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소개소에 가면 우리 동포아줌씨들이 줄느런히 앉아 있다. 서로의 흔한 인사말은 "팔렸슈? 안 팔렸슈?" 이다. 일을 찾으면 팔렸다고 한다.
99년에 입국해서 일복이 터진 덕분에 나는 요리, 빨래, 청소, 다리미, 애기보기 등 가사에서 오래전부터 베테랑이라 자처했다. 아Q정신세계도 가진지라 가정부일은 나에게 있어서 대포로 참새를 잡는 격이라 혼자 가끔 웅얼대기도 했다.
기회가 오면 가정부에서 탈출하리라 꿈꾸면서 차별화된 상품으로 되고, 레벨 좀 높이려고 타임과 머니를 적잖게 투자했다. 아니, 현실을 살아가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기본(컴, 운전, 영어)을 구비하려 애 좀 썼다.
입국한 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글자로 씌여진 건 눈에 보이면 다 읽어 보았고, 무슨 소리이던지 귀에 들리면 전부 애써 듣고 기억하려 했다.
중국의 운전면허증이 있지만 필기시험만 보고 딸 수 있는 국제면허증은 눈에 차질 않아서 아예 한국면허증을 따냈다.
2001년 2월엔 부랴부랴 일을 마치곤 조선족교회에서 밤 열시부터 열두시까지 컴퓨터를 배우고, 밤 열두시부터 새벽 두 세시 까지 영어공부를 했다. 그후 OA과정을 수료하여 예쁜 홈페이지도 만들었지만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아서 다시 7개월간 낮엔 일하고 밤엔 IT학원에서 웹디자인도 알아갔다.
주위에서 국제어인 영어를 배우는, 우리 나많은 가정부아줌마들을 이상한 눈길로 질문하면 "코큰 영감한테 시집가기 위해서"라고 어물쩍 넘겨 버렸지만 사실 까막눈이 되고 싶질 않아서 기회가 있으면 잉글리쉬(한국식영어)를 붙잡았다. 비록 곰이 옥수수 따는 식이 되어서 온 밭을 다 따도 마지막 한 이삭 밖에 안 남는 격이 되지만.
인생의 학문은 쌓되 마음에서만은 나를 비우고 싶었다. 세례증도 받고, 성경단기강습수료증도 받고 중국에 돌아가서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1:1로 성경도 배웠다.
뼛속, 핏속으로부터 한민족인데다, 오랜 체류로 한국문회에 "완전"적응이 됐고, 나름대로 한국에 대해 내 주견도 가지고 있는 정도니 "용문에 뛰어 오를 잉어"의 조건이 구비 됐다고 생각했다.
중앙일보에서 노인복지사를 취득하면 노인전문복지시설, 실버타운, 실버산업관련단체에서 취업이 가능하다는 광고를 보고 장원을 목적으로 3월 16일에 시험을 보았다. 그런데 자격증을 교부 받은 후에야 요양보호사만이 취업보증수표인 것을 알았다.
일단 복지사자격증이 있으면 10여만 원을 추가하고 며칠교육만 받으면 요양보호사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기에 응시하려고 하니 외국인이기에 자격이 없단다. "잡새는 죽었다 깨도 장꿩은커녕 까투리도 될 수 없구나."
힘 빠진 어깨를 부여잡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었다. 사회의 약자인 노인들에게 만에 하나 피해가 가는 걸 예방하는 차원에서 그럴 수밖에 없겠지.
한계를 느끼면서도 8년×24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접어지질 않는다. 시간제로 일하고 싶다.
노인들의 부지런한 손발이 되고 싶다. 필요하면 내 장점을 살려 중국어도 가르치고, 영어도, 컴도 함께 하고, 드라이브 봉사도 해 드리고, 끝없을 인생 이야기도 나누고…
심신이 건강하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복덩이 아줌마가 있는데 어느 누가 사지 않으실래유?!
아니, 팔리지 않아도 별 대수가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막차의 뒷장만 바라보면서 넘쳐나는 의욕과 에너지를 쏟을 길이 없어도 그래도 오늘을 살 수 있음으로 감사가 넘친다.
한 가지 희망사항이 있다면 내 마음에 하루에도 수없이 솟구치는 걷잡을 수 없는 배우려는 욕망을 젊은 동포 분들이 모두 사 갔으면 하는 것이다. 0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