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간 13만 명 무료진료(외국인노동자, 중국동포, 다문화가정)
진료, 검사, 수술, 입원 등 전면무료로 생명 살리기 앞장서
반한감정 줄이고 국가 이미지 높이는 민간외교의 선봉 역할
현재 매일 250여 명 무료진료, 자원봉사 의료진 400여명 활동
이완주원장 명예원장 추대, 김정룡선생 원장 취임도 함께 해

지난 7월 11일 오전 11시에 의료 사각지대에 방치된 외국인노동자와 중국 동포, 다문화가정의 결혼 이민여성과 그 자녀들을 치료하는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이 4주년을 맞이하여 후원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을 초청하여 보고회 및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이날 행사에는 여러 관계부처 귀빈들이 참석하여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의 4년간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며 축하와 격려를 하였다.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은 의료 사각(死角)지대에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을 위하여 진료, 검사, 입원, 수술을 무료로 시행하고 있다. 현재 병원에는 총 4명의 상근의사를 비롯하여 30여명의 상근 직원이 진료를 하고 있고, 400여명(의사 330여명, 간호사 80여명)의 자원봉사 의료진이 함께 활동 중이며, 내과, 외과, 치과, 안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정형외과 등의 다양한 진료과목으로 하루 평균 약 250여명의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한편, 병원 개원 초기에 비해 이어지던 여러 도움의 손길들이 다소 뜸해져서 재정적으로 많이 힘든 상황에 처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찾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어 대출을 받아 약과 수술 도구들을 구입하여 환자들에게는 여전히 무료진료의 초심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까지도 뜻있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에 의해 병원이 유지된 것처럼 지속적인 후원이 시급한 실정이다.
또한 응급실과 야간당직의사가 없어 응급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고, 중환자를 타병원에 보내야 할 경우 병원비로 분쟁이 생겨나거나 큰 병원에서 치료를 거부하는 등의 심각한 문제들도 쌓여 있다. 결국은 지금의 1차의료기관인 의원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준종합병원으로의 확장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금번 기념식에서는 4년 동안 병원장으로 일한 이 완주 원장(63세)의 명예원장 추대식이 함께 열렸다. 이 원장은 개원준비로부터 4주년을 맞이하도록 사례비를 받지 않고 무료 자원봉사 원장으로 병원을 이끌어 왔다. 후임 원장에는 인도 캘커타 7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헌신적인 의료활동을 전개하였고, 북한 개성병원에서 초대병원장으로 3년 가까이 일해 온 김정룡 선생(50세)이 일하게 된다.
병원 설립자인 김해성 이사장은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며 이들도 우리와 같은 의료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의료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죽어가는 일은 막아야 한다. 한편으로 그동안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이 문을 닫지 않고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고, 외국인노동자의 따뜻한 이웃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 어느 누군가의 후원과 정성 까닭이다. 깊은 감사를 드리며 지속적인 후원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부록
“한 사람이라도 살리고 싶다”
-김해성이사장

