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십니까? 서경석 목사가 인사드립니다.
오늘로 단식일자가 15일이 되었습니다. 제가 무기한 단식을 하여 법무부에 많은 폐를 끼치게 된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진작에 만나 뵈올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고 했는데 기회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작 뵈웠더라면, 그래서 제가 조선족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오늘의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족 문제는 단지 법으로만 해결될 사안이 아니고 조선족의 상황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사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왜 단식을 하고 있는지를 장관님께 설명 드리고자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조선족 동포들은 일제시대에 국내에서 살 수 없어 만주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동포들끼리 모여 살면서 쌀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이들이 타향에 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조선족학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의 지원기지 역할을 했습니다.
8.15해방이 되고나서 이들은 고향에 오려고 했습니다. 당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동포들의 행렬은 장관이었다고 합니다. 흰옷을 입은 동포들의 행렬이 들판을 뒤덮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한 출신들은 3.8선 때문에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3.8선이 뚫릴 것을 기다리다 6.25전쟁이 나면서 결국 돌아올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선산에 뼈를 묻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고향을 그리며 살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많은 동포들이 묘자리를 만들지 않고 화장한 뼛가루를 낙동강과 두만강에 뿌렸습니다. 흘러 흘러 고향땅에 도달하기를 바라서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뼛가루를 철도 가에 뿌렸습니다. 혼백이라도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포들은 숨을 거둘 때 자식에게 너희들은 꼭 고향으로 돌아가 살라고 유언했습니다. 이 동포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KBS 단파방송인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였습니다. 동포들은 자정이 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 KBS 단파방송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다가 88올림픽이 TV에 방영되면서 고향땅이 크게 발전한 것을 보고 너무도 기뻐했습니다. 그동안에는 북한의 선전대로 남한은 깡통 찬 거지가 우굴거리는 곳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1992년 한중수교가 되었을 때 동포들은 고향에 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과 중국 양국은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터주지 않았습니다. 중국은 사람이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한국은 적성국가의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꼈고 또 노동시장이 교란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처음 열린 문이 산업연수생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부패가 심해 산업연수생으로 선발되려면 돈을 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7백만원, IMF경제위기 이후에는 천만원의 돈을 내고 입국했습니다. 왜 이렇게 고액의 돈을 쓰면서 기를 쓰고 한국에 오려고 했는가?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에 돈벌러 오는 것이 동포들에게는 돈 벌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중국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조선족 마을에 살면서 조선족 학교를 다녔고 중학교, 고등중학교까지도 조선족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중국어를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농 때문에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야 했는데 도시에서는 좋은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동포들은 주로 인문고등학교를 다녀 기술도 배우지 못했고 중국어도 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무기는 우리말을 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동포들은 기를 쓰고 한국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그리운 고향 땅을 밟아보는 것입니다. 동포들이 고향땅을 밟을 때 느끼는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동포는 고향땅을 밟으면서 땅에다 키스를 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을 점이 있습니다. 이들이 한국말만 하게 된 것은 부모의 민족의식이 투철하여 악착같이 자식이 우리말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고려인과 완전히 대비됩니다. 고려인은 일제시대에 연해주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1938년 10월 어느 날 갑자기 소련 정부는 고려인 지도자 3천명을 새벽에 불러내어 전원을 총살시켰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려인에게 3일내로 짐을 싸서 열차에 타라고 했습니다. 이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15만 명의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대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 1만5천명이 사망했습니다. 물이 나빠 배탈 나서 죽고, 얼어 죽고, 여자가 열차 밑에서 변을 보다 열차에 깔려 죽었습니다. 우리민족의 해외移住사의 최대의 비극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중앙아시아에 도착해서는 땅굴을 파고 들어가 겨울을 났습니다. 그리고 끈질기게 중앙아시아에서 살아남아 나중에는 원주민보다 더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우리말과 문화를 잃어버렸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민족 지도자들이 전부 총살당했기 때문에 지도자 없이 부평초처럼 살다 보니 민족의 문화와 언어를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날 조선족은 악착같이 한국에 들어오는데 왜 고려인은 그렇지 않나? 그 이유는 고려인은 우리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입국한 조선족들은 돈을 잘 벌지 못했습니다. 우선 한국에 올 때 진 빚 천만원을 갚아야 합니다. 천만원을 갚으려면 적어도 1년 반은 일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 남편과 떨어져 있는 것도 큰 문제였습니다. 아내도 남편도 다 바람이 납니다. 이렇게 되니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중국에 있는 자기 배우자를 한국에 오게 해서 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빚을 갚은 다음에는 다시 1년 반 동안 중국에 있는 배우자를 한국에 오게 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3년이 지납니다. 이러한 상황이니 3년의 체류기간이 지나도 절대로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번 돈이 하나도 없고 몸만 달랑 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더 벌기 위해 불법체류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동포들이 계속 불법체류를 한 중요한 이유입니다.
