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왕을 뽑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무들은 나름대로 멋진 차림으로 와서 서로 뽐내 보였습니다. 누구라도 왕이 될 만한 모습이었습니다.
드디어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천 년을 산 주목(朱木)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왕은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가운데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이를 왕으로 뽑아야 합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반대를 하였습니다. 힘도 없는 늙은이가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나무가 ‘주목은 죽어서도 천 년을 산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키가 훤칠한 전나무가 나서며 말했습니다.
“왕은 무엇보다도 몸집이 좋고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부터 생김새가 첫째이고, 말과 글을 잘 하고 판단 잘 하는 것은 그 다음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전나무는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쭉 뻗은 늘씬한 몸매를 과시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미루나무가 말했습니다.
“생김새만 근사하면 무엇합니까? 바람기나 많겠지요. 차라리 나처럼 깨끗한 나무라면 몰라도.”
이 말에 모두들 한 바탕 웃었습니다.
이번에는 대나무[竹]가 말을 했습니다.
“왕은 마음이 곧고 굳세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고 일을 바르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오동나무[梧桐]가 반대했습니다.
“겉만 곧으면 무엇합니까? 속은 텅 비었는데”
이 소리에 다시 한 바탕 웃음판이 벌어졌습니다. 대나무는 오동나무더러 ‘너는 속이 안 비었느냐’고 쏘아붙였습니다.
헛기침을 하던 백양나무[白楊]가 점잖게 말했습니다.
“심지가 곧은 것은 좋지만, 잘못 고집불통이 될 수도 있지요. 오히려 독재를 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옳습니다. 저렇게 점잖고 잘 생긴 백양나무를 우리의 왕으로 모십시다.”
백양나무에게 반한 싸리나무가 곧바로 지지를 했습니다.
“아유, 살결도 고와라. 마음씨는 또 얼마나 고우실까?”
이를 본 다른 나무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왕이 너무 잘 생기고 예쁘면 타락하기가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왕이 되어야겠습니다. 나는 온 몸에 가시가 있어서 아무도 쉽게 접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타락할 염려는 없을 것이오.”
이 말에 모두들 가시나무를 바라보며 웃었습니다. 가시나무는 무안해서 몸을 웅크리고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면 가장 수효가 많은 나무로 왕을 삼읍시다. 그것이 가장 민주적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참나무가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수효가 적은 나무들이 반대했습니다. 수가 많다고 우수한 것은 아니고, 수는 적어도 똑똑하면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벚나무들이 제안을 했습니다.
“서로 뭉쳐서 모여 사는 나무를 왕으로 합시다. 무엇보다도 단결, 단결이 최상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자신들은 모여서 살며, 꽃도 일시에 함께 피운다고 화합과 단결력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습니다. 살구나무와 복숭아나무들이 이에 찬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대 발언도 나왔습니다. 너무 자기들만 생각하는 파당성(派黨性)이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의견은 더 나왔지만 합의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한 나무가 제안을 하면 다른 나무가 반대하고, 한 가지 의견이 나오면 그 문제점을 시비하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시간은 흘러도 왕을 뽑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한 나무가 새로운 제안을 하였습니다.
“서로 왕을 하겠다면 뽑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人間)에게 의견을 물어 봅시다. 인간은 지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동물이니까요.”
이 말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인간보다 더 지혜로운 존재가 세상에 없는 줄은 다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무들은 인간의 조언을 받아서 왕을 뽑자고 합의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무들은 인간을 찾아갔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인간은 빙긋이 웃으면서 몇몇 후보를 내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면 그 중에서 정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너도나도 후보를 추천했습니다. 어떤 나무는 자신이 후보가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후보가 난립하자 ‘그런 나무라면 나도 추천하겠다’ 하고 자꾸 추천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후보의 자격부터 논의하자, 후보의 수를 정하고 하자, 희망자는 모두 후보로 해야 된다, 추천의 기준은 무엇이냐는 등 갖가지 의견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제는 왕을 정해 달라는 것이 아니고 조언만 듣자고 온 사실을 나무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만 자신이 또는 자기가 좋아하는 나무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인간이 화가 난 듯이 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싸우기만 하면 내가 정해 버리겠다1
이 말을 들은 나무들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정말로 왕을 사람이 정할까? 그렇다면 누구를 시킬 것인가? 이미 어떤 나무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별별 생각을 다 하면서 나무들은 인간의 눈치만을 살폈습니다.
분위기가 잠잠해지자 인간은 인심이나 쓴다는 듯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너희들이 내게 부탁했으니 왕은 내가 정해도 된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의견을 최대로 존중하겠다. 그러니 무엇을 기준으로 정하면 좋을지 그 기준을 말해라.”
이 말에 나무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습니다. 나무의 왕은 사람이 정하겠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무들로서는 이제 어쩔 수가 없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이때, 시세(時勢)에 민감한 한 나무가 이렇게 제안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왕을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니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나무를 뽑는 것이 좋겠습니다.”
