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 중국조선인 이주사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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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화 중국조선인 이주사 21
  • 주성화
  • 승인 2008.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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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절 조선인집단부락

간도에서부터 시작된 조선인집단부락의 건설은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의 특수한 역사산물이며 조선인을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노예로 륜락시키고 항일유격대의 후원을 단절시키며 《통제와 안정》정책을 실시하는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1.역사배경과 건설과정

일제의 집단부락건설은 간도에서 첫 시작을 보았으며 대상은 조선인농민이다. 여기에는 집단부락건설의 최종목적에 따르는 역사배경이 깔려있다. 집단부락의 최종목적은 항일유격대와의 연계를 끊어버리고 《치안유지》를 실시하며 농민들을 《자작농》으로 양성하는 것이다. 한편 간도는 당시 《치안》이 가장 《혼란》하였고 《비적》이 횡행 한 곳이었다.

간도는 조선인의 집거구로서 반일투쟁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30년대 초에 이미 항일무장대오가 활발히 움직이었다. 그 예로 1931년 9월의 《추수투쟁》과 1932년 봄의 《춘황》투쟁을 들 수 있다.

간도의 조선농민은 재력 등 원인으로 하여 산간지대에서 산거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부락들은 항일유격대의 믿음직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들은 유격대에 식량과 물자를 공급했으며 유용한 정보제공자로 나섰다. 이 모든 것은 일본식민지통치의 우환이 되었다. 일제는 항일유격구에 대규모적인 군사토벌을 감행하는 것과 동보하여 조선인과 항일부대의 연계를 단절시키고 인가를 한곳에 집중시킴으로써 《민비(民匪)격리》의 집단부락을 건설할 필요성을 감안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일제가 간도에서 집단부락의 구상을 익히기 시작한 직접적 원인으로 되었다.

1932년 일제는 《제1기 치안숙정계획》을 제정하였으며 만주의 동북부, 서북지구 및 열하성을 숙정(肅正)중점지역으로 지목했다. 그해 8월, 일본관동군은 만철조사회에 위탁 하여 《재만 조선인이민 대책강요》를 제정하고 《통제와 안정》의 방침을 확정했다. 조선총독부 美根사무관의 제안에 의해 총영사관과의 협의 끝에 1933년에 집단부락을 건설하는 방침이 제기되었다. 조선인민회를 주체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투자하고 총독부와 영사관의 지도와 감독 아래서 실시되게 되었다.

1933년부터 5년 동안에 조선총독부에서 매년 10만 엔,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매년 30만 엔 도합 200만 엔을 간도에 투자하여 2500세대의 조선인소작농을 대상으로 설정하였으며 1936년 9월 《만선척식유한주식회사》가 설립되여 《동적》과 《동아권업회사》 》가 종전에 경영하던 토지매매업을 넘겨받아 계속 창정계획을 밀고나갔다.

1933년 3월 28일, 간도의 연길현 춘양향에 첫 번째의 집단부락 북하마탕(100호)이 건립되었다. 같은 해 4월에 태양촌(연길현 지인향, 69호), 중평(연길현 지인향, 58호), 춘흥촌 (연길현 지인향, 100호), 세린하(연길현 상의향, 91호), 장인강(연길현 수신, 150호), 청산리(화룡현 명신사, 89호), 토산자(화룡현 명신사, 100호), 락타하자(훈춘현 용지향, 98호) 등 8개 집단부락이 건설되여 855명 조선인을 《수용》하였다.

제2단계의 《치안숙정》에 배합하여 조선총독부와 군부의 협의를 거쳐 1934년 4월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에 15개의 집단부락을 건설하였다. 집단부락은 유격구부근에 건립되었으며 부락민은 경찰서 및 조선인민회에서 선정하였다.

1933년 3월, 위만주국정부에서도 통령을 발포하여 집단부락을 건설하였다. 건설된 집단부락은 성공서의 통일지휘를 받으며 각 현에서는 실무지도관 또는 임시지도원을 현장에 파견하였다. 1934년 간도 4개성에 25개의 집단부락을 건설하였다.

제3차《치안숙정》에 맞추어 1935년 총독부는 간도에 5개의 집단부락을 건립하였으며 위만주국도 제2차로 간도 4개현에 28개 집단부락건설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에 제2차 집단부락 건설계획의 추가계획으로 연길현의 흑정자 등에 6개의 집단부락을 건설하였고 처음 계획제정 때 실행가능성이 없다고 인정되였던 대전자, 대사하 등 12개 곳에도 집단부락을 건설하였다.