동포들은 불법체류자를 추방하려는 정부 조치가 있을 때마다 서울조선족교회 서경석 목사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습니다. 그리고는 왜 이 땅에 할아버지 산소도 있고, 사춘들도 이 땅에 살고 있는데 왜 나는 불법체류자로 살아야 합니까하며 절규했습니다. 이러한 절규들을 들으면서 한국인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들이 한국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이 점점 더 크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추방당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추방당할 때 빚을 다 갚았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추방은 지옥행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천만 원을 갚으려면 십년간 봉급을 몽땅 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빚이 많은 채로 추방당한 사람들은 가다가 자살을 했습니다. 인천에서 배를 탔는데 단동에 도착해 보니 짐은 있는데 사람은 없습니다. 바다에 빠져 자살한 것입니다. 또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이상이 되었고, 집안이 풍지박산 나며 이혼을 했고, 돈을 빌려준 중국인들로부터 몰매를 맞아 병신이 되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고향에 가지 못하고 중국 남쪽 지방을 떠돌며 가끔 집에 전화하여 아직도 한국에 있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그리고 가장 운이 좋은 사람들은 친척 돈을 다시 빌려 남의 주민등록증으로 한국에 재입국을 했습니다. 이 길만이 빚진 돈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추방당한 동포들은 한국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조상을 원망했습니다. 조상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중국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했습니다. 그리고는 내 자식만큼은 악착같이 중국말을 잘 하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자식을 조선족학교에서 한족학교로 옮깁니다. 가뜩이나 코리안 드림과 이농현상으로 조선족학교가 문을 닫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문닫는 현상이 더 가속화되었습니다. 지금은 동포들이 연변지역에서 위해, 청도, 천진, 상해, 북경 등지로 많이 이주합니다. 그곳에 한국기업이 들어서면서 그곳에 가야 취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 지역에 조선족학교가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포들이 자식을 한족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조선족학교에 보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조선족 말을 잃어버리면 이들은 漢族화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조선족은 중국에서 차별 당하지 않습니다. 56개 소수민족 중에서 제일 우수한 민족으로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중국인과 조선족 사이에 혼사가 있으면 중국인은 혼사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 중국인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만주에 수많은 소수민족이 있었지만 다 중국화되었습니다. 만주족, 여진족, 말갈족, 걸안족 등이 다 그러합니다. 그리고 지금 조선족이 마지막으로 漢族화의 단계를 밟고 있습니다. 내몽고의 몽고족, 티베트족도 마찬가지 운명입니다. 이대로 가면 20년 후에는 조선족의 삼분지 이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동포들이 제일 어려웠던 때는 2003년 늦가을, 한국정부가 동포들에게 4년반 동안 한국에 체류하는 것을 허용한 후에 이제는 중국으로 돌아가라고 말할 때였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한국정부에게 동포들이 적어도 5년은 한국에 있게 해달라고 호소하면서 단식투쟁을 했었습니다. 5년을 요구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동포들이 한국에 오는데 천만원씩 빚을 지고 왔으니 이 돈을 갚고 나서도 적어도 2천만원은 손에 쥐고 돌아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려면 3년으로는 안 되고 적어도 5년은 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는 제 말을 듣고 4년 반의 체류를 허용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포들에게 이제는 집에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집에 돌아가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왜 동포들이 집에 가려고 하지 않는가? 첫째는 동포들이 자기 배우자를 한국에 오게 하는데 천만원을 사용하면서 저축한 돈이 없는 것입니다. 몸만 달랑 한국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갈 수가 없습니다. 둘째는 중국에 돌아가 보았자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기술이 없기 때문에 중국에 가서는 고작 월 10만-15만원짜리 일자리 밖에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최소한 월 백만원을 받던 사람들이 그런 일자리에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돌아간 사람들이 대부분 빈둥빈둥 놀다가 저축한 돈을 거의 다 탕진하고는 다시 한국에 돈 벌러 오는 악순환을 되풀이 했습니다. 