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꿈꾸는 것은 반드시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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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꿈꾸는 것은 반드시 이루리라"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8.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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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정선
1. 동쪽으로 기운 나무는 언젠가는 동쪽으로 쓰러진다.

나는 어릴 적부터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이 꿈이었다. 그것은 막연한 꿈이었고 우리나라에서 해외에 나간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시절에도 나는 언젠가는 외국에 나가 볼 것이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기르고 내 나이 서른이 지나서야 '해외여행자유화'가 이루어지는 시대를 살았었다.
내 아이들이 자라면서 청소년교육에 뜻을 갖고 상담교육을 받은 후 학생상담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무척 보람 있는 일이었고 그로 인해 청소년들의 교육과 선도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런 결실이 작년에(2006년도) 교육부장관상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내가 이 사회에서 하나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데 보람을 찾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면서, 어린 학생들은 항상 새롭게 입학하는데 나는 점점 세월에 밀려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십 년이 넘게 활동하면서 다양한 학생들을 상담하였고 그러면서 사회의 변화로 인한 학교의 변화 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점에서 나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모색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청소년교육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이제는 성인교육이나 사회교육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러던 어느 날 신문을 뒤적이며 일상의 소식들을 보고 있었다.
그때 눈에 띄는 광고 기사가 있었다. <해외취업을 위한 직업기술교사양성과정>이라는 것이었다. 노동부가 허가하고 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후원하는 취업기관이라는 것에 신뢰감이 갔다. 직업기술교사란 어느 면에서 기술을 가르치는 교사를 말하는 것인데, <한국어강사>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그런데 나이를 어떻게 극복하나? 무조건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는 일정 범위에서 융통성을 보일 수 있으니 신청해보라고 했다. 나는 그때 어떤 책('2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의 내용 중 하나-신문, 잡지의 두 줄짜리 광고를 주목하라--)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비록 50대이긴 했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언제나 무모함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성공은 일말의 행운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나이에, 정녕 내가 이것을 잘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퍽이나 걱정되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일반적인 가정주부로서 살아오면서 평범한 아내로, 엄마로 생활해오지 않았던가. 남편은 명예퇴직을 한 후라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는 시점이었고, 큰애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지만 작은애는 전역을 앞두고 있었다. 그 애가 제대한 후에 복학을 해서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고, 남편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따져보면 내가 광고를 보고 응모를 하기에는 어느 하나 맞는 조건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리를 다쳐서 깁스를 한 상태라 활동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는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런 교육을 받고 취업이 된다면 경력이 될 수도 있겠다, 그것은 조금 후의 미래에 내가 이 사회에서 필요한 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혹시 한국어강사로 해외취업을 한 후에 그 경력으로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국어교육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육을 자원봉사로 활동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평균수명이 늘어난다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오래도록 활동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리고 내가 꿈에 그리던 외국에서의 생활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가족들은?
나는 다시 생각해보았다. 남편은 이제 어느 정도 사업구상을 구체화할 수 있어서 나름대로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아직 대학생이라고는 하지만 모두 군대에 다녀와서 자신들의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만큼 자랐다. 단지 먹고 입는 일을 엄마가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만 바꾼다면 내가 못할 일도 아니겠다. 그리고 지금 접수가 시작돼서 합격자 발표가 끝나고 연수가 시작될 즈음이면 깁스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쩜 이런 기회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크게 한 발 내디뎌 보기로 했다. 되든, 안되든.......

