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는 엄마의 눈물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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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는 엄마의 눈물을 믿는다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8.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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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시장가에서 15년을 되거리장사로 일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던김복동씨(49세 명주쇼핑센터 《애진》매장의 리장수의 어머니 ), 1997년 한해가 저물어갈무렵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행속에 울분과 원망을 한가슴 안고 엄동의 씨비리아를 향해 미련없이 떠나갔다. 하지만 떠나기 앞서 어린 아들 장수가 마음에 걸려 학교로 가는 길목에 숨겨서서 아들애의 뒤모습만 애궂게 지켜보다말고 걸음마다 눈물을 휘뿌리며 떠나갔다.

오기를 앞세우고 찾아온 씨베리아땅은 북풍이 휘몰아치는 동토였다. 모스크바근처에 행장을 풀고 장거리에 나서니 시장경영권을 빼앗는 《장마당정캠때문에 패거리싸움이 벌어져 1개월이 넘도록 장을 볼수 없었다. 총밑천 3000원이 거의 거덜이 나고 려권마저 유효기가 지나 각별히 경찰들을 조심해야 했다. 하여 모스크바로 물건구입을 떠날 때면 버스걸상아래 언 철바닥에 누워 로씨야인들의  다리밑에 숨은채 5, 6시간씩 가야 했고 물건구입이 끝나면 짐속에 《동굴》을 빼고 그속에 묻혀 고개가 꺾어지도록 버티면서 돌아와야 했다.

주일마다 한번씩 다녀오는 물건구입 그렇게라도 순조로울 때면 다행이지만 모스크바장거리에서 세관검사에 맞닥뜨릴 때면 6메터높이의 철조망을 손톱발톱을 살려 톱아올라가 도망을 빼야만 했다. 철조망에 걸려 팔다리가 성한 곳 없이 살갗이 찢어져 피 흐르고 맨발바람으로 거리를 질러가다보면 마음씨 좋은 로씨야인들이 자기 집으로 안내한다. 이튿날 발에 맞지도 않는 신발을 빌려신고 역에 나올 때면 주인집들에서는 또 차비도 쥐여주어 다행으로 세집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삶을 위한 치렬한 박투로 어느덧 6년세월이 흐르면서 손에는 일정한 자금이 쥐여졌고 좀 돈이 될듯싶어 가죽쟘바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동안 낮이면 장사에 지치면서도 저녁에 자리에 누울 때마다 아들애의 부름소리가 귀가에 울리듯 하고 눈물 고인 얼굴로 엄마를 찾는듯하여 가슴이 미여지는듯하였다. 입속말로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며 눈물속에 지샌 밤은 얼마인지 모른다. 그러던 하루, 더는 마음이 허둥지둥하여 참고견딜수 없었다.  저녁 6시까지 장을 본 그녀는 급작스레  입은 옷그대로 연길행을 하였다. 오는 길에 도처에서 벌금이  무섭게 골머리를 때렸지만 아들을 만나려는  일념으로  모든것이 개의치 않았다.

집에 당도하니 과연 걱정되던바와 같이 아들은 학교를 중퇴하고 집을 나와 친구들끼리 살고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대성통곡한들 이미 때늦은 뒤였다. 몰래 아들을 미행해보니 꽃방집 아르바이트로 일하고있었다. 창너머로 지켜본 아들애의 손은 인조꽃 쇠꼬챙이에 찔려 피멍이 들대로 들어 성한 곳이라고는 없었다. 아들은 또 거리에 나가 꽃을 팔기도 하고 호주머니에 담배를 넣어가지고 가라OK같은 장소에 가 팔기도 하였다.

《집의 아들이 참 순진하고 착실하고 부지런합니다. 저희들이 잘 돌봐주겠으니 시름놓고 떠나십시오.》 꽃방집 주인은 아들 몰래 찾아온 엄마를 위안해주었다. 주인집에서 아들의 옷도 전담하여 사입히고있었던것이였다. 