셋째로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사는 것이 익숙해지고 나니 중국에 돌아가서 사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때 참으로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들이 이제부터 불법체류를 할 터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동포들은 단지 체류기간을 연장해 달라는 주장을 넘어서서 “고향에 돌아와 살 권리”를 요구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저는 이들에게 고향에 돌아와 살 천부적 권리가 있으니 이들을 한국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불법체류자가 되기 하루 전날 이들 중 2천8백명을 11개의 교회에 분산, 수용시켜 단식농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주장은 정부가 조선족의 “고향에 돌아와 살 천부적 권리”를 인정하고 대책을 강구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법적으로 잘못된 말이 전혀 아닙니다. 이들은 1948년 입법의회가 통과시킨 “국적에 관한 조례”를 통해 우리 국민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 조례에 의하면 모든 조선인은 어느 나라에 가 있든지 우리 국민입니다. 그리고 이 조례는 1948년 8월 15일 건국 후에 대한민국의 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949년 10월 1일 중국이 창건되면서 중국에 체류하는 조선족들은 다시 중국공민이 됩니다. 이중국적자가 된 셈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이중국적을 해소하기 위해 국적선택권을 가져야 합니다. 북한출신 조선족은 1960년대에 중국과 북한과의 조약에 의해 중국사람이 되든지, 북한사람이 되든지, 북한국적을 가지고 중국에서 살든지 셋 중의 하나를 선택할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중국 조선족 중 ‘북조선국적을 가진 교포’(조교)가 생긴 이유도 이 조약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남아에서 살던 화교들도 중국정부가 동남아 각국과 조약을 맺어 동남아의 화교들이 중국으로 돌아가든지, 동남아에서 그 나라 국적을 취득해서 살든지, 아니면 동남아에서 살지만 중국국적을 갖든지 셋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또 중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경우에도 일본과 중국이 조약을 맺어 일본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중국인으로 살든지 마음대로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東北亞의 모든 해외 이주자들이 다 국적선택권을 누렸지만 남한 출신 조선족만이 이 권리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남한 출신 조선족에게도 반드시 국적선택권을 주어야 합니다. 본인이 희망하면 당연히 고향에 돌아와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족들은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이러한 조선족의 호소에 깊게 공감 했습니다. 국무조정실 최경수차관이 중심이 되어 이들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중국으로 돌아가면 1년 후에 재입국하도록 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많은 동포들이 이 약속은 실현될 수 없다며 응하지 않았지만 서울조선족교회 교인들은 이 약속을 믿고 중국으로 돌아갔고 1년 후에 재입국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후에도 두 번이나 중국에 돌아갔다가 1년 후에 재입국하는 정책이 반복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방문취업제가 도입되면서 방문취업제로 5년간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방문취업제가 조선족 동포들에게만 허용되었던 것은 조선족에게는 고향에 돌아와 살 권리가 있다는 암묵적인 공감대가 우리국민과 법무부 정책당국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 간 동포들은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지난 정권에서 법무부는 밀입국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입국한 사람들(위명여권 소지자)까지 구제해 주었습니다. 이들이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입국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정부가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동포들은 정말로 한국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동포들을 사랑해서 서울조선족교회까지 방문해 주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크게 감사해 했습니다. 한동안 법무부에서는 2010년까지 자유왕래, 자유거주, 자유취업을 허용한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앞으로 중국이 발전하면서 조선족이 한국에 오려는 바람도 줄어들 터인데 기왕이면 일찍 문을 활짝 열어 동포들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듣자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중수교이전에 온 동포들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서울조선족교회는 이들에게 국적을 주어야 한다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 결과 정부는 이들 중 합법적으로 입국했었던 동포들(수교전 입국자 전체의 약 50%)에게 국적을 주는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한중수교 이전에 입국할 때 합법적인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입국했던 동포들은 다시 행정소송을 냈습니다. 법무부는 이들이 불법체류 신분이지만 단속이 되어 보호소에 갇히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석방시켰습니다. 명분은 행정소송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만 이 말은 핑계이고 실제로는 이들처럼 오래 전에 입국한 사람들에게는 국적을 주는 것이 온당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정소송은 당연히 패소할 수밖에 없는 소송이었지만 법무부는 이를 구실로 이들이 체류할 수 있도록 봐준 것입니다. 