2. 당신은 내게 사랑은 실천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이런 내용을 말했다. 광고내용은 중국에 취업할 수 있는 기술교사를 양성하는 것인데, 그 중에 <한국어강사>도 있으며 내가 지원한다면 <한국어강사>자리에 응모할 수 있을 것이고, 국비로 지원되기에 엄격하게 교육받을 수 있을 것이며, 4개월은 서울에서 교육을 받지만 4개월은 중국 현지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교육이 끝난 후에는 반드시 취업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여기에 응모한다고 반드시 합격하는 것도 아니니까 한번 응모해 보기만 하겠다고 넌지시 말했다. 남편은 그게 가능할까 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반승낙의 뜻을 보였다. 나는 이력서와 증명서 등을 구비해서 제출하고 합격통지를 간절하게 기다렸다. 거의 한 달이 지나서야 연락이 왔다. 기다리던 합격소식이었다.
정말 내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4개월을 가족들과 떨어져서 생활한다는 것이? 이 나이에 책상 앞에 앉아서 하루 5~6시간씩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한자를 배우기는 했지만 중국어를 한다는 것이? 도대체 나는 어디서 이런 용기를 갖게 된 걸까. 그러나 나의 걱정은 남편의 말 한마디로 봄눈 녹듯 사라졌다.
"당신은 잘 할 수 있을 거야. 당신, 그 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까 내가 4개월 휴가 보내준다고 생각할게!" 그리고 취업은 그 후의 문제이니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고 했다. 내가 살아온 세월에 큰 한 점이 찍힌 사건이었다. 남편은 나를 위해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일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내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음을 정말 감사히 여긴다.

3.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은 배움이고, 만나는 모든 이는 스승이다.

나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작은 아들의 전역일에 연수를 시작하였다. 나는 얼마나 그날을 기다려 왔던가.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들을 위해서 당연히 집에서 그 애가 좋아하는 제육볶음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군복을 입고 들어서는 아들을 축하해주고 안아주려던 나의 계획은 실행할 수 없었다. 나는 그날 설악산을 등반하는 1박 2일의 '극기 훈련'에 참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리에 깁스를 한 상태여서 산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연수생들의 첫 번째 단합행사였기에, 또 하나의 이유는 출석일수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참가했던 것이다. 다리의 깁스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남편은 아침의 출근시간을 늦추고 나를 데려다 주었으며, 오후에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나가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도와주었다. 그렇게 20여 일이 지난 후에야 혼자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교육을 받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원래 책을 보기 좋아하고, 무언가를 배우는 데 흥미가 많은 편이라 새로운 취업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오히려 재미있고 즐거운 생활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시작한 연수생활은 아주 즐거운 것만도 아니었다. 그것은 함께 교육받으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끼리의 문제이기도 했다.
내가 교육을 받은 곳은 IOA(㈔국제직업능력개발교류협회)라는 곳이었는데 개설된 지 얼마 안 되는 기관이었지만 교육과정이나 강사진은 그런대로 잘 짜여진 곳이었다. 그곳의 특징은 나와 같은 사람이 연수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연령대가 다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에서 다양하게 나름대로의 생활을 해오던 사람들이 <해외취업>이라는 하나의 목표아래 다시금 교육받으면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해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조심스러운 일인지를 알게 해 준 계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이 내게는 또 다른 배움의 장으로 다가왔다. 어느 곳이나, 모두에게 완전한 만족을 갖게 해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음을 다시금 느꼈다. 그리고 이런 사회교육의 일환인 취업교육은 일단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것이고, 그 선택은 자신이 지금까지 생활해 왔던 모든 것으로부터 새로운 전환점을 찾기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기회를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훨씬 건설적인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취업교육이 내가 해외취업을 하는 데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가면서 생활하며 경험하는 모든 것을 배움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기회였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 또한 나에게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매일 매일 생활하는 모든 것에 되돌아 물어본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지, 나로 인해서 상처받는 사람은 없는지, 내가 정말 스스로에게나 가족들에게 반듯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지.

4. 더 많이 배우자, 더 많이 익히자.

