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독립가의 운명(연재 4) 조선독립선봉대
상태바
세독립가의 운명(연재 4) 조선독립선봉대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8.06.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류연산의 장편인물전기>

아침에 부산을 떠난 신경 행 열차는 늦은 저녁때에 안동에 도착했다. 밤 내내 다시 만주의 광야를 달려 봉천을 경과한 열차는 이튿날 오전에 신경에 도착했다. 부산을 떠나서 꼭 이박 이일의 기차의 노정이고 거기에 바다에서의 하루 밤 뱃길까지 합하면 사흘 낮이었다. 신경 역 부근 식당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그는 곧장 구태현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공교롭게도 차에서 구태농장(九台農場) 주임 유화춘을 만났다. 박재호가 경찰서에 있을 때 술에 취해 자위단한테 걸린 것을 시비를 해주었던 바로 그 주임이었다. 구태농장이란 구태현성 시교에 있는 지금의 신립촌(新立村)이다. 경영자는 조선인 박태진(朴泰鎭)이었고 초대 농장 이사로 윤은주(尹殷柱)였고 유화춘은 후임이었다.

박재호네도 바로 그 농장에서 소작을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화춘은 그의 집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한테서 박재호는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아버지가 거짓말을 꾸미어 아들을 부른 것임을 깨달았다.

동경을 떠나기 전부터 어머님의 병환회복만을 빌어 왔던 그로서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중도 낭패를 보게 된 것이 못내 아쉽기도 했다.

그 날 밤 박씨네 집은 경사가 났다. 오랜만에 부모님을 모시고 백형네 식구와 둘째 형수와 질녀 춘자(春子)며 밤늦게까지 오순도순 이야기를 했다. 나라도 남의 나라이고 마을도 남의 마을이고 또 초가삼간도 세로 든 남의 집이었지만 그들 부모형제의 정만은 남의 것이 아니었다.

이튿날 박재호는 <<악마(惡魔)의 세상에서 할 일>>을 찾으려고 했다. 그래서 부모님을 안위(安慰)하고 나서 관내(關內: 산해관 이남 중국 내지)로 가서 항일진영(抗日陣營)을 찾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집을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사정도 못되었다. 충효는 일치(忠孝一致)하다고 했으니 구태에서도 충분히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스스로 자신을 달랬다.

그는 오라지 않아 1942년 10월 10일 구태가공소(九台街公所)의 조선인 고원(雇員)으로 취직했다. 민적(民籍), 배급(配給) 등 선계(鮮系)의 일체 사무를 취급했다. 월급은 64원, 대우는 그런 대로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의 직권을 이용하여 자기의 호적부터 다시 등기했다. 누가 한 일인지는 몰라도 그의 집 호적등분에는 정목(井木)이라는 일본화 창씨가 되어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체증에 걸린 사람처럼 마음이 불편하였다. 그러던 차 1939년 신경(長春) 일본대사관에서 누적자(漏籍者) 취적(就籍)을 하러 온 기회를 빌어서 창씨를 버리고 원래의 박씨 성으로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원 호적에는 경상북도 영양군 수비면 오기동 3계리 박형환(英陽郡首比面五基洞三溪里 朴亨煥)이였는데 새로운 호적에는 서울 중구 재동 일가 십번지 호주 박형환으로 고쳤다. 그리고 재호(在虎)로 등기되어 있었던 자기의 이름마저도 재로(在浩)라고 했고 지금도 그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재호(在虎)와 재호(在浩)는 한자만 다를 뿐 우리말 표기로는 변할 바가 없었다. 그러나 재호(在虎)는 범이 있다는 뜻으로 용맹한 사나이를 지칭한다고 하면 재호(在浩)는 크고 광대하고 넓은 뜻으로 당시 포부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1944년 12월 13일에 스스로 지은 호(號)를 뇌묘(磊?)라고 했던 것이다. 뇌(磊)는 솔직하고 당당하고 공명정대하다는 뜻이고 묘(?)는 아득하게 넓다는 뜻으로 그 이름 재호(在浩)의 전개라고 할 수 있으리라. 광복 후 그는 또 호를 의식(義植)이라고 적기도 한다. 뜻을 심는다는 것이다.