그랬다가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가 이들에 대해 어떤 조처를 취할 것인가를 궁금해 했었는데 그만 새 정부는 준법을 내세워 이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한중수교이전에 온 동포들 중 입국 시에 서류가 적법했던 동포들은 국적을 취득했고 적법하지 못했던 동포들은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으며 지금에 와서는 추방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같이 17년 전에 와서 함께 불법체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한쪽은 국적을 얻었고, 다른 한쪽은 추방을 당합니다. 과연 이것이 法治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법으로 따져도 이들 중 자녀가 있는 사람은 H-2 비자를 주고 자녀가 없는 사람은 추방당해야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이번에 추방당해야 하는 한 부부는 자식낳기를 열심히 기다렸지만 자식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자식이 없는 것도 한스러운데 이 때문에 추방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법의 형평성을 잃은 것입니다.
또 법으로 따지면 재외동포법이 헌법에 맞게 되어야 합니다. 재외동포법이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으면 조선족에 대한 대우도 미주동포와 같이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다만 나라의 형편 때문에 그렇게 까지 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법으로만 따진다면 동포를 헌법정신에 맞게 대해야 합니다.
또 법으로만 따진다면 이제까지 법무부가 조선족동포에 대한 정책을 정할 때 동포포용정신에 입각해서 한 것부터 따져야 합니다. 왜 그동안 법무부가 법보다는 동포포용정신에 입각해서 정책을 실행해 왔나? 그 이유는 조선족의 문제는 법으로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국정부가 동포들의 ‘고향에 돌아와 살 권리’를 인정하고 여기에 입각하여 법을 만들었다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이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향에 돌아오려는 동포들은 편법까지 동원하면서 입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법체류의 책임을 동포들에게만 지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동포들을 받아들이지 못한 한국인의 좁은 마음을 탓해야 합니다. 이 점 때문에 법무부는 그동안 동포포용정신에 입각해서 정책을 집행한 것입니다.
한중수교 이전에 입국한 동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남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친척을 찾지 못한 사람, 친척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친척이 있는데도 초청장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국적취득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북한출신이라 합법적인 서류작성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분들을 절규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싶은데, 어떻게 북한으로 돌아가란 말입니까? 그곳은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한으로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라고. 저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남한, 북한이 다 고향입니다. 조선 전체가 고향이지 남한, 북한으로 구분하는 개념은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또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여 탈북동포들을 우리국민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면 한국에 친척이 있어야만 국적을 주는 제도는 대단히 흠결이 많은 제도입니다.
그런데 조선족 동포들의 문제를 다루면서 ‘고향에 돌아와 살 권리’만을 논할 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국가이익, 민족이익의 차원에서, 실용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점은 지금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漢族화의 흐름을 어떻게 막아내고 2백만 조선족 동포사회를 유지시킬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13억 중국시장에 의지해서 사업도 하고 물건도 팔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2백만 조선족이 너무도 필요합니다. 이들이 통역을 하면서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를 연결시켜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족학교가 거의 문을 닫고 있는 지금, 동포사회의 소멸을 막고 이들이 우리말을 유지하도록 하려면 가장 중요한 점은 이들이 최대한으로 한국을 왕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일정기간 체류하면서 돈도 벌고, 한국어도 배우고 민족의식도 키워야 합니다. 학교도 다니고 기술도 배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 조선족 동포에게 자유왕래, 자유취업, 자유거주를 허용하고 다시 중국에 돌아가 더 잘 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조선족은 중국에서 흩어져 살더라도 자식들을 일정기간 한국에 보내 중고등학교 혹은 대학교를 다니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포들이 한국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게 하려면 2백만 조선족 중에 30만 정도는 한국에서 터를 닦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들이 한국민과 조선족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하여 2백만 조선족 전체가 한국을 왕래하게 되고, 우리 말을 유지하게 됩니다.
