동반하여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취업해약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하니, 어떤 사업주가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쳐 직원을 정상적으로 채용하려 하겠는가. 취업 희망자도 마찬가지다.

또 이 같은 취업자의 약점을 이용하려는 업주도 생겨날 수도 있는 소지가 다분히 내포된 법조항이기에 좀더 간편한 절차로 취업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주어야 될 것 같다.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법규는 일반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마련이다. 내가 조선족문화예술인 후원회 일을 하고 있는 까닭에 조선족이 당하는 서러움과 비인격적인 모독을 하소연하는 분들이 대단히 많았다. 물론 자기들의 과오는 숨기고 학대받았던 사실들만 내게 말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조선족들의 하소연이 전적으로 잘못 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한두 번쯤 노임을 떼어먹히는 일은 다반사고 그나마 절차를 밟고 들어와 취업하는 사람들도 이럴진대 불법 입국하여 돈 좀 벌어보고자 하는 근로자들의 고통은 얼마나 클까 상상도 안 된다. 범법자의 신분으로 주는 대로 받고 주는 대로 먹고 어떤 이는 매까지 감수를 해야 했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한번은 심양에서 이런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놀란 적도 있다. 그 당시는 내가 중국 조선족을 돕겠다고 다닌 첫해가 되던 때였다. 조선족에게 나눠 줄 선물 보따리를 많이 가지고 들어가다가 심양 해관(海關; 세관)에서 보따리 장사로 오해를 받고 선물 보따리를 모조리 압수당했다. 물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때 가져오면 되겠지만, 가능하다면 찾아내어 연변에 보내주려고 심부름을 시켰던 낯선 젊은이와 점심을 먹으며 들었던 이야기다. 자기도 한국에서 3년 동안 불법 체류를 했었는데, 노임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여기서 뜯기고 저기서 뜯겨도 범법자라 큰소리 한번 제대로 못 치고 당하기만 했단다.

여기저기 떠돌며 허송세월만 하다가 아예 돌아와 버렸다며, 만일에 남북이 전쟁을 하게 되면 북에 가서 총을 들고 싸워 줄 것이라고 얼굴을 붉혀가며 불편했던 심기를 토로하던 모습을 나는 섬뜩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가 얼마나 어이없는 말들을 서슴없이 해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같은 민족으로 돈 좀 벌자고 몰래 들어온 조선족을, 출입국 관리법에 저촉되었다며 잡아다가 유치장에 넣고 강제출국 시키면서, 민족이 다른 중국이 돈 좀 벌어먹고 살자고 중국으로 불법 입국한 북한 사람들을 잡아 수용소에 감금하였다가 북한으로 강제출국 시킨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야기 말이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낯 뜨거워서라도 말 못 할 것 같은데 내 생각이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1960년대 잘 살던 우리 집이 망하고 살기가 막막할 때 내가 독일 광부로 가려던 계획과 연관된 것이 앞서 언급한 번호인 ‘6013’이다. 내가 대학에 다닐 무렵 가난하던 우리 나라가 학사 광부와 학사 간호보조원을 서독으로 수출할 때의 일이었다.

집안은 망하고, 졸업을 한다 해도 취직할 자리가 마땅히 없었던 당시다. 석탄을 캐는 광부라 하면 3D 업종 중에서도 최하위 위치를 못 벗어나는 직업이다. 직업병인 진폐증은 아예 불치병으로, 평생을 고생하다가 죽는 병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돈을 벌어볼까 하여 대학 졸업자나 재학생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던, 기억조차 하기 싫은 시절 이야기다.

간이 책상 위에 ‘탄광광부 모집’ 팻말을 올려놓은 중간 브로커가 서울 시청 둘레를 꽉 메우고 있었다. 결심 끝에 대학 4학년 2학기 등록금으로 동원 탄좌 광부 자격으로 독일 광부 신청을 하게 되었다. 돈을 들여 이렇게 만든 가짜 서류를 제출하고 신체검사를 마친 후 서독 갈 순번인 ‘6013번’째 탄광 광부에 합격을 했다.

서독으로 출발 날짜를 받아놓고 그만 동백림 간첩 사건이 터졌다. 억세게 재수 없는 놈 자빠지고도 코가 깨진 격이다. 대학 마지막 등록금을 이렇게 허무하게 탕진한 채 결국은 대학도 졸업을 못 하게 되었다.

마지막 등록금을 마련해 주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그 때만 해도 나라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 오늘날의 이북처럼 깎아놓은 듯한 산비탈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도록 국가에서 비료나 인건비 등을 지원해 주었다. ‘퇴미산’ 중턱에 계단식 밭을 만들었고, 거기에 참깨를 심게 되었다. 그 넓은 면적의 땅에 참깨를 키우느라 봄여름 내내 밭을 매야 했고, 추수를 하여 맑은 샘물에 깨를 씻어 말려 마련한 돈이었던 것이다. 7남매 중 나라도 번듯한 대학을 졸업시킨다는 자부심에, 힘겨운 줄도 모르고 뙤약볕 아래서 참깨 몇 가마니를 일일이 회초리로 두드려 털어낸 참깨였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 한국에 들어와 돈을 벌어 가난을 극복하고자 몰려드는 외국의 노동자들이야말로 그 옛날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슴을 친다.

얼마 전 여수의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외국인 근로자들이 화재사고로 떼죽음을 당했다. 좀 잘 살게 된 우리들로서, 한 번쯤 그 옛날을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를 가지고 다시는 이런 수치스러운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과거 없는 현재 없고, 현재 없는 미래 없다. 우리 미래의 가장 소중한 스승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인 것이다. 이 같은 스승으로서의 뜻있는 교훈을 완전히 잊고 스스로 나 잘났다고 으스대며 살아가는 건 인생의 행복이 아니라 자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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