교육과정은 중국어와 한국어교수법, 실무능력, 실습, 중국의 이해 등의 과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내에서의 교육과정은 한국어교수법이 끝나고 중국에서는 전부 중국어로 수업하는 과정이었다. 잘되지 않는 발음과 우리말에 없는 성조를 익혀서 발음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모든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당연히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그 나라의 문화도 함께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중국에 대한 공부도 이것저것 함께 했다. 책이나 인터넷으로 알고 있는 것을 넘어서 중국에서 실제 생활해 보면서 알아간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새로움도 있었다. 외국어는 그 나라에 가서 배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실제로 중국에 와서 중국어를 배워보니까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교육을 받은 곳은 중국 청도였는데 배로 20분 정도 들어가는 곳에 있는 “청도직업기술학원”이라는 곳이었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에서 '학교'라고 말하는 곳을 '학원'이라 쓰고 사설학원이나 보습학원 같은 곳을 '학교'라고 쓴다.) 3년제 학과도 있고 4년제 학과도 있는 국립전문대학교로서 대학 내에 국제학원에 설치된 어학연수반이었다. 대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는 곳이었다. 우리 연수생들은 각자의 다른 꿈과 포부를 그리며 그곳으로 출발했다. 10월의 서늘한 바닷바람을 등지고 인천항을 떠나던 날, 나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남편의 말대로 휴가 받은 사람처럼 떠났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온갖 생각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중국이란 곳이 해외 여행할 때 잠깐 머물던 곳에서, 4개월을 먹고 자고 공부하며 지내야 한다는 곳으로 생각되니까 한편으론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론 설레기도 하는 묘한 기분이었다. 청도항에 도착하니 학교 관계자들이 나와서 안내를 해주어 다시 배를 타고 황도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우리 연수생들은 4개월 동안 중국어로 수업을 듣고, 취업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분주했다. IOA에서도 취업을 위해 지원을 한다고는 했지만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그 동안 학생들도 많이 사귀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공부했다. 그 동안 쓰지 않던 돋보기를 쓰게 되었고, 그렇게 책을 보니 오랫동안 집중해서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외국어라는 것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단기간에는 어려울지 몰라도 현지에서 배우는 것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학생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려고 노력하였고, 모르는 것은 자주 물어보면서 외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이 되면 연수기간이 끝날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그냥 돌아가서 기다려볼 것인지 아니면 다른 취업처를 알아볼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돌아가면 다시 취업을 위해 중국에 들어온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들고, 8개월이란 시간을 투자해서 공부한 것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연말에 학교에서 한국어교수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일단 응모해 보기로 하고 남편에게는 전화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곳에서 한국어교수를 모집하는데 계약기간은 일년이고, 급여는 얼마 안 되지만, 국립전문대학으로 평판도 좋은 곳이니 한국어교수 경력을 갖게 되면 아주 좋을 것 같고, 무엇보다도 내가 공부하고 있던 곳이라 생활하는데 훨씬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남편은 잠자코 듣고 있더니 당신이 정히 하고 싶다면 해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1월 중순에 국제학원(우리나라로 치면 국제학부) 부원장에게 면접을 보았고, 중국인 한국어교수가 옆에서 도와주었다. 그 동안의 경력을 묻기도 했고, 왜 이 학교에서 한국어교수로 일하고 싶은지를 물었다. 나는 성실하게 대답하였으며 중국인 한국어교수가 중국어로 통역해서 말해주는 것을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가리키면서 발음도 정확하고 학생들의 반응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연수기간 동안 ‘한국어 강의 실습’이 있었는데 그런 것도 반영이 된 모양이었다. 합격통지를 받고도 많이 좋아할 수 없었던 것은 탈락한 사람이 있었고, 아직도 취업이 안 된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4개월 연수과정이 모두 끝나고 일부는 취업으로, 일부는 계속 공부할 목적으로 중국에 남기도 하고 몇몇 사람들은 귀국하게 되었다. 나는 1월 말에 학교 측과 계약을 하고 귀국을 하였다. 집에는 미리 전화로 이야기를 해두었기에 남편은 빙긋이 웃으며 격려해주었다. 자신도 늦은 나이에 사내아이들만 데리고 생활하는 것이 불편했을 텐데 (친정어머니가 와서 도와주시기는 했지만 그런 것도 미안하고 어려웠을 텐데) 자신이 힘든 것을 말하기 전에 내가 힘들지 않았는지 먼저 걱정해 주었다.

5. 나, 지금 꿈꾸고 있는가.

