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춘부도통아문(1881-1909) 옛터 1714년 간도에 훈춘 협령을 설치, 1859년 부도통급 협령으로, 1881년 훈춘부도통으로 승급시키고 간도의 대부분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훈춘부도통아문의 위치는 현 훈춘진 정화가이다. 부도통아문은 7칸으로 된 대문, 3칸으로 된 의문, 동쪽모서리에 각루 1개, 그리고 대청과 사랑채로 되었다. 1889년에 대문 좌 위쪽에 포대를 하나씩 앉혔으며 아문 밖 서남쪽모서리에 5칸으로 된 감옥을 지었다. 부도통부는 아문의 뒷 뜨락에 있었다. 1900년 짜리러시아가 불을 질러 대부분 건물이 없어지고 현재 아문 사랑채厢房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훈춘부도통아문의 제1임은 依克唐阿이다. 광서 15년(1889년), 이크탕아가 흑룡강 장군으로 승급한 후 정면우로와 남강 6개 사의 군민들이 훈춘에 있을 때 그의 공덕을 찬양하여 세운 것이다. 비석은 할바령 영마루 옛길 남쪽에 세워졌다. 비석몸체와 개두는 흰 돌로 조각되었고 롱대석은 사암으로 만들었는데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정면 중간 아래 부분의 네모난 테두리 안에 名留千古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비석은 1978년 여름, 대석두진중학교 한 교원에 의해 발견되었다.
▲ 간도 조선인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호북성 운몽현 사람, 1898년 중국인 일본 제1기 사관생이다. 10여 만 자의 《조사 연길변무보고서》를 편집, 1909년 연길변무독판으로 승진하였고 1908년 외무부 길림변무고문으로 있으면서 공저 《중조계무장문절약》을 써냈다. 1911년 11월 16일, 왠쓰카이袁世凱에게 매수된 위대장 마뽀우저우馬寶周에 의해 석가장기차역에서 암살되었으며 1912년 쑨쭝싼孫中山은 우루쩐을 대장으로 추인하였다. 민국초기 연길변무독판공서 울안 서남쪽 모퉁이에 《도호 우루쩐 거사비》를 세웠으며 1926년에 연길 서공원에 옮겼다. 1935년 일제는 《연길신사》를 지으면서 비석을 뽑아버렸다. 비석은 현재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안도 석문진과 명월진의 접경지, 장-도 철도 동쪽 3m 상거한 지점에 《석문산》石门山이란 비석이 있는데 우루쩐이 세운 것으로 그의 친필이다. 돌이 많다는데서 지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 자 여추, 1904년 음력 6월 1일, 함경북도 길주군 장백면 합포동에서 출생, 1918년 홀몸으로 북간도로 들어왔으며 그해 연길도립 2중학교에 입학, 당시 조선인학생은 20여 명이었다. 후에 베이징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23년부터 1929년까지 베이징과 간도를 무대로 독립활동을 하였다. 1930년 4월 6일 밤,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밖으로 나갔다가 집 마당에서 격사당하였다. 심여추는 《조사 연변변무보고서》의 저자이다. 연길청 강역의 역사, 연길청 건설의 연혁, 연길청의 지리, 한민월간의 시말, 길한계무의 시말, 일한오설의 규정, 일본인 경영연길의 원인, 일본인 경영연길의 정책 등 8장으로 되었다. 부인 김창근은 독립운동가 김승만의 셋째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