그가 자기의 이름이며 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정의와 진리에 대한 무한한 추구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일기에서 <<아직도 고애(苦哀) 중임에 처음부터 고안(考案)하던 정(正)과 의(義)를 또는 진리(眞理)를 찾노라 헤매는 중에 적는다. >>라고 했다. 식물을 심듯이 뜻을 마음에 심으로써 그 목적을 위해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는 가공소에서 기획계(企劃系) 계장이 되기도 했다. 그만치 맡은 바 일에 차실 없이 잘 했다는 말도 된다. 일제의 기관에서 일을 착실히 했다면 일제의 주구노릇을 잘했다는 것과 같다고 하리라. 물론 그것에 대해 그 본인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맡은 일은 조선인 거주민에 대한 호적과 배급이므로 민족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는 민적사무에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일반에 편리를 주었고 배급사무에서도 배급방침을 떠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거민한테 편리를 주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가능한 한에서 정의와 진리를 위한 양심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유치할 정도로 소극적인 것이면서도 가상한 것이라고 하겠다. 일단 거주민이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할 때면 양식통장을 바치고 이주지에 가서 새로운 양식통장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박재호는 조선인들이 이주하게 되면 양식통장을 배급 량을 더 탈 수 있도록 한 달 뒤에 바치게 했다. 그리고 숙직을 서는 날이면 기계기름 원료로 공출한 피마주를 대량 아궁이에 넣어 불사르기도 했다. 그리고 징병에 걸린 박용덕(朴榕德)을 빼돌리고 영신농장(永信農場)에 민족주의자가 있다고 하는 권모(權某)의 고발을 묵살해버리기도 했다.

1943년 3월 1일부터 가공소에서 경제계(經濟系) 사무를 전임하는 한편 협화회 상무, 신문지국 경영과 남산 학교 만어(滿語)강사를 겸하였다. 총 수입은 약 200원이었다.

바로 그러한 때에 동창 최성순이가 일본에서 돌아왔다. 최성순과의 만남은 박재호에 있어서 재기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최성순을 통해 박소진은 만몽학교를 졸업하고 북평(北平 현재의 북경)으로 갔다는 것을 알았다. 북지라고 하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피가 끓어오르는 고장이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항일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쉽게 항일세력에 합류할 수 있는 것이다.

최성순은 박재호가 돌아온 다음 해에 만몽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1943년에 결혼하고 공부를 계속하려고 하니 돈 근심이 태산같았다. 운송배달로는 둘의 입을 달래고 공부까지 하기에는 턱 부족이었다. 그런데다가 동경이 공습을 받기 시작했고 징용이요 학도병이요 하는 통에 학교가 뒤숭숭해졌다. 그리하여 1944년 1월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아내를 데리고 만주 길림성 영길현 우라가로 돌아왔다.

박재호는 자기가 만주어강사를 맡고 있는 구태 남산국민우급학교(九台南山國民優級學校)에 소개하였다. 그때로부터 최성순은 교원으로 있으면서 박재호의 지기로 되었다.

그는 최성순에게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의 교육자의 탈을 쓴 한심한 선생들의 작태에 대해 분노하여 비판하였다. 그는 노화교육에 맞서서 조선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했고 최남선의 <<고사통(故事通)>>을 서울에서 주문하여서 교재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참된 교육의 취지는 인생이 무엇이며 미래가 무엇인가를 알고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다.

1944년 11월에 북경에서 박소진이가 교하(蛟河)에 있는 부모를 만나러 가는 걸음에 구태에 들러 박재호를 찾아왔다. 공개적인 신분은 왕정위의 괴뢰 중화민국 하북성 삼하현(河北省三河縣) 경찰국 독찰원(警察局督察員)이었지만 비밀적인 신분은 조선독립선봉대(朝鮮獨立先鋒隊) 총대장이었다.