1935년 9월, 제4기 《치안숙정》이 시작되었고 중점은 위 봉천성, 림강, 길림, 간도, 안동 등 5개성에 두었다. 위 봉천성과 안동성에서는 《동변도 복흥계획》을 제정하였고 이에 따라 1935년에 집안, 흥경, 청원, 휘남 등 13개현에 집단부락을 건설하였다. 위 빈강성, 삼강성에서도 같은 시기 집단부락건설을 시작했었다.

1936년 2월에 동북항일연군이 건립되었고 4월에 《치안숙정》은 제4기의 후기단계에 접어들었다. 위만주국에서는 《3년 치안숙정요강》이 출범되었고 집단부락건설이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되여 위 만주국은 44만 4560원의 자금을 보조금형식으로 각 성에 나누어 주어 336개의 집단부락을 건설키로 하였다.

1936년 4월과 12월, 관동군은 《남부방어지구 통제 조선농민이민방침》과 《동부국경지대에서의 조선농민통제방안》을 반포하여 동부 국경선일대에 산거한 조선인을 중소변경으로부터 40km 떨어진 곳에 이주하여 집단부락을 건설토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1016호, 4338명 조선인은 1937년부터 영구, 유하, 회덕, 왕야묘, 대감창 등 16개의 집단부락에 수용됐다.

1936년 9월 만선척식회사가 세워졌고 1938년에는 93만 7200원을 투입하여 1923개 집단부락을 건설했다. 1938년에 이르러 동북에는 1만 2565개의 집단부락이 있었다. 1939년 《치안숙정》중점이 동북의 동북부에서 동남부로 옮겨감에 따라 집단부락도 1만 3451개로 늘어났다.


2. 집단부락 상황 및 내부기구

아래에 각 영사관별로 집단부락을 간단히 소개한다.

봉천 이후에 서술하겠지만 집단부락 하나가 있는데 철령 안전농촌이다. 1934년 현재 214호, 1077명을 갖고 있으며 약 700정보의 수전을 가꾸고 있다.

신민촌 장무현 왕가가는 만족인과 잡거하고 있는 부락으로서 1930년 파종 때 5호, 34명의 귀환민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35호, 16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1934년 6월)

통화 관할내 집단부락은 흥경현 소속 7개 곳이 있고 그밖에 많은 부락에 잡거해있으면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콩, 수수, 보리 등을 재배했으나 조선인의 생활은 중국인 보다 열등한 상태에 있었다. 1934년 현재 7개 집단부락에 조선인 536호, 2709명이 있었다.

해룡 해룡조선인은 내자산 농장집단부락을 창설해 경영에 착수했다.

영구 주요한 집단부락은 영구안전농촌, 삼익농장, 전자구 농장 등 3개가 있다. 영구농촌은 요하의 하구와 전장대사이의 요하연안에 1500정보를 개간하고 수전 2000정보를 주요 경작지로 한다. 1934년 현재 조선인 687호, 3287명이 있었다.

금주 금현에 거주했던 곽수성(郭树声)은 금서현 손가툰에서 자기 소유지를 개간하려고 조선에서 5호, 36명을 이주시켜 수전경영에서 성과를 따냈다. 1934년 6월현재 2개 집단부락, 15호, 99명 조선인이 있었다.

신경 관할 내에는 안전농촌식의 자작농실정을 목적으로 설치한 자연적인 집단부락인 만보산농장이 있고 1933년에 처음으로 수확을 보기 시작했고 1934년에는 약 350정보를 확정할 계획을 만들었다.

회덕현 오가자에 농장이 있어 1222여 정보를 갖고 있고 장래에 확장시킬 목표가 있었다.

이통현 고유수농장은 624여 정보에 1934년에 300정보 개간할 목적이다. 호얼수(赫尔苏)에는 일본인이 경영과 관계있는 호얼수 농장이 있었고 1934년에는 2300 천지를 상조해서 농장을 확대하려 했다.

할빈 관할 내에 있어서 집단부락은 하동, 수하의 두 개 안전농촌 외 또 원향툰, 취원창, 이층전자, 평방, 남전자 및 동기툰 등 6개 집단부락에 1670호, 7075명 조선인이 있다. (1934년말 현재)

수분하 관할 내에 8개 집단부락이 있는데 조선인 361호, 1737명이 수전 750정보를 개간하고 있었다.(1934년 현재)

치치할 파대, 선목 두 개의 집단부락에 1934년 6월 현재 198호, 960명 조선인이 있었다. 1922년 경, 남만으로부터 소수의 이주자가 있었고 수전 농사를 시험해 좋은 성적을 올렸다. 1933년 봄, 귀환자와 새로운 이주자가 늘어났다.