약삭빠른 나무들이 이에 찬동을 했습니다. 반대하거나 따르고 싶지 않은 나무들도 인간에게 내놓고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왕을 시켜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인간에게 밉보일까 하는 것이 더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정권을 쥔 인간은 이 말에 흐뭇하게 여기면서, 그래도 너그러운 듯이 부드럽게 말을 했습니다.
“아무 거리낄 것 없이 말하라. 어떤 나무가 인간에게 가장 유용한 나무인가? 스스로 나서도 좋고 누구를 추천해도 좋다.”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나무가 나무들의 왕을 뽑는 기준임을 공포한 셈입니다. 그러나, 나무들은 그 부드러운 말소리에 그런 것을 따져 볼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나무가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것인가 하는 것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과일나무가 나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어니무어니 해도 맛있는 과일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열매를 만들어 인간들은 물론 많은 생물들이 먹고살게 하지요. 그러니 과일나무 중에서 왕을 정하시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이 말에 여기저기서 ‘맞아요, 맞아요’ 하는 소리가 나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들도 보였습니다. 먹음직한 열매를 맺는 나무들은 모두 찬성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쪽 구석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아닙니다. 약효가 좋은 나무라야 합니다. 맛좋은 음식이면 무엇합니까? 탈이 나거나 병들었을 때 낫게 해 주는 것이 최상이지요.”
이 소리에 옻나무며 엄나무들이 ‘옳소, 옳소’ 하고 외쳤습니다. 그런 속에서 관상수들이 나섰습니다.
“인간들은 주로 곡식과 채소로 살고 있으니 과일이 중요할 것이 없으며, 약 또한 항상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까이 모시며 철철이 모습을 아름답게 꾸며 보기 좋게 하는 우리들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꽃나무들이 즉시 들고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꿀을 만들며, 향내를 풍기고 열매까지 맺는 우리들이 왕으로서는 가장 마땅할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맞습니다, 옳습니다’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모두 찬성을 했습니다. 꽃나무라면 자기네 편이고, 또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나무가 왕이 되면 적어도 못된 정치를 하는 폭군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바에는 우리들을 왕으로 뽑아 주십시오. 우리는 키가 크고 맵시도 있어서 보기에 좋고, 많은 열매도 만들어 남에게 베풀며, 또 약재로도 쓰이지 않는 부분이 없으니 제일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나이 든 은행나무가 점잖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무들은 ‘수도 얼마 안 되면서 무슨 왕을 하겠다고… ’ 하면서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장내는 다시 시끄러워졌습니다. 재목으로 쓰이는 나무들은 사는 집을 강조하며 주장하고, 가지와 잎이 많은 나무들은 찬바람을 막아 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가구와 도구로 쓰이는 나무들도 유용성을 주장하고, 심지어는 땔감으로 사용되는 나무들도 그 용도의 중요성을 내세웠습니다. 모두들 기준의 타당성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에게 잘 보이려고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조건에만 집착할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한 늙은 나무가 소나무를 추천했습니다. 솔은 추위와 더위에 강하고, 눈비에도 푸르며, 바람에 시달려도 어디서나 꿋꿋하게 살아가니 왕의 자격으로 충분하다. 거기에 솔은 인간에게 식용과 약용으로, 재목과 땔감으로 뿌리부터 솔잎까지 유용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가히 나무들의 왕이 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 모두들 가만히 있었습니다. 논쟁에 지치기도 하였지만 논리로도 이의를 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인간이 입맛이 쓰다는 듯이 쩍쩍거리다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누구를 왕으로 정하던 이의는 없겠지요? 왕은 실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오.”
그리고는 일어나 자기 집으로 가 버렸습니다.
얼마 뒤에 인간은 느티나무를 왕으로 정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느티나무는 첫째로 가지가 무성하고 잎이 많아 인간들에게 훌륭한 그늘과 쉼터를 주고, 둘째로 재질이 단단하여 재목으로 훌륭하고, 셋째로 죽은 뒤에도 덩치며 뿌리가 또한 좋은 관상품으로 이용되니 한 평생 인간을 위하는 그 덕성이 가히 나무들의 왕이 될 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무들은 느티나무가 왕이 된 이유가 모두 인간의 입장에서 본 것일 뿐 자신들이 원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상황이 그렇게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 뒤부터 인간들은 나무들을 마음대로 가져다가 썼습니다. 잎은 채 피기도 전에 따고, 가지도 아무 것이나 꺾어 갔습니다. 재목이 소용되면 밑동을 자르고, 몸에 좋다면 뿌리까지 캐어 갔습니다.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느티나무만은 아주 오래 동안 손대지 않고 살게 해 주었습니다.
그때서야 나무들은 자신들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왕은 자신들이 뽑아야지 절대로 남에게 맡길 일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인간에게 의뢰해서 아무 이익이 없는 것은 물론, 도와주었다는 핑계로 도리어 갖은 핍박과 행패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 뒤부터 나무들은 어떠한 악조건 속에 놓여도 절대로 남에게 물으러 가지 않았습니다. 살기가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것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굳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옮겨 다니지 않고, 죽을 때까지 한 자리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 노력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