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9일, 수교전 입국자 관련 법무부의 정책이 나오자 추방 위기에 놓인 ‘수교전 입국자’ 동포들은 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 모여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기자의 취재에 의하면, 그들은 거의가 삼십대 중반에 입국해서 17년간 체류하다보니 지금은 오십대 초반, 혹은 중반이 되었다. 그들은 거의가 중국에 삶의 기반이 없고, 귀국한다고 해도 새로 기반 닦을 능력과 힘도 없으며, 가정이 깨져 집에 반겨줄 사람이 없고, 죽도록 돈을 벌었지만 수중에 돈이 없고, 모국이 이미 제2의 고향이 되었기에 또다시 제3의 고향을 찾으라고 강박한다면 여기서 죽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편집자주]
“똥오줌 못 가리는 어머니 모시고 귀국하라고요?…”
신봉매는 1992년 2월 22일 입국해서, 줄곧 식당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왔다. 아버지는 일찍 병환으로 사망하였고, 어머니 안경희씨는 병환에 계셔 일을 할 수 없는데다가, 동생 둘이 공부를 하고 있었기에 모국에 남아 돈을 벌 수 밖에 없었다.
그후 동생들이 대학공부를 마치고 외국으로 유학 가게 되자 신봉매는 병환에 계시는 어머니를 친척방문 비자를 내서 한국에 모셔왔다. 신봉매의 외할머니는 귀화를 했기에 신봉매의 어머니도 간이귀화신청을 할 수 있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몸을 움직이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체류연장도 못하고 불법체류자가 되었고, 귀화신청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지금 신봉매어머니의 병세는 날로 심해져 딸자식도 못 알아보고 밥도 곁에서 한술 한술 떠 넣어드려야 하며 대소변도 일일이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다. 또, 경제가 여의치 않아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갈 형편도 못된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불법체류자라고 쫓아내려고 한다. 심봉매는 너무 억울하고 정부의 정책이 원망스럽다. 사람도 못 알아보는 어머니를 모시고 귀국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설사 어머니를 모시고 귀국한다고 해도 중국에서는 돈 벌 능력이 없기에 어머니부양과 치료를 해드릴 수 없다. 한국 땅에서 “17년을 불법하지 않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합법체류기회마지 주지 않는다면 정부는 우리 동포를 포기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그녀는 외치고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세금 내며 이웃과 화목하게 살고 싶어요!…”

입국해서 그녀는 식당, 함바집 다니고, 현장 매질도 하고, 서초부자마을에 가서 밥 짓고, 못한 일이 없다.
자식은 5명인데 딸 둘이 한국에 시집왔고, 고향에는 아들과 손자손녀들이 살고 있다. 맏아들은 서른아홉인데, “그리운 마음 자식 키워본 사람은 다 안다”고 한다. 한 시간도 마음 놓고 다닌 적이 없었다. 이웃과 말 못하고 살았다. 그저 웃기만 하고, 말투와 억양이 틀리다보니 교포이다, 탄로가 날까봐 입을 꾹 다물고 지냈다. 옆집에서는 벙어리인가 의심했단다. 때로 길가다 경찰을 보면 심장이 떨려 눈을 꼭 감고 한참 진정을 하고 지나간다고 했다. 그래서 오직 내 몸 사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일만 했다. 그만큼 일한 보람이 있어 좋았지만, 때로는 불법이란 그늘 속에 17년을 산 자신이 너무 억울하고 한심하게 생각됐다.
또, 안타까운 것은 영감이 임금체불을 당해 노임의 반도 못 받은 일이다. 한 번은 성남지방노동청에 가서 임금체불상담 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는데 직원이 영감이 불법체류자인 것을 알고 “경찰을 불러올까요?”하고 넌지시 묻더라고 했다. 그녀는 너무 분해 “고소할 테면 고소해요, 그 돈은 없는 사람들한테 주더라도 꼭 받겠어요!”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결국 체불임금 480만원에서 120만밖에 못 받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임금체불 수없이 당했다. 영감은 현재 나이 일흔이지만 외벽을 타고 드라이비트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도 이제는 예순셋이 되었다.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일터에 파묻혀 죽은 듯이 돈만 바라보고 살아왔었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올라오니까 가라고 하네요. 노무현 대통령 때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편지를 써서 보냈더니 회답까지 보내주셨는데, 이대통령은 올라오더니 몰인정하게 동포들을 딱 잘라버리네요. 외국인 취급을 해요!”하고 원망을 터뜨린다.
또, “이북사람과 고려 사람들은 돈도 주고 집도 주고 살라더니 우리는 그냥 자기 힘으로 벌어먹고 살자는데 왜 추방이냐?”하고 반문한다.
그녀에게는 하나의 소원이 있다. “더도 말고 들도 말고 세금도 내고 성금도 내면서 이웃과 마음 놓고 잘 살아보고 싶다”고 한다.
