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으로 되돌아가기’를 한 결과 ‘동네어른’에 대한 포착이 문제해결에 있어서의 결정적 단서일 가능성을 타진해보았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인용문①에서 주인공 서선장이 존경하던 욕망대상인 씨동이는 마르크스주의 전사의 원형으로 보인다. 그리고 간접체험인 홍길동이나 임꺽정은 각각 신분과 계급 사유의 원형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직접체험에 속한 ‘동네어른’을 텍스트에서 찾아보면, 유일하게 한 인물이 나타나고 그 등장인물은 곧 ‘한진사’이다. 직접체험으로서의 ‘한진사’이기에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한진사는 곧 조선의 선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반 텍스트를 아우르는 욕망구조가 정확하다면 ‘한진사’에 주제적 층위의 내용이 들어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텍스트를 인용하도록 한다.
⑯ 이렇듯 형세가 흉흉한 판에 광풍에 돛대가 부러진 한 척의 가련한 고깃배가 노질을 하여 간신히 목숨을 살렸다가 코끼리 같은 무서운 힘으로 후려갈기는 파도에 마지막 희망이던 노까지 빼앗겼다. 기진맥진한 네댓 명의 사람은 뱃전을 붙잡고 엎드려서 뭍을 지척에 바라보면서도 사경을 헤매었다. (중략) “저걸 어쩌지.” “저걸 어쩐다.” (중략)
이렇듯 위급한 시각에 사람들의 이목을 한 몸에 끌며 사람 하나가 나섰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도저히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허옇게 센 풍채 좋은 채수염을 모진 바람에 흩날리며 고희가 넘은 한 진사가 나선 것이다.(중략)
“사람이 죽어가는 걸 가만히 보구만 섰다니...... 참으루 인사불성이오. 누구라두 좋으니 목숨을 걸구 나서서 저 사람들을 좀 구해주시오. 구해주는 사람에겐 내가 상금으루 50원을 주리다.”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며 혹은 놀라서 입을 벌리기도 하고 또 혹은 감탄하여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흔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파도가 하도 어마어마한 데 눌리어 감히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한 진사는 학식이 있는 사람이고 또 갖은 경난을 다한 사람이라 ‘중상지하필유용부(重賞之下必有勇夫)’란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을 위험한 일에로 불러일으키는 데는 후한 상금이 왕왕 결정적인 추동력으로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 진사는 자기 호소에 선뜻 호응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하기도 하고 또 초조해하기도 하였다. 50원 소리에 크게 놀란 아들이 나지막이 “아버님.” 부르며 두루마기 소매를 지그시 잡아당기는 것을 뿌리치고 한 진사는 다시 한 번 목청을 돋우어서 “없소? 아무도 없소?”하고 물으며 누구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이때다. 벌써부터 사나운 바다를 노려보며 우리 안에 갓 갇힌 들짐승처럼 안절부절못하던 씨동이가 아무 말 없이 윗도리를 훌떡 벗어서 땅바닥에 던지고 또 고의까지 땅바닥에 벗어던졌다. 그 아버지 양 서방이 이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가지고 쫓아와서 팔죽지를 덤썩 잡고 “이놈아, 어쩔라구?”하고 소리치니 씨동이는 잡힌 팔을 심술스럽게 홱 뿌리치고 바로 한 진사를 향하여 “댁 어구 창고의 마닐라 로프를 좀 쓰게 해줍시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한 진사가 그 의취를 선뜻 짐작하고 “오냐 그래라.” 대답한 뒤 곧 아들을 돌아보고 “빨리 가서 열어줘라.”하고 분부하였다.
한 진사 댁 어구 창고의 바다를 향한 함석문이 지체 없이 활짝 열렸다. 우 몰려 들어간 사람들이 아름드리 밧줄감개에 가득 감김 신품 마닐라 로프를 줄줄줄줄 풀어 내왔다. (중략)
선장이는 저의 숭배하는 선배와 행동을 같이 못 하는 것이 유감스럽고 또 염려스러워서 어린 속을 끓이며 왼새끼를 꼬았다. (중략) 한성진은 ‘돈이 과연 무섭구나.’하고 새삼스럽게 감탄해 마지않는 한편 신품 마닐라 로프가 물어 들어가 중고품이 되는 것을 생각하고 가슴을 앓았다. 그것이 현금 50원보다 손실이 더 컸기 때문이다(1권, 3장, 47-50면).
인용문⑯은 전반 텍스트의 주제적 층위 내용을 전부 압축하여 나타낸 대목으로 판단이 된다. 즉 지금까지 인용하였던 인용문① ∼ ⑮를 전부 포섭할만한 여건과 자질, 그리고 저력을 과시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대목이라는 뜻이 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생존권, 자본, 자본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 역사전통에 대한 모든 것이 이 대목 하나에 다 나타났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위 인용문⑯에서는 적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고 수많은 사유가 서로 얽혀서 장쾌한 하모니를 연주하고 있다. 원형적인 여러 사유패턴들의 실존적 어울림이 인간의 생존권이라는 거대하면서도 소박한 사태를 둘러싸고 인용문에서 잘 나타난다.