방학이 끝나고 다시 이곳에 들어와서 수업을 하게 된 지금, 나는 이미 학생들과 교류하여 익숙해져 있었고 학교사정도 조금 알고 있고 낯익은 곳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내게는 아주 다행이다. 학생들은 순수하고 친절했으며 나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처음 연수생활을 시작할 때의 긴장하고 두려웠던 것도 많이 희석되었다.
내가 예전에 학교 다닐 때에 배운 중국은, 모택동이 지배하는 공산국가로 모든 국민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가난한 나라였고, 세계 어느 나라든지 갈 수 있어도 공산국가는 갈 수 없는 줄로 알았었는데, 내가 지금, 이곳에 와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요즘의 젊은 사람들이나 학생들은 우리만큼 공산주의에 대한 엄격한 교육이 없어서, 또 요즘은 세계화시대라고 해서 누구든지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시대니까 내가 느끼는 것과는 다른 감정으로 중국에 올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만난 한국유학생들을 보면 그저 중국어를 배우기위해서, 공부를 하기 위해 환경이 열악하고 불편한 생활이지만 참고 지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볼 때에, 중국은 예전에 내가 그들과 같은 대학생이었을 때의 우리나라 형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나라도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얼마나 피땀 흘려 이룩한 지금의 한국인가. 그러니 우리나라보다 좀 후진국이라고 해서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알다시피 중국도 내년에 북경올림픽이 끝나면 더욱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나라가 서울올림픽 이후로 많이 발전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한국을 만들어 냈듯이.
이곳 학생들은 우리나라에서 대학생들이 유학을 오면 우리말을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같이 어울리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세계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한국으로 유학을 가는 학생들도 많고, 서울에 가면 선생님께 꼭 연락드리겠다며 약속하고 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작은 성취와 보람을 성공이라고 한다면 나는 해외취업에서 성공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6. 이야기를 맺으며

나의 해외취업 도전은 그야말로 장님 문고리 잡는 식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나름대로 내 의지의 산물로 보고 싶다. 그리고 그 의지를 지지해준 가족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족들의 만류로 중도하차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해외취업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첫째, 항상 눈과 귀를 세계를 향해 열어두라고 말하고 싶다. 나처럼 그냥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꿈꾸면서 그런 길을 찾아보던가 아니면 어떤 한 곳을(나라, 지역 등) 정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준비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해외로 진출하는 것이 좋다고 아무리 말해도 자신의 뜻이 없으면, 자신이 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교육을 받는다면 어떤 곳에서 교육받을지를 선택하는데 신중을 기하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해외취업에 적극적인지 인터넷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다. 교육을 시켜서 내보내기도 하고 이미 교육된 사람들을 파견하는 데에도 적극적이다. 노동부나 산업인력관리공단 같은 사이트에는 항상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일단 마음먹고 시작했으면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끝까지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자신이 이미 상당한 수준의 기술이나 특기를 교육받았다면 문제가 없지만, 국가에서 지원하는 해외취업을 위한 교육을 받는 경우에는 여러 가지로 제약이 있을 수 있다. 교육일수라던가 수업상태 같은 것을 점검할 때에는 성실하게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교육생으로서 의무사항이기도 하고 사회생활의 기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성인인데 그런 것을 이러쿵저러쿵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성인임에도 그렇게 성인답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서 나름대로 규율과 점검이 있는 것이다. 넷째, 취업을 할 때에는 적극적인 자세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외국어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는 자신의 외국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보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자신을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한국어교사를 구하는 경우에는 꼭 중국어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면접 같은 경우에도 학교 측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대처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족의 지원은 절대적이다. 결혼한 사람들 중에는 남편이 혼자 나와서 일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부인이 생활하기 힘들다고 계속 압력을 넣어서 귀국하는 사람도 있었다. 미혼인 경우에는 혼기가 찼다거나 결혼할 사람이 반대하는 경우에는 여기서 일하고 싶어도 그냥 귀국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았다. 나와 같은 경우도 남편의 절대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이런 일은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중국에서 한국어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중년의 여성이지만 이런 자리에 있기까지 알게 모르게 도움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보이지 않는 나의 고뇌 또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친정어머니께서 건강하셔서 우리 집을 돌보아 주는 것도 감사하고 아이들도 묵묵히 자신들의 할 바를 알아서 열심히 생활하는 것도 고맙고 동생과 제부도 나의 든든한 지원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내가 더욱 성숙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많은 경험과 다양한 활동으로 더욱 향상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적어 보았다. '한국산업인력공단 공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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