박재호가 떠나고 최성순이가 떠난 다음 동경에 남았던 박소진은 우연한 기회에 곽지원이라고 하는 사람을 사귀게 되었다. 그는 중국 국민당 대일공작특파원이였다. 그의 소개로 하북성 삼하현으로 가서 국민당 삼하현 당위원 맹지영을 만났고 박소진은 국민당 중앙조직부 북경 주재 연락원 및 부연락원으로 임명받았다. 1944년 2월 박소진은 북경에서 국민당 정식 당원으로 되었고 국민당 중앙조직부 선무공작위원회 산하의 새로운 조직인 조선독립선봉대 총대장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조선독립선봉대란 적지에서 지하공작으로 조직되는 부대였다. 그러므로 총대장이 적당한 인물을 지대장에 임명하고 그 지대장이 지혜롭게 지대원을 확장하도록 되어 있었다. 박소진은 황재식, 천지성(泉志成 서울 출생, 신경법정대학 시 일본인 학생구타사건으로 중퇴), 이맹덕(李孟德 만주출신), 홍본영(洪本營 만주출신), 김병선(金炳善 신의주 출신 일본군 탁현주둔 복영(福永) 대대 통역) 등과 선봉대 총지휘본부를 구성하고 대일본군정정부수집대화평(평화군이라고도 함)군 선무포섭공작 교포애국청년 포섭공작 등을 목표로 정하였다.

그 번 그의 만주행은 겉으로는 친지방문이었지만 속마음은 선봉대 확장에 있었다. 그는 대상자로 발재호와 최성순을 꼽았던 것이다.

최성순은 자기의 자서전에서 당시 박소진과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썼다.

1944년 11월에 북경에 있는 박소진이 교하 자기 부모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구태에 내려 나와 박재호를 찾았다. 당시 그는 빈궁한 나의 생활을 보고 위페 천원(僞幣千元 위만주국 돈)을 주며 생활에 쓰라는 것이었다. 비록 죽마고우라 하지만 이처럼 돕는데 대하여 나는 감격했다. 그가 떠날 때 구태역전 주점에서 나와 재호를 보고 <<앞으로 우리는 기어 올라(높은 직무를 말함) 일본놈의 정황을 잘 장악하므로써 우리의 공개적 활동에 유리한 조건을 창조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박재호는 1945년 봄에 경찰에 복귀했고 경위보급(警衛褓級)으로 구태경찰과 직할(直轄)파출소 대리소장(代理所長)을 담당했다.

박재호는 자신이 경찰에 복직을 한 이유에 대해 반일활동에 경찰직이 유리하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가공소에서는 조선인의 호적이나 양식배급이나 가공소의 인사나 민가의 문패 설치 등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경찰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 상 편리했다는 것이다. 그런 것으로 미루어서 그는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 경찰에 취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 같다. 그리고 원래부터 북지(北支)로 갈 마음으로 가슴을 불태웠던 박재호는 조국광복의 마음가짐이 더욱 강렬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1945년 7월 박소진은 두 번째 만주행에 올랐다.

모든 것이 안정된후 한방이는 고원씨와 상의하여 선봉대확장차 두 번째로 만주행을 결심했다.---(통료에서 만난)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한방이는 바지깃 속에 꿰매고 다니던 <<朴韓邦을 朝鮮獨立先鋒隊總隊長에 任命함>>이란 사령장(辭令狀)을 꺼내서 묵묵히 건네주었다.

재호는 한참 동안 정신없이 그 사령장을 보고 또 보더니 ---이 박한방이란 사람이 누구지 하고 물었다.

<<한방이란 이름은 나의 비밀공작을 위한 가명일세. ---만약 자네가 나를 체포하면 적어도 두 계급은 특진하고 상금도 많이 받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나의 동지가 되어 주는 길밖에 없네.>>

라고 한방이가 말하자 재호는

<<이 사람아, 내가 자네를 체포해서 왜놈들의 영화를 누릴 사람으로 생각하고 나를 오라고 하였나? 예끼, 실없는 친구.>>

하며 정말 기뻐하는 기색이 완연하였다.

---두 친구는 말없이 잠시동안 마주 쳐다보며 울다가 한방이가

<<백만 대군을 얻는 것보다 나에게는 자네를 동지로 맞이하게 된 것이 더욱 소중하네.>>

하고 ---한방이는 우선 재호가 경찰직에 있으면서 일본을 돕는다는 구실을 내세워서 교포 청년들의 모임을 만들고 시기적절할 때 삼삼제, 낙하산식 포섭방법(三三制落下傘式包攝方法: 한 사람이 세명 이상 포섭하지 않으며 한 사람에게 포섭된 세 사람은 서로 모르게 한다는 것으로 횡적으로는 절대로 연관이 없도록 하는 극비 조직확대 방법)으로 포섭해서 움직이지 말고 시기를 기다렸다가 북지쪽에서 선봉대가 밀고 들어오면 합세하여 조국을 위해서 싸우자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재호를 조선독립선봉대 제1지대장에 임명하고 미리 준비했던 선봉대 총대장 직인이 찍힌 명주천에 박상길(朴尙吉)이라고 적어 주었다.