우선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에 대해 주목하도록 한다. 여러 가지 판단으로 미루어보아 ‘한 진사’가 핵심인물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의 정체성을 따져보면 조선의 선비라는 것이 적절한 규정으로 될 것이다. 자본은 생존권을 위해 적절히 쓰이고, 생명이 위협되는 극한상황에서 공동체의 성원들을 구원해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논리나 행위도 생명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윤리적 정언명령이 잘 나타난다. 인용문⑯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아도 독자들에게 의미가 잘 전달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존권이라는 극한상황이 탈식민지를 위한 전쟁이라는 전 민족적 위기상황으로까지 비약된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격정시대의 전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장쾌하게 이루어낼 수 있도록 추동한 그의 의식구조를 아울러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선비가 지닌 의식구조, 그것은 다름 아닌 선비정신으로 될 것이다. 생존권과 공동체 의식, 자본을 대하는 태도와 역사문화, 그리고 민족과 세계를 다시 보편자-인간 자체로 대할 수 있게 기능하는 사유체계가 선비정신에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 선비정신이란 어떤 실체적 의미를 지닌 의식체계의 대상으로 작용하는지를 심층 분석하는 것이 풀어야 할 과제 상황이 될 것이다. 따라서 선비정신을 알아보고 그 선비정신을 알아본 상황에서 인용문⑯도 아울러 분석하도록 한다.
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집단을 가르킨다. 이런 의미에서 士는 지식과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만큼 우리말의 선비와 뜻이 통한다. 이런 선비들이 지닌 윤리의식이 바로 조선반도의 고유정신 중에 가장 정수라 할 수 있는 ‘선비정신’이다. 선비는 원래 유교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선비는 이미 상고시대부터 고신도(古神道)를 배경으로 내려온, 文武를 겸전한 이상적 인간상이었다. 신라시대의 화랑도 상고시대를 이어 고구려로 이어지는 선비가 이어진 것이다. 이것이 조선조에 와서 유교와 접맥하여 儒生과 士가 합하여져 만들어진 명칭이다. 일찍이 신채호는 선비(仙人)는 우리의 무사도이며 우리 민족의 넋이며 정신이라 하였다. 선비들의 의리정신은 외민족의 침략을 당할 때 침략자의 불의에 목숨을 걸고 항거한 의병이나 지사들의 강인한 행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폭탄을 투척하고 장렬하게 산화하는 독립투사들에게서 이런 선비정신이 새삼 확인이 된다.
위 인용문⑯에서 생명에 위협이 있는 공동체 성원들을 구원하는 한진사나 격정시대 텍스트 전반에서 살펴보아 안중근, 윤봉길, 이순신, 서선장, 씨동이, 팽덕회, 김구 등등이 이런 선비정신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의용군이 <김구 : 이승만>을 대비시키던 대화에서 자본을 대하는 인간의 윤리성을 강하게 추궁하는 정신 역시 선비정신의 발로로 볼 수 있다.
선비정신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義에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義의 개념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흔히 義를 利와 대비하여 논하기도 한다. 義는 公적인 것이고 利는 私的인 것이다. 무릇 義는 인간이 행해야 할 떳떳한 도리요 모든 행위의 규범이 되기에 公義의 성격을 지니며, 利는 개인의 사적인 욕망추구에서 생기므로 私利의 성격을 지닌다.
인용문⑯에서 한진사는 공동체의 ‘생존권’을 위하여 ‘자본’을 활용하는데 그것은 公義를 위한 선비정신에 다름이 아니다. 2장에서도, 3장 1절에서도 이미 분석을 진행했지만 격정시대에는 유독 公義를 위한 인물이 특별히 많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이런 인물들은 근원적으로는 선비정신 중 가장 본질적인 公義라는 덕목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선비는 지극히 존귀한 존재로 여겨졌다. 연암 박지원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무릇 선비란 아래로는 農·工의 대열에 끼이고 위로는 王公과 벗한다. 지위로 보면 등급이 없고 德으로 보면 올바른 일을 한다. 한 선비가 독서를 하면 그 은택이 四海에 미치고 그 공이 만세에 드리워진다.
