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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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엘 아이"
  • 이정숙
  • 승인 2008.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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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수기>

찝찝한 마음--

"오늘은 싸우지 않았는지?!" 열흘 내내 마음이 졸아듭니다. 동네방네 해석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렇고...... 마음만 갑갑합니다.

지난 19일 체류연장 수속을 하러 서울출입국사무소에 갔댔습니다. 오후 1시 좀 넘어서 외국인등록증과 신청서를 젊고 멋진, 상냥한 직원에게 내어 놓고 얌전히 앉아 있는데 컴퓨터로 확인을 하시던 직원이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동포들이 고국에 와서 저러지 말아야 되는데..... 며칠에 한번씩 시끄럽게 싸우니....."

인터넷 좀 하려고 지하고 어디고 찾아 다니다가 싸움소리를 못들은 나는 그제야 사무소 문밖에서 전화카드 파는 귀화한 아주머니들이 싸움을 했겠다는 생각에 망신당한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죄송해요. 우리세대는 사회주의 체재하에서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다보니 스스로의 컨트롤이 딸려서 그래요. 그러나 정말로 열심히 일하며 산다는 것만은 인정해 주세요." 하고 변명아닌 변명을 늘여 놓았습니다.

사무소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카드를 들고 있는 아주머니를 붙잡고 다짜고짜 "금방 싸웠어요?!"하고 물으니 우릴 중국사람이라고 하도 업신 여기고, 못견디게 굴기에 몇마디 했답니다. "저 건물안의 직원들은 모두 우리동포들인 줄 아는데 여기서 싸우는건 우리동포들의 챙피이고, 욕 먹이는 일이에요. 다음엔 싸우더라도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싸우고, 혼내세요."

나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악에 바친 걸죽한 욕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급히 소리나는 쪽에 가보니 화물차에서 음식과 카드를 팔던 토박이 한국 아주머니었습니다. 두 눈이 쫙 찢어지고, 눈 아래위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일당백이었습니다. 다가가서 팔을 붙잡고 "왜 이러세요?!" 하고 말리려고 했지만 음량많은 내 목소리마저 모기소리만큼 가늘게 앵앵 거릴 뿐이었습니다.

며칠에 한번씩 싸우면서 텃세를 부리는건 한국아줌마라는걸 꼭 그 젊은 직원에게 알리려고 사무소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가면서 생각해 보니 동포들 땜에 한창 바쁜 분에게 어둔 밤에 홍두깨 내밀듯이 "우리 동포들이 아닙니다."하긴 실례이고, 또 고국동포면 어떻고, 귀화한 동포면 어떻고, 그 나물에 그 밥인데.....

다시 돌아와서 고래고래 욕설을 눅잦혀 보려했지만 어림도 없었습니다. "안돼, 저기 사무소 전체 직원들은 우리동포들이 맨날 이렇게 떠나게 싸우는줄(사실 한사람의 목소리뿐, 다른 목소리는 쨉도 안됨) 알겠는데...." 또다시 사무소로 발길을 옮겼다가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욕설의 임자가 토박이 고국동포라는걸 밝히면 속이야 풀리겠지만 그래서 얻는건 무엇이고, 또 그래서 어쩌겠단 말인가?! 혼자 되묻다가 다시 돌아섰습니다.

그렇게 싸움도 못 말리고, 속시원한 해석도 못하고 단가마에 든 개미처럼 왔다갔다 하다가 어렵사리 받은 청가라 더 지체할 처지도 못되고 해서 내꼴 봐라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습니다.

내가 미웠습니다. 로또라도 맞히면 그 아주머니에게 돈을 드리면서 "집에서 조용히 사세요."하고 먹히는 말 한마디 할 수 있으련만.

내가 미웠습니다. 시간이 되면 혼자서라도 피켓을 들고 불매운동을 벌리련만.

아주머니들, 공공기관 앞에서 무리지어 얼쩡거리면서 사구려를 부르는 꼴불견한 일이 없게 사회질서를 잘 지키고, 길거리에서 법에 위배되는 잡상행위를 하지 마세요.

#

*내 이름은 "엘 아이"
평어를 양지 바랍니다.

교통수단이 소나 말, 자동차뿐이었던 그젯날엔 좁은 활동범위내에서 단순한 생활을 하다보니 얼굴이란 신분증 하나면 족하였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인지라 다른 모든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여권, 신분증, 등록증 세개의 내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중국신분증 맨위엔 내이름 "이수정"이 한글 석자로 똑바로 박혀있다. 한국에 와서 이 중국신분증을 사용하면 4천만 고국분들이 나를 금방 부를 수 있고, 나는 화답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외국인등록증엔 "LI SHUIJING"이란 중국병음이 대문자로 표기가 되어 있기에 중국의 몇억인구는 금방 나를 부를 수 있지만 한국에선 100%가 감을 잡지 못한다.

내 등록증을 보곤 머리를 갸우뚱하곤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 보면서 한마디 말도 건늬지 못한다. 반만년 동안 같은 족속으로서, 갈라진지 백년도 안되고, 다시 되돌아 와서 착실히 생활한지 햇수로 10년이 된다. 억양만 빼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이 됐지만도 아프리카에서 온 꽁고인과 전혀 다를바 없는 이방인이다.

처음엔 이름란에 당차게 "이수정"이라 기입도 했고, 씩씩하게 "이수정입니다."하고 웨쳤지만 어데가나 꼬물도 통하지 않았다. 한민족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지금껏 불리던 내 이름은 오간데 없다.

대신 나의 눈치는 9단이다. 내 얼굴보다 더 권세있는 외국인 등록증을 앞에 놓고 마치 이름모를 요리감을 두고 어떻게 요리할가 하는 표정을 짓는 실무자에게 냉큼 달려가서 "저 엘 아이 입니다." 하고는 싱긋 웃지만 마음은 씁쓸하고 뒷맛은 개운치 않다.

어느 한번 시험에서 합격된후 딸에게 점수 자랑하려고 몇곳에 전화로 문의했지만 "이수정"이란 이름이 없단다. 후에 기억을 더듬으니 이상한 병음표기를 해놓았으니 누가 알겠는가?! 운전학원을 다닐땐 강사님들이 매일 바뀌고, 매일 호명이 있는데 번마다 이상한 이름이라고 하면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서류의 이름도 잘못 타자 되어서 퇴자를 맞고 이리저리 다니고 다시 문서 작성을 하는 불편함이 뒤따랐다.

가능할진 모르지만 중국에서처럼 첫머리에 한글로 내 이름을 써 달라는 떼질은 안 쓰겠지만 등록증의 대문자 병음아래에 자그마하게라도 진실로, 진실로 하나뿐인 내 고유의 이름을 한글로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다소 불편이 따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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