정가툰 조남 지방의 최초 이주지는 조남현 경원촌 농장으로서 1923년 이래 이주민이 있었고 이밖에 통료 관내에 있어서 오도구 농장과 1932년에 세워진 봉토농장은 1934년부터 입식농민을 보았다. 1934년 말 현재 12개의 집단부락에 607호, 2329명의 조선인이 수전 2448정보를 경영하였다.

적봉 흥안서분성 림동에 조선인부락이 있을 뿐이다.

간도 집단부락은 금불사, 상명월구, 도목구 등 3개 곳으로서 전부가 1934년도 제2차 계획으로서 건설에 나섰다.

투도구 집단부락은 1933년 4월부터 1934년 4월 사이에 건설되였는데 조선총독부가 건설한 것이 7개 곳이고 화룡현에서 건설한 것이 6개로서 총 13개 집단부락에 1275호, 6662명 조선농민이 3134정보의 한전을 위주로 농사지었다.

연길 춘흥촌, 중평촌, 태양촌은 1933년 가을에 건설된 집단부락이고 석문 내 집단부락은 1934년 봄에 건설된 것으로서 관내 5개 집단부락에 352호, 2368명 조선인이 770정보 한전을 위주로 경영했다.(1934년 6월말 현재)

배초구 집단부락은 북하마탕, 목단천, 소배초구, 오참, 전각루 등 5개 곳에 있다. 460호, 2240명 조선인이 한전 718정보를 위주로 경영했다. (1934년 6월 현재)

도문 1934년 5월에 석두하에 집단부락을 세우고 100호, 605명 조선인을 《수용》했다. 전부가 184정보의 한전만을 경영했다.
훈춘 빈농을 위주로 받아 들였으며 가옥 건축비, 식량 비, 농경자금은 대부금으로 해결되었다. 1934년 6월말 현재관내에 4개의 집단부락이 있었으며 338호, 1836명 조선인이 1115정보의 한전을 위주로 운영했다.

다음은 간도지역의 조선인집단부락을 현별로 상세히 적어보련다. (1937년 현재)

연길현 1937년 12월말현재 고성자, 삼도위, 장지영, 툰전영, 상촌, 복만촌, 복리촌, 복성촌, 이청배 등 9개 집단부락이 있었다. 부락의 규모를 길이 146-- 255m, 너비 85-300m이며 토성은 높이 3m, 두께 1.5-1.7m의 규모이다. 자위단 140명 중 조선인이 106명이다.

왕청현 경내에 화가영, 계관뢰자, 류수하자, 남성자구, 신선동, 태양촌, 상수하자 등 7개 집단부락이 있었다. 부락의 규모는 길이 100-324m, 너비 76-273m이며 토성은 높이 2-3m, 두께 1.5-4.5m이다. 487명 자위대원 중 조선인이 370명이다.

안도현 경내에 서남차, 청구자, 북대전자, 만보하자, 대전자, 남대전자, 양초구, 동남차, 고등차, 대사하구자, 류수하자, 북류수하자, 대사자 등 13개 집단부락이 있다. 부락규모는 길이 132-370m, 너비 132-590m 이고 토성은 높이 2.1-3.0m, 두께 1.2-1.5m이다. 248명 자위대원 중 203명 조선인이 있다.

다음은 안도현을 예로 조선인집단부락 이주의 전 관정을 상세히 살피겠다.

위 만주국 민정부(후엔 산업부로 개칭) 개척사와 위 간도성공서는 안도현 공서의 배합하여 《안도현 선농 입식 실시방침안》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천입 호는 1140호, 5700명, 매개 부락은 100호로 정하고 총 12개 집단부락을 건설키로 하였다. 천입시간은 강덕4년(1937년)3월 15일부터 4월 15일 한 달로 하였다. 조선에서 명월구까지의 이민은 선척에서 책임지고 명월구에서 지정지점까지의 이동은 민정부 척정사, 간도성공서, 《만선척식유한조식회사》에서 책임지기로 하였다. 100호, 500명을 한 개 《부대》로 하여 10개 반을 설치, 한 개 반에 10호로 하며 현공서 관원과 경찰지도관이 구체적으로 지휘를 책임지었다. 매《부대》에 경비원 20명, 경기관총 1정을 배치하였다. 도중에 주숙하였는데 첫날에 복흥, 이튿날에 십기가, 세 번째 날에는 대전자. 네 번째 날에는 대사하, 다섯 번째 날에는 안도였다.