“은택이 四海에 미치고 공이 만세에 드리워진다”고 말한 데에서 선비의 기능과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온 천하의 질고를 생각하는 깊은 마음이 그것이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선비가 農·工의 대열에 끼일 수도 있고 王公과 벗할 수도 있다고 말한 점이다. 이것은 선비가 신분적인 계층을 나타내는 명칭이 아니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선비는 초계급적인 존재이다. 선비의 본분은 일단 無位고 無等이다. 세상의 어떤 위계에도 소속되지 않는 독존, 이것이 선비의 본래 존재양태다. 그런데 선비가 독존으로 남아있는 세상은, 儒家의 관점에 의하면, 정상적인 세상이 아니다. 정상적인 세상은 선비가 작위를 가지고 참여함으로서 兼善天下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라 하더라도 선비정신에 대한 작위는 非本質的이고 偶然的인 것이다.
물론 조선시기에는 신분적 제한이 분명 있었다. 서자의 신분적 차별을 소재로 한 洪吉童傳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황이 벼슬하고 있던 명종(明宗) 때에도 서자(庶子)와 천민의 과거 응시를 허용하자는 내용의 글을 올리고 있다.
하늘이 이 세상에 사람을 낼 때 사람의 재능은 신분의 귀천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왕이 사람쓰는 방법을 보면 단지 그 재주와 덕망의 우열만을 보았지 그 출생이 어떠했는가를 따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옛날부터 유명한 인사나 큰 선비 가운데는 서자나 천민 신분에서 분발하여 세상에 나와서 공훈과 업적을 세워서 국가의 재상이 되기에 이른 사람도 한두명이 아닙니다.
이황의 이와 같은 언급으로 보아 그는 근원적으로 인간평등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초계급적인 선비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황과 같이 인간평등주의를 지향하고 백성의 질고와 국가의 안위를 우환의식으로 바라보는 율곡과 같은 선비들의 주장이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위의 조선조 대선비들의 주장은 그 어떤 특별한 이데올로기보다는 인간 보편적 가치의 영역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정신들이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장하는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해방”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와 선비정신은 엄연히 다른 두 패러다임이다.
이와 같은 점을 미루어보아 격정시대에 등장하는 조선의용군과 광복군을 비롯한 그 수많은 인물들이 대부분 초계급적인 정체성을 보이고 있음을 지금까지의 분석을 다시 생각해보면 알아낼 수 있다. 특히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서 農·工의 무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광대한 하층백성들의 질고와 생존을 위해 항일하였다는 점은 조선의용군을 반드시 마르크스주의로 무장된 집단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즉 자본의 소유정도에 근거한 인간의 구분이 아닌 것이다. 자본이 인간의 최저한의 물질생활을 만족시키지도 못하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일 뿐이다.
김학철은 다음과 같은 좌우명으로 살아왔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不義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이 문구는 특히 선비정신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의식인 出處觀과 관련된다.
선비의 근본 志向은 出仕하여 行道하는 데에 있다. “선비가 兼善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로 그 본래의 뜻이다. 물러나 스스로 지키는 것이 그 어찌 本心이겠는갚라고 李珥는 말하였다. 선비가 세상에 나아가는 의도는 두가지로 귀결된다. ‘귀하게 되고자 하는 마음(欲貴之心)’과 ‘道를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行道之心)’이 그것이다. “道가 행해지지 않는데 한갓 그 영리에만 탐닉하는 것은 선비가 아니다”고 한 許筠의 언급은 위의 작가의 좌우명과 서로 통한다. 난세의 不義를 외면하지 않고 세상으로 나아간 작가 김학철의 실천정신과 허균의 언급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出處觀은 작가의 대표작인 격정시대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래에 작가의 좌우명이 언급된 단락을 인용하도록 한다.
아버지께 읽기와 쓰기에 게으르다고 큰 꾸지람을 들었다.
“학문이란 곧 노력이다. 홍명희의 림꺽정을 외우다 싶이 했다. 어느 구절이 어디 있는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홍루몽과 로신전집은 또 몇 번이고 읽었더냐. 오직 노력뿐이 사는 길이다. 내 일본어 실력을 너에게 넘겨주고 가지 못하는 것이 참 유감이구나.”(중략)
아버지는 유서를 타자치게 하시고 열다섯 장에 일일이 서명을 하셨다. 유서에는 두 마디가 첨부되었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不義(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중략) (2001년) 9월 16일 일요일. 물 세 컵을 드셨다. 조선의용군 추도가와 황포군관학교 교가를 들으셨다. 추도가는 전쟁터에서 아버지가 가사를 쓰시고, 가장 친한 전우 류신 동지가 작사하여 전우들이 희생됐을 때 불렀던 노래다. 헌데 호가장전투 후 김학철 등 네 명의 전사자들을 위한 추도식에서도 이 추도가를 불렀다. 총을 맞아 일본군에게 끌려가셨는데 당시 전우들은 전사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훗날 그 류신이가 먼저 전사하셨다. (중략)
9월 21일 금요일. 머리를 아주 빡빡 깎겠다고 하신다. 농담조로 “최후의 분대장, 머리 깎고 조선의용대에 복귀한다”고 하셨다. 전우들이 다 가 있는 곳으로 말이다. 깎으신 머리에 처음 보이는 칼자국이 나타났다. 문화혁명 시기 홍위병들이 쇠몽둥이로 쳐서 머리가 터진 자국이라 하셨다.
