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에 절은 엄마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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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에 절은 엄마의 선물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8.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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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2월 31일은 나의 큰딸 민희의 생일날이다. 이날이 돌아오면 나는 농짝속에 정히 간직한 색바랜 털실모자를 꺼내본다. 이 털실모자는 내가 딸애의 첫돌생일때 선물한 모자인데 여기에는 가슴아픈 사연이 깃들어있다.

1966년 어느 겨울날, 주부련회에서 사업하던 나는 조직의 배려로 조선에 가 석달간 휴양을 하고 돌아왔는데 《외국특무》라는 어머어마한 모자가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나는 행장을 풀기 바쁘게 심사를 받게 되였고 잇달아 본격적인 비판투쟁을 받게되였다. 당시 태여난지 40일밖에 안되는 젖먹이 딸 민희도 나를 따라 다니게 됐다. 추운방에는 가마니 한장밖에 없었는데 저녁이면 갓난 딸애는 춥다고 울어대군 했다. 나는 할수 없이 딸애를 나의 배우에 눞여 나의 체온으로 아이를 진정시키는수밖에 없었다. 나는 새우잠을 자면서 밤을 보내기가 일쑤였다. 끝이 없이 련속되는 고문과 비판투쟁에 시달리다보니 나의 몸은 말이 아니였다. 젖이 모자라 어린 딸애는 온종일 울어댔으며 영양실조로 다리도 가위처럼 구부러들었다. 우리를 감시하는 반란파들한테 나머지 음식이라도 좀 달라고 사정했지만 《개를 먹여도 너 같은 외국특무한테는 주지 않는다》는것이였다.

하루는 내가 또 비판투쟁에 시달리다가 복도에 들어서는데 딸애는 파지통에서 사과껍질을 주어 먹고있었다. 반란파들은 곁에서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보고있었다. 이 정경을 보는 순간 나의 가슴은 칼로 도려내는듯 했으며 피가 꺼꾸로 흐르는듯 했다. 나는 성난 사자마냥 반란파두목의 얼굴에 손가락질을 하면서 《너도 사람인가!》고 울부짖었다.

반란파들은 급기야 얼굴에 독을 피우면서 나에게 주먹질, 발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갈비뼈가 세대나 부러질 정도로 맞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딸애의 자지러진 울음소리에 간신히 깨여나보니 딸애는 너무 울어 목이 다 쉬여있었다. 반란파들의 모진 매질에도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던 나는 처음으로 딸애를 안고 서럽게 통곡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듯 했고 살고싶지 않았다. 딸애와 함께 죽고만싶었다…

어느덧 딸애는 첫돌을 맞게 됐다. 그날도 나는 비판투쟁을 받고 기진맥진하여 돌아왔는데 딸애는 먹다 남은 만두 한쪼각을 손에 쥐고 졸고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졌다. 돈이라야 겨우 70전밖에 없었다. 나는 이 돈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여 털실모자를 사서 딸애한테 씌워 주었다.

( 딸아, 미안하구나. 앞으로 꼭 좋은 생일선물을 사줄테니 그날까지 참아다오)

나는 딸애한테 모자를 씌워주면서 속으로 되뇌였다.

딸 민희는 나와 함께 자유없는 어둑컴컴한 격리실에서 3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그후 나는 《외국특무》라는 모자와 《현행반혁명분자》란 모자를 벗고 주정협에 출근하게 됐다. 하지만 딸애는 엄중한 영양실조로 몸이 말이 아니였다…

1983년에 나는 당시 주당위 서기로 있었던 조남기동지의 배려로 15살에 난 딸애를 데리고 북경에 있는 큰 병원에 가게 되였다. 조남기동지는 북경에 회의하러 왔던 차 친히 병원에 와서 우리 모녀를 위문했으며 병원측에도 최선을 다해 병을 치료해줄것을 부탁했다. 북경에 올 때까지만 해도 얼마 살지 못할것이라던 딸애는 조남기동지와 많은 고마운 사람들의 사랑에 받들려 기적적으로 병이 완쾌되여 무사히 돌아 오게 되였다.

딸 민희는 인제 40살의 중년이 되였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있다.

딸애의 생일은 나에게는 가슴아픈 추억으로 남게되였으며 딸애한테 준 나의 첫돌 선물도 영원한 력사의 견증물로 남게되였다.

최채숙 구술 강산 대필

연변일보/태환컵생활수기공모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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