1937년 봄 기온이 왕년에 비해 높았기에 천입시일이 원 계획보다 앞당겨졌다. 3월 11일부터 7차례에 나누어 움직이었다. 4월 1일 ,첫 집단이민이 전부 지정된 곳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입식수속을 할 때 어떤 가구는 빚을 전부 갚지 않았거나, 호주가 부재하거나 임시 타산을 개변하거나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하여 예정 기한 내에 이사하지 못하여 실제 입식한 집단이민은 1042호, 5294명으로서 원 계획 보다 98호, 506명이 줄었다. 첫 집단이민은 원적지가 강원도, 함경북도, 함경남도이며 안도의 13개 부락에 안착하였다.

두 번째로 되는 집단이민은 2854호로 계획하였으나 실제 이주자는 809호 (1039호라는 주장도 있다)로서 3분의 1에도 못 미치였다. 이들은 전라북도, 전라남도, 강원도, 충청북도, 경기도에 원적지를 두고 있었다. 1939년에 세 번째로 되는 집단이민 994호(1003호라는 주장도 있다)가 이주하였으며 1940년 네 번째로 되는 이주민 680여 호가 입식하였다. 1941년, 일본은 《만주개척 정책 기본요강》에 따라 조선이민을 개척민으로 삼아 북만 및 내몽골 수전개발로 이주를 강행하였기에 안도는 집단이민의 중점이 아니였다. 1945년 8월, 강원도 평창군에 온 80호 이주민이 양강구촌 안산툰에 임시 거주하다가 수인구(현 양강진 사신촌 서쪽 지역)에 정착하였다. 수인구에서 집을 채 짓기도 전에 광복을 맞아 대부분이 되돌아갔다. (《위간도성 안도현 조선농민이민지 건설 및 입식실시경과상황》안도현 당안국)

일제의 강압 하에 안도현에는 1940년, 1942년에 선후하여 내두산, 이도백하, 투도 등 3개 지역에 무장이민부락을 건설하였다.

내두산 1940년, 화룡현에 정착한 조선이민 100호는 한창섭을 단장으로, 50여 자루 보총을 휴대하고 100마리 소를 끌고 와서 내두산에 정착하여 무장부락을 건설하였다.

이도백하 1940년, 흥융, 한대파 등 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이민 20여 호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무장불락을 꾸리였다.

투도 현 송강진 투도촌이다. 1941년, 일제가 통제하던 반동조직인 신선대가 해산된 후 50호 이주민이 이곳에 무장부락을 건설하였다.

안도현 집단이주민의 정착지까지의 이동은 오기 전에 듣던 소문과는 달랐다.

《이민의 길은 험난하였고 기아와 추위가 동반하였다. 이들을 동원한 경무 지도관은 간도에 가는 사람은 버스를 타며 빵과 물을 마실 수 있으며 안전하게 목적지역에 닿을 수 있다고 하였다. 강원도 원주군에서 떠난 제1차 이민들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기차역에 닿았을 때 그들을 대기하는 것은 짐승을 운반하는 화물차였다. 이민들은 별 수 없이 기차에 실렸으며 차문이 닫겨지자 차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를 부르는 아이의 소리와 애를 부르는 어머니들의 소리가 처량했고 빵은커녕 물조차 공급받지 못하였다. 명월구에 도착한 후 이민은 13개 이민대로 나누어졌으며 안도현 공서와 경무 지도관이 지휘하여 각자의 지정된 곳으로 출발하였다. 명월구서 안도(현 송강진)로 가는 길은 험난하였다. 당시 명안 도로가 제1기 시공 중이었으며 1936년 가을에 완공되기에 길이 울퉁불퉁하였다. 겨울에는 바람 불고 눈이 오고 길이 막히여 통차는커녕 도보도 힘들었다. 제1차 이민들이 안도에 도착한 것은 3월이었다. 만척에서 명월구와 연길현의 차량을 동원하였지만 수요를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5000명 이민 중 노인과 부녀와 애들이 차를 타고 남성은 모두 걸었다. 몇 일을 걸어 새로운 거주 지역에 이른 이들의 마음은 산산히 부서졌다. 이들이 목격한 것은 심산수림과 황폐된 풀밭, 옥토와 기와집은 보이지 않았다. 낮게 드리운 초가들이 눈 덮힌 벌판에 보이었다. 처음에는 만척이 조선에서 선전하던 수전인가 하였지 미개간지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사기 당했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모든 것은 만회할 수 없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손에 쥔 돈이 없었고 만척과 치안대의 감시가 엄하여 몸을 뺄 수가 없었다.》(차상훈 《조선인의 안도현 천입사에 대한 역사고찰》)