“그때 온몸이 피투성인데 약 하나 발라주는 사람 없었다. 피가 말라붙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외다리로 절룩거리며.”
일본 감옥에서의 이야기도 나왔다.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 해서 부상당한 다리를 치료해 주지 않았다. 3년 6개월 동안 피고름을 흘리면서 독방에서 지내야 했다. 상처에 생기는 구더기를 젓가락으로 골라내노라니 참 고된 인생이었지. 결국은 감옥장이 바뀌면서 해방 전야에 다리를 절단했다. 그로써 60년 동안 외다리 인생이 되었다. 잘린 다리는 일본 감옥에 묻혀 있다. 그러니 나는 무덤이 이미 하나 있는 신세구나. 하하하.”(중략)
9월 24일 월요일. 그렇게도 강한 의지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예리하고 비웃는 듯한 눈빛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참고 참던 눈물이 솟아나왔다. 내 눈물을 사이에 두고 두 눈빛이 부딪쳤을 때 아버지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것으로 눈길을 피하신 것이다. 사나이는 눈물을 아껴야 하는데.
9월 25일 화요일. 음식을 못 드신지 스무하루, 물을 못 드신지 아흐레. 말씀하시기 힘드시어 손으로 의사를 표시하신다.(중략) 오후 2시. 오래오래 내 얼굴을 지켜보셨다.
아버지, 저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비록 오늘 처음 말씀드리지만.
눈가에서 마지막 밝은 눈빛이 빛났다. 가시는 끝까지 의식은 한 치도 흐리지 않으셨다.
(9월 27일) 오후 3시39분. 심장의 고동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위 인용문에서 격정시대의 작가 김학철의 일생이 잘 나타나며 그가 한 유언에서 천하의 “不義”를 극복하기 위해 실천적인 삶으로 평생을 분투하였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여기까지 분석하고 나면 격정시대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조선의용군, 나아가 역사적 작가의 진정한 의식이 특정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라고 확정할 수 있다.
격정시대가 “격정시대”의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서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었다는 정보를 충분히 감안하면 최종 주제적 층위는 이렇게 정리가 된다. 주인공과 조선의용군 등 인물들이 선비정신으로 자신들을 엄격히 다스리고 생존권과 정권을 확립하기 위해 끝까지 일제와 싸웠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현대판 선비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적인 인식구조로 말미암아 조선의용군 전반이 심하게 갈등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항일을 견지했던 것도 분명하다.
보편자-인간이 확보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기본 요구는 곧 생존권, 자본, 민족이다. 조선의용군집단은 역사전통 중의 윤리적 강령인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생존권을 도모하기 위해 항일을 끝까지 하였다는 것이 본 텍스트의 최종 주제로 된다.텍스트에 등장하는 조선의용군 등 인물집단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인간집단 구분 기준인 <자본> 자체의 속성에 근거하지 않고 <역사전통>에서의 윤리적 강령인 선비정신으로 행동하고 실천하였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기본 사고구상에 근거하여 실천 강령인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연합>이 곧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석에서 드러났다. 즉 윤리적 강령과 실천 강령의 통합을 실천적 삶 속에서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언표화 할 때는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으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이것을 욕망구조로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용군의 욕망의 표층구조와 심층 구조는 각각 다음과 같다.
표층 욕망구조 = <조선의용군(욕망주체) - 마르크스주의(직접체험) - 전 세계(간접체험) - 자민족을 우선한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존권 보장(욕망대상)>
심층 욕망구조 = <조선의용군(욕망주체) - 선비정신(직접체험) - 전 세계(간접체험) - 자민족 전부와 전 세계 생존권 보장(욕망대상)>
이상으로 조선의용군의 최종 욕망구조를 그려보았다. 주제적 층위는 조선의용군의 표층 욕망구조와 심층 욕망구조 모두를 합친 내용으로 된다. 역사적 작가, 텍스트의 주인공의 욕망구조도 조선의용군의 그것과 동일하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점으로 되돌아가기’를 통해 ‘한진사’를 분석하면서 선비와 선비정신에 대해 알아보았다. 선비정신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義에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인데 격정시대의 작가 김학철의 유언 중 좌우명을 통하여 그가 현대판 선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둘째, 선비는 초계급적인 집단임을 알아보았고 텍스트에 등장하는 조선의용군이 이러한 정체성을 갖추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셋째, 조선의용군의 욕망구조를 ‘6요소의 3차원 구조’로 따져보아 마르크스주의 기본 명제에 근거하여 실천 강령인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연합>이 곧 선비정신의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석에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