현재 그녀는 이곳에 전세를 잡아놓고 살림살이 다 꾸려놓고 고향처럼 살고 있다.
(후에 알고 보니, 그녀는 1949년 10월 1일 전에 태어난 관계로 구제대상에 해당되어 H-2비자를 발급받았다. 그러나 같은 ‘수교전 입국자’로서 친척이 없다고, 혹은 이런저런 여건이 부족하다고 추방당하는 동포들이 억울해서 농성에 함께 참가했다고 심경을 밝혔다.)
“노무현대통령시절에는 영주권을 준다고 했는데…”
고향이 중국 하얼빈이고 올해 마흔 일곱인 전영란은 1991년 5월에 입국했다. 시집친척의 초청으로 아저씨와 같이 나왔으나 아저씨는 회사일 때문에 먼저 귀국했다. 4년 전에 남편은 간경화로 돌아갔다. 그래서 시집 친척들이 그녀의 국적신청이나 체류연장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법무부에서는 허락을 안 해주었다. 수교전 입국자들은 적어도 17년 동안 한국에 나와서 살았는데, 그리고 법을 범한 것도 아닌데, 어떤 동포는 되고 어떤 동포는 안 된다고 하니 정책이 너무 잘못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제껏 남아 불법체류로 산 동포들은 심성이 다 어질고 생활상의 이런저런 사정으로 마지못해 고국에 머문 동포라고 했다.
“아마 기본으로 심장병은 다 있을 걸요? 저도 구심환(救心丸)은 집에서 부쳐 와 매일 먹고 있어요.”하고 버릇처럼 손을 심장에 가져다 댄다.
7살 때부터 외할머니네 집에서 자란 딸애는 이제 24살의 처녀가 됐다. 저녁이면 딸애와 매일 통화를 한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빨리 들어오란다. 그러나, 그녀는 가고 싶어도 못 간다. 있을 곳이 마땅치 않다. 주민등록증 마지막 신청일이 2008년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모국에서 17년을 살았으니 다른 선진국에서는 영주권을 주거나 합법체류자격을 준다고 해서, 또 노무현대통령시절에는 정책을 완해해서 영주권준다고 했는데, 설마 설마해서 지금까지 기다렸더니 이게 왼 날벼락이지요?!”하고 한숨을 쉰다.
“엄마도 오빠도 죽는 것 못보고 살아왔는데…그걸 포기 하라구요?”
“대한민국이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 인생을 글로 쓰면 정말 한권의 소설책이 될 겁니다.”하고 개탄하는 강연춘은 고향이 중국 하얼빈이고 올해 쉰세 살이다.
남한의 친척들과 연락이 없다보니 한국에 갈 기회가 없었다. 수교 전에는 남조선에 친척이 있다고 하면 중국에서는 남조선 특무가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다보니 시아버지는 자식들에게 3촌 이름도 안 알려주고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갔다. 그래도 남조선은 우리 조상들이 사는 나라이기에 가보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1991년도 2월, 무역회사에 다니던 그녀는 남한에서 온 이문기란 분의 초청으로 입국하였다. 그녀는 친척을 찾으려고 2년 동안 KBS방송국에 편지를 쓰고 사처로 수소문을 하고 시아버지가 살던 고향의 지방경찰서에 의뢰도 했었지만, 종무소식이었다. “친척을 못 찾았으니 더는 입국할 것 같지 못해 그냥 쭉 두 발 뻗고 있었지요”하고 당돌히 말한다. 2005년과 2006년 자진귀국이 있었으나, 이미 15년 세월을 한국에서 보냈으니 한국정부는 다른 선진국들처럼 수교전입국자들에게는 영주권은 못주더라도 합법체류는 보장해주리라 굳게 믿었다고 한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솔직히 가슴 졸이며 제일 착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17년을 살았으니 이제 돌아가서 무얼 어떻게 하겠습니까?”하고 하소연한다.
그녀는 가족드라마를 보기 즐긴다. 차를 몰고 손을 잡고 다니는 가족들과 가족 간의 사랑을 보면 어느덧 가슴이 뭉클해난다. 이 세상 사람들은 다 똑은 삶의 자격을 갖고 태어났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완전한 가족의 사랑을 느끼며 살 수가 있고, 어떤 사람은 이토록 모질게 간장 졸이면서 불법이란 딱지 때문에 가족을 외면한 채 숨어살아야 하는가?…17년 동안 그녀를 학수고대하면서 병환을 참고 견디던 그녀의 어머니도 이태 전에 마침내 숨을 놓고 말았었다. 형제가 죽는 것 못보고, 참담한 심정으로 살아왔었다. 영주권이 무엇인지? 고국이 무엇이고 대한민국이 뭔지?…그래도 그것에 매달려 인생을 살아왔는데,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