《길림일보》 1937년 3월 21일자에는 《고등촌 이민부락에 대한 조사》라는 기사가 실렸다.

《조선 갑산, 무산군 부근에서 여기로 이주한 14가구, 97명 이민은 전염병이 돌던 1937년에 석 달 사이에 73명이 죽어 24명밖에 남지 않았다.》

가장 처참한 것은 십기가의 강원도이민이다. 일본 측 관원들도 십기가 경내 조선 인들이 많이 전염되었으며 상황이 가장 엄중하였다고 승인하였다. 전염병 초기, 사람이 죽으면 여러 사람들이 함께 구덩이를 파서 매장하였지만 후에 죽는 자가 많아 집집마다 자기 집의 시체를 처리하였다. 썩 후에는 구덩이 마저 파지 못하여 산기슭 눈이 깊이 모인 곳을 찾아 눈 속에 묻어버리었다. 날씨가 좋고 눈이 녹으면 시체가 썩어 고약한 냄새가 풍기였으며 개 무리(당지 주민이 기르는 개)가 모여와 시체를 뜯었다. 온 산야 에는 시체를 빼앗는 개들의 소리가 늘 울리었다. 개들은 흰 천에 싼 시체를 뜯어 습관 되 어 흰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달려들어 이민들은 낮에도 출입을 삼갔다.》(차상훈 《조선 족의 안도현 천입사에 대한 역사 고찰》)

아래에 연길현 차조구 중평촌집단부락에 대한 조사자료를 참고로 옮긴다.

중평촌집단부락은 경도선 차조구(茶条沟)역에서 북쪽 약 2일본리에 위치해 있다. 1935년 4월 22일부터 5월 1일까지 토성을 지었으며 7월에 가옥건설을 마쳤다. (제2차집단부락에 속함) 수용호수는 조선인 107호, 중국인 5호이고 부락 관리에 있는 토성밖에 조선인 28호가 있었다.

집단부락건설 중 공동시설에 대해서는 보조금이 없었고 현에서 경농자금을 떼내여 가옥건설자금 7000엔을 마련했다. 그중 1850엔은 공동시설비, 1050엔은 건축인원의 식비 및 자위단 복장비 등, 800엔은 잡용비, 150엔은 경농자금 및 가옥건설비로 촌민에게 대부금으로 주었다. 4년을 기한으로 하여 6명을 한조로 련보 책임제를 실시했고 가옥을 저당하였다. 일력은 3300명인차, 공동시설 건설 에만 사용되었다. 자위단은 의무제를 실시하였다. 18-40세 남성으로 묶어 졌으며 단장은 촌장이 겸하였다. 상주자위단은 매일 3명, 5일을 기한으로 교체 되였다. 자위단경비는 촌민들이 8000평을 공동 경작하여 얻은 수입으로 마련되고 기타 부담은 촌민들이 매달 약 15엔을 바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무기도 갖추 었는데 장총 8개, 탄알 30발이 있었다.

중평촌 집단부락에 112호가 수용되었고 비 농호가 3호 (자위단원 2호, 야장 1호), 반농호 1호, 조사당시 호주가 외출한 호수 5호 등 9호 외 현재 농호 103 호 (만주인 4호, 조선인 99호)가 있다.(1936년 9월 17일 조사)

이상은 집단부락의 건설상황이다. 아래에 그 내부설비 및 관리 제도를 살피련다.