앞으로의 조선족 정책은 중국 조선족 사회를 유지시키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 동안의 조선족 정책은 동포들을 한국에 못 들어오게 하고, 또 들어와서 불법체류하는 동포들을 내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조선족의 漢族化를 재촉할 뿐입니다. 앞으로는 조선족은 누구든 쉽게 한국에 들어오게 하고, 또 한국에 와서는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고 돈을 벌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국적 보다는 영주권을 주어 일정기간 후에 자유의사에 따라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영주권을 주면 이들은 더 많이 중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면 한국에 올 수 있기 때문에 악착같이 한국에 있으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은 한국경제에도 활로를 가져다 줍니다. 과거에는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겨냥해서 제조업이 중국에 진출했지만 앞으로는 중국의 소비시장을 겨냥해서 소비재 산업이 중국에 진출해야 합니다. 설렁탕, 곰탕, 비빔밥, 오리점 등 한국음식 뿐만 아니라 제과제빵 등 다양한 업종이 체인점을 만들어 중국에 진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체인점 진출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조선족입니다. 조선족을 사업파트너로 삼아 프렌차이즈 사업을 중국에 진출시켜야 한국경제가 크게 성장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조선족을 미래의 사업파트너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외국인노동자와 조선족을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조선족은 고향에 돌아와 살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외국인노동자가 필요할 때 우선적으로 조선족부터 써야 하고 나아가 이들의 定住를 허용해야 합니다. 한국은 지금 인구감소를 걱정합니다. 이 경우의 해결책역시 한국인의 출생률을 높이려고 애쓰는 것 보다는 조선족 동포의 漢族化를 막고 이들이 한국국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에는 일정기간 후에 반드시 귀국하게 하여 이들의 定住를 막아야 합니다. 외국인노동자가 한국에 定住하면 2-30년 후에 큰 화를 입을 수 있습니다. 외국인노동자 집단은 자기들끼리 게토를 형성하고 한국사회와 통합을 하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한국사람들이 이들을 차별합니다. 이점이 지금 프랑스, 영국, 독일과 같은 선진국이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민족은 너무 오랜동안 단일민족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들을 폭넓게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반면에 조선족은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사회통합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족에게 영주권을 주는 정책은 우리의 수용능력을 감안하여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한중수교 이전에 입국하여 이미 17년 동안 한국에 체류해 온 동포들부터 영주권을 주어야 합니다. 아직 그 단계도 아니라면 H-2비자라도 주어야 합니다. 정부가 조선족에게 온정적인 대책을 세운다면 제일 먼저 혜택을 받을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추방시키는 것은 다른 조선족에게도 온정적인 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조선족 정책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법과 질서를 지키자는 준법정책은 조선족 정책이 아닙니다. 우리의 궁금증은 노무현 정부의 동포포용정책을 이명박 정부가 과연 계승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조선족 정책은 없고 준법정책만 있다면 이것은 동포포용정책이 동포포기정책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동포포기정책은 지금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漢族화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정책은 국가이익, 민족이익, 실용주의 그 어느 것과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상식과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자기 동포를, 그것도 17년 동안 범법행위 없이 살아 온 동포를 불법체류자라고 추방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 조선족 동포들을 위해 10일간, 17일간, 23일간, 10일간, 18일간 도합 다섯 번의 단식투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단식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로 피하고 싶은 단식입니다.
존경하는 장관님, 벌써 단식 15일째가 되었습니다. 점점 더 몸이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습니다. 부디 저의 청을 받아들여 수교전 입국자 전원에게 H-2비자를 주시기를 호소합니다. 그냥 주기가 어렵다면 중국에 돌아갔다가 한 달 후에 사증발급인정서를 가지고 재입국하여 H-2비자를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눈물로써 호소합니다.
몸이 불편하여 이 글을 사흘에 걸쳐 완성하였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2008년 6월 2일
서경석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