엄마는 로씨야에 벌려놓았던 일을 마무리해갖고 돌아오려고 다시 로씨야로 향했다. 그때는 2003년 5월경이였다. 자기의 근거지 세집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녀는 그만 아연해지고말았다. 그사이 강도들의 겁탈이 닥쳐 모든 장사밑천인 가죽잠바꾸러미는 오간데 없고 여름양말꾸레미 한짝만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다. 하늘땅이 빙글빙글 도는것만 같았다.

아무리 울며 하소연해도 친인척 한사람도 없는 이역땅에서 들어주는이가 없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시장가에서 열쇠가공을 하는 박형실이라고 하는 《안도할머니》네 집으로 찾아갔다. 《안도할머니》는 로씨야땅에 발을 들여놓은지 20년이 된다.  워낙 부부가 함께 로씨야로 왔다가 한차례의 강도겁탈에 두 목숨만 부지하였고 나중에 그 미열로 남편은 뇌출혈로 세상을 떴다. 남편을 로씨야땅에 묻고 눈물을 씹어삼키며 이악스레 열쇠가공으로 돈을 벌어 청화대학생 손자며 조카들의 공부뒤바라지를 하고있는 《안도할머니》다. 그는 철집지하에서 지내는 중국인들에게 헐레발이며를 자주 사보내면서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돕고있었는데 그 지역에서는 위망이 있었다.

처음 느닷없이 찾아든 그녀를 썩 내켜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쁜쪽에서 밥도 짓고 빨래도 씻어주고 집안도 거두면서 어떻게 살아갈 방도를 대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녀는 안도할머니곁에 붙어서서 열쇠가공하는걸 달포간 지켜보면서 손수 재간을 익혔다. 얼마간 손에 익자 할머니는 한번 시험삼아 시켜보더니 혼자라도 얼마든지 할수 있을것 같다며 자기 돈 4,500원을 내여 광주열쇠가공기계를 사주면서 4만명 인구를 가진 작은 도시마을로 자리를 잡아주었다. 그리고는 그 지역 시장관리자며 경찰, 세무자를 불러 한턱 차리면서 잘돌봐달라고 부탁을 남기고 떠나갔다.

열흘후 안도할머니는 또 자기 딸을 배동하여 함께 보러 왔다. 하루 60여개 가공하는데 일곱개쯤 반품이 나온다고 하니 열쇠를 반대로 메워놓고 다시 각도를 잡아보이면서 다시 해보라고 했다. 안도할머니가 가르친대로 하였더니 반품들이 모두 정품으로 되는것이였다.안도할머니는 자기의 《비법》마저 몽땅 가르치주고 귀가하였다.

 일반열쇠 가공비는 3원, 특수열쇠는 7원, 차열쇠는 70원 하면서 그녀는 열심히 열쇠가공으로 푼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 지방에서 저 지방으로, 일곱개 지역으로 옮겨다니며 일감을 모아 안도할머니의 빚도 갚아갔다.  가공재료도 좀씩 사들이면서 겨우 일어서기 시작한 어느 가을밤, 잠결에 목이 터지는듯 갈증이 일어 물 먹으러 일어서는데 가스냄새가 온집안에 차있었고 머리가 어지러워 허둥거렸다.  주인집과 강도들이 결탁한 짓임이 틀림없었다. 찰나 거쿨진 쏘련강도가 문을 박차고 들어서는바람에 문접시가 거의 떨어져 나가고있었다. 기겁하여 혼비백산할 지경임에도 몸에 지닌 돈을 보존하기 위해 그녀는 3층집 창문으로 그대로 냅다뛰여내렸다.