앞에서 서술한바와 같이 집단부락의 형태는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으로서 다각형은 피면했었다. 부락주위에 토성을 쌓았으며 표준은 높이 8자, 넓이 3자였으나 마을 마다 각이했다. 토성 밖에는 넓이 3자, 길이 3자 되는 도랑을 팠고 네 각에는 포대를 설치하였다. 지방에 따라 포대는 2-5개도 설치되여 있었다. 집단부락의 대문은 지정된 시간에 열고 닫으며 출입자는 《거민증》을 휴대해야 했다. 부락 사이의 거리는 두 시간 안에 이를 수 있는 것을 기준하여 부락의 분포와 설비는 모두 부락민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집단부락의 관리는 보갑법을 실행하였다. 주민 10호를 1패로, 촌 혹은 이에 상당한 구역을 1갑으로 한 구역안의 갑들을 1보로 규정하였다. 만약 어느 패에 치안 소란자가 나타나면 그 패의 거주민은 모두 연계책임을 져야하며 《연좌금 (連坐金)》을 내야한다. 부락장이 집단부락의 갑장을 겸임하며 갑장은 상급기관의 감독을 받으며 부락의 《자치사업》을 장악하였다.

보갑법에 의하여《집단부락》에서는 일만 군경의 지도하에 《자위단》을 조직하였다. 그 수는 20명 좌우였다. 부락의 《개단주의(皆國主義)》원칙하에 일본군 혹은 소속 현의 경무 지도관이 전체 장정을 훈련시켰는데 해마다 3차 이상 진행되었다. 자위단의 무기는 일만 군경 및 성공서 경찰청에서 발급 하였는데 어떤 부락에서는 부락민이 자금을 모아 사들이었다. 그 예로 연길지구의 집단부락의 경우를 보면 춘흥가자위단은 긴 구식총(长铳)16자루, 탄알 800발, 태양촌 자위단은 긴 구식총 20자루, 탄알 1000발, 종평촌 자위단은 긴 구식총 20자루, 탄알 1000발, 석문내자위단은 긴 구식총 20자루, 탄알 2000 발을 갖고 있었으며 경비는 모두 부락민이 부담했다.(《재만조선인개황) 인용)

1936년말 현재, 위 간도성에는 이미 319개 자위단, 1만 8133명 자위단원이 있었다. (《간도조선인개황) 길림철도국 편)

이밖에 집단부락 내에 촌공서군경파출소를 설치하였으며 화룡 숭선촌 집단 부락 촌 공서에는 15명의 경찰이 있었다. (《괴뢰만주국시기의 집단부락에 대하여》우영란)

부락과 경작지의 거리는 4km 이내로 제한되었으며 직접 먹을 수 있는 감자, 옥수수 등 농작물의 재배는 엄금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제2차 집단부락을 건설할 때 《자작농창정》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조선인을 일제의 노예로 얽매워놓은 참혹한 통제수단 이었다. 이 점은 다음 절에서 상세히 살피겠다.

부락민을 정신적으로 마비시키기 위해 부락마다 1-2개의 서당을 설치하고 《신사(神社)》를 설립하고 매년 정월 15일, 5월 5일, 8월 15일에 제사 등 활동을 조직하였다. 안거낙업의 관념을 선양함으로서 항쟁의식을 마비시켰다.

집단부락건설은 1945년도까지 유지되었다. 그 후과는 엄중했다. 우선 부락민을 엄격히 통제된 집단부락이란 특수한 형태에 밀어넣어 민중과 항일부대의 연계를 단절시켜 일본군의 토벌에 장애를 줄이고 《치안숙청공작》을 촉진하였다.

다음으로 조선농민에게 무궁한 재난을 갖다 주었다. 집단부락건설은 산재한 농민들이 땅과 가원을 떠나 지정된 부락에 이주하는 과정으로서 원래의 부락에 대해서는 불사르고 죽이고 빼앗는 정책을 실행하여 거대한 경제손실을 빚어냈다. 1934-1936년 위통화성에서만도 1만 4000칸의 민가가 손실되었으며 33만 무의 땅이 버려졌다.

집단부락정책은 생산력을 해방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부락민을 일제 식 민통치기구의 채무노예로 만들었다. 부락민은 많은 자작지를 상실하였기에 소작인으로 몰락되여버렸다. 또 부락과 경작지 사이의 거리가 늘어나 노동력과 시간낭비를 조성하였다
.
집단부락의 건설로 하여 위 봉천성, 안동성의 많은 조선농민은 북만에로의 도망을 택하였다. 경빈선을 타고 북상한 인수는 1937년 1-3월까지만도 11만 3000명이 된다. 이러한 인구이동은 조선농민들의 생활난으로 선택한 생존의 방식이었다. 당시 일본당국은 령을 내려 인구이동을 금지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단부락 건설을 반대하는 활동도 발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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