이것은 만일 탄로가 나도 줏었다고 해명하면 위기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만몽전문학교 일년 후배가 된 최성렬(최성순)이를 하구대현에 있는 보통하교 교원직을 그만두고 통료로 보내면 취직시켜서 통료 근방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학도병을 상대로 지하공작을 벌이도록 하는 문제를 재호와 협의하고 재호가 돌아간지 일주일만에 성렬이가 한방이를 찾아왔다.---이리하여 한방이는 계획대로 제2지대장에 최성렬이를 임명하고 공작요령을 가르쳐준 후에 북경으로 돌아왔다.(제208-212폐지)

최성순은 그 번의 일을 이렇게 썼다.

(1945년) 7월의 어느 날 밤에 소진은 재호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오라지 않아 북에서 소련군이 진출하고 남에서 중국 군이 진출하게 된다. 그러면 동북의 명맥인 대호산(大虎山), 사평(四平), 봉천 등지에서 격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만주 1886부대의 조선인 제2후보생을 장악하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총구를 돌려야 한다.(槍口向後轉)>>

동시에 그는 자기의 옷섶에서 국민당 당증인지 무엇인지 명주천에 먹 글자를 쓰고 관인을 박은 증건을 보여주었다.

그 해 7월 16일 나는 박소진의 소개로 만주 1886부대 군속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박재호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썼다.

박소진은 북경에서 중국 국민당 지하에 연계맺고 입당하여 <<조선독립선봉대>>를 조직하던 중 몽골 통료에 와서 나와 동창동지 최성순을 찾아서 (그의 자형 권오상씨도) 극비밀회의를 했다.(이것이 1945년 7월 중순) 미구에 연합군이 총공격을 할 데 대비하여 각기 최선을 다해 준비하였다가 일단 통지가 있으면 심양에서 합류하여 조국해방을 위한 무장진군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 번 만남이 있은 후 박소진은 북경으로 돌아가고 최성순은 통료에 남았다. 그리고 구태로 돌아온 박재호는 비밀리에 동지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만 간에 일제는 꼭 멸망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날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일제가 최후발악으로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신했다.

그는 승리의 신심에 부푼 마음을 안고 비밀리에 항일무장단체를 만들었다. 바로 조선독립선봉대 제1지대였다. 그 성원들은 아래와 같다.

양재룡(梁在龍) 현공서 토목고장(土木股長)

김덕량(金德梁) 현공서 총무과

최중렬(崔重烈) 현공서 연무고(煙務股)

백순흠(白順欽) 현공서 인사고

마(장각천 馬長各川) 현공서 농업고

윤기준(尹基俊) 현공서

김자길남(金子吉男) 현공서 특무고 감독경위(特務股監督警尉)

진고륜(陳孤?) 현공서 특무고 감독경위

김임출(金任出) 현공서 사법고 평경부(司法股平警付)

계승수(桂承秀) 현공서 보안고(保安股) 평경부

김월서(金越瑞) 현공서 보안고 평경부

임영순(任榮淳) 현공서 병사실(兵士室) 평경부

이지방(李志芳) 현공서

신농(神農) 구태가공소

남상진(南相鎭) 협화회 보도부(協和會輔導部) 만선일보지국

최영화(崔泳華) 司法代書

양조희(梁朝熙), 장용림(張用霖), 차건(車健), 이희동(李熙?), 김원경(金元經), 박재복(朴在福) 이들은 쌀가공업을 하는 구성공사(九盛公司)에 근무했다.

박재호는 또 남산학교. 흥농합작사(興農合作社), 여관(旅館), 음식점, 세탁소 등에도 동지들이 있었다고 하면서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손을 쓸 새도 없이 광복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다.

(다음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