그동안 한국에서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 1500여명이 내 손을 거쳐 갔다. 외국인 노동자 장례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서류 발급과 번역 및 공증, 외교통상부와 대사관의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질병으로 사망한 이들의 경우엔 엄청난 병원비와 영안실비, 장례비가 큰 장벽이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1년씩 방치되고 부패한 시신을 넘겨받아 코를 싸매고 장례를 치러야 한다. 재중동포의 시신은 대부분 화장을 한다. 동남아시아나 이슬람권 노동자의 시신은 방부 처리를 한 뒤 함석 관에 실어 특수화물 항공권을 사서 본국으로 보낸다.
열심히 장례를 치르다보면 아무런 보상도 없이 방치된 시신들만 줄을 서기도 한다. 어떤 날은 3~4구의 시신을 처리하느라 장의차를 부를 돈이 없어 화물차로 나르다가 경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불법 체류자들은 아파도 병원에 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건강보험에도 들어 있지 않고 일반진료비는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홍수에 빠져 목말라 죽었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한국에는 병원과 약국, 의사와 약사가 홍수처럼 넘치는 데도 이들은 제대로 치료 한번 못 받은 채 죽어가고 있다. 장례 치르는 일도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고 의미가 있는 일이었지만 어느 날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기 전에 치료만 제대로 하면 살릴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무료 진료소를 열어 진료와 투약은 했지만 응급,입원,수술환자에 대한 대책은 없었다. 부탁할 만한 의사들은 이미 진력이 나도록 요청을 했다. 더 이상 아쉬운 소리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직접 병원을 세워 ‘살리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런 문제의식이 기도가 되고 믿음의 싹이 되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3년 전 직원회의 석상에서 병원을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전 직원이 나서서 반대했다. “의사가 병원을 만들어도 문을 닫는 곳이 많은데 당신은 의사도 아니면서 돈도 없는데 어떻게 병원을 만들고 유지하려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한 사람이라도 살리고 싶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후 2004년 7월 22일 세계 최초로 ‘외국인 노동자 전용의원’이 문을 열었다. 진료실과 수술실, 입원실, 물리치료실이 들어섰다. 검사실과 약국, 외국인 전용 치과와 한의원도 만들어졌다.
우리 의원은 외국인 노동자와 재중동포만 받는다. 진료와 검사, 수술과 입원 등 모든 것이 무료다. 4년 동안 13만 명이 넘게 진료를 받았고 지금은 매일 250여명이 진료를 받고 있다. 퇴원 후에도 쉼터에 머물며 무료로 숙식을 제공받고 계속 치료 받는 이들이 300여명에 이른다. 나는 병원 일에 큰 보람을 느낀다. 이는 의료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는 귀한 생명들을 살리는 일이다. 또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반한 감정을 불식시키고 친한 감정을 세우는 민간외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육신의 치료와 함께 복된 소식을 전하는 기쁨이 나와 직원들을 신나게 한다.

“무료진료 통해 더 큰 삶 얻어”
-이완주 병원장
4년째 외국인 노동자에 仁術 베푸는 이완주 원장
“나누는 행복이 진짜 행복입니다.”
4년째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무료진료를 해온 이완주(여·62) 외국인노동자병원 의무원장은 “돈이나 물질에 의한 행복은 결국 더 좋은 것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킬 뿐”이라며 “나누는 행복이 여유있고 남는 행복”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이 잘나가는 소아과 의사를 그만두고 무료진료를 시작한 것은 2004년 7월. 이 원장은 “간암에 걸린 외국인 근로자가 찾아왔지만 돈이 없어 입원도 못하고 세든 집에서도 쫓겨날 처지였다”면서 “결국 호스피스 역할만 하다가 장례를 치렀고 그때 외국인 근로자들을 무료로 진료해 줄 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이 원장의 병원에서 무료로 진료받은 외국인 근로자는 모두 10만여명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은 환자만 해도 1118명에 이른다.
이 원장은 외국인노동자병원을 세우기 위해 3억원을 쾌척하고 한달에 1000만원씩 벌던 소아과 의사까지 그만뒀다. 하지만 이 원장은 무료진료를 통해 더 큰 것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무료진료를 하면서 이전의 생활이 부족하고 안이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면서 “무료진료를 하면서 삶에 대한 겸손한 마음을 얻게 됐고 결국 내 행복의 자산이 됐으니 오히려 얻은 것이 더 많다”고 말했다.
4년간 무료진료를 하면서 이 원장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자신의 땀과 정성을 나누어 죽어가는 외국인 환자를 살려냈을 때다. 이 원장은 “한국에는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는 중국동포가 담낭암에 걸려 열이 40도나 오른 상태로 병원에 찾아왔었다”면서 “모두가 죽는다고 했지만 대소변을 받아내며 정성을 다해 보살폈더니 보름만에 의식을 차리고 한달만에 중국의 고향으로 돌아갔던 게 가장 뿌듯한 기억”이라고 회상했다.
이 원장은 “990만원을 가진 사람은 1000만원을 채우고 싶어 조급해한다”며 “아무리 가져도 결국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될 뿐이니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항상 불행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원장은 “사람들 모두 각자 자신의 생각이 있고 행복 역시 다르게 느낄 테니 나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건방진 일”이라면서도 “더 좋은 것에 대한 갈증이 생겨나는 행복보다는 나눌수록 더 커지는 나눔의 행복이 그래도 진짜 행복이 아닐까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