혼수상태에서 깨여나보니 그녀는 한 병원에 누워있었다. 그녀가 의식이 들자 의무일군들은 보호자를 불러야겠단다. 로씨야땅에서 보호자라니 떠오르는 사람이 《안도할머니》였다. 호출과 함께 달려온 안도할머니, 병원에서는 거액의 치료비를 할머니에게 알려주고있었다. 그녀는 어처구니없어 머리를 외로 틀어버렸다. 그런데 할머니는  선뜻이 서명을 하는것 아닌가. 할머니의 담보로 일주일이 지나 부스러진 아래턱을 쇠로 걸어매고 또 일주일이 지나 웃이몸을 수술하였고 나중에 머리가 빠개지는듯 아파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뇌진탕이 왔다고 하면서 인민페로 170원씩 하는 주사를 30대는 맞아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눈을 딱 감아버렸다. 어림도 없는 치료를 자기는 받을념도 하지 않았다.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니 불성모양이였다.이미 만신창이 된 자신이 살아봤자 훤한 세상이 있을것 같지를 않았다. 한밤이 되자 그녀는 큰나무밑에 가 섰다. 로씨야 땅 그자리에서 자기 생명을 마칠 각오를 하였던것이다. 준비한 끈으로 목을 감노라니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순간 아들 장수의 부름소리가 귀전을 때리듯하였다.

《어머니! 어머니!》

(안돼, 아들이 기다고있는데…장수야-)

그녀는 세차게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이튿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안도할머니가 곁에 다가앉아 자신을 나무람하는 눈길로 쏘아보고 계셨다. 할머니는 어느새 주사약값마저 치렀던것이다.  7일째 주사를 맞고나니 더는 머리가 빠개지는것 같지 않았던것이다. 삶의 희망이 보이자 그녀는 이젠 더 맞지 않아도 될것 같다는 진단이 떨어졌는데도 두대를 더 맞았다. 새이빨도 해넣고 4개월만에 개운한 기분으로 퇴원한 그녀는 더 열심히 돈을 벌어 아들에게 집 한채라도 마련해주려 이를 옥물었다.

다시 열쇠가공기계를 돌리며 아글타글 푼돈을 모아 안도할머니의 빚부터 갚느라 애썼다. 그러는 그녀의 앞에 안도할머니가 웃으시며 다가왔다.  그만 하고 어서 아들 만나러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다. 《아직도…》 그때까지 안도할머니 빚만도 5000여원이 남아있었던것이다. 《빚이 뭐 대수요? 있는 돈으로 차비를 해갖고 어서 돌아가오.》

집으로 아들 보러 가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그동안 몇번이고 집과 련락을 가졌어도 련계가 닿지 않아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모른다. 집은 옮겨져 전화련락이 안되는가 하면 친정쪽에서도 한국으로 또는 도회지로 자리를 뜨다보니 어디도 련락할수가 없었던것이다. 마침 중국으로 오는 인편에 주소를 적어보내여 겨우 아들과 련락이 닿았다.  그녀는 전화기에서 아들의 목소리를 력력히 들었던것이다.

《어머니, 돌아올 차비가 없으면 제가 부쳐보내겠습니다. 걱정말고 돌아오십시오.》

아들의 목소리를 똑똑히 귀가에 들려오는순간, 어쩌면 환각같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곬을 치며 흘러내렸다.

얼마나 듣고싶던 아들의 목소리였고 얼마나 돌아오고싶었던 집이던가. 하건만 정작 집으로 돌아오자고 보니 무릎아래 자식이면 사탕알이라도 사주며 달랠수 있으련만 키너머갈 아들앞에 빈손으로 마주선다는것 또한 부모이름자를 띠고는 역시 못할 일이였다. 그래서 쉽게 못들어선 집이였고 그래서 쉽게 만나지 못한 아들이 아니였던가.

그러나 필경은 자신의 피줄이고 언젠가는 이 엄마를 리해해 줄날이 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그녀더러 감히 발길을 옮겨딛도록 한것이다. 아직 장가들기전까지라도 엄마의 손이 필요한 아들이 아닌가. 이제라도 못다한 사랑 다하며 부모의 책임을 감당해보리라. 그런 작심을 하는동안 또 며칠이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작 집에 돌아오고보니  아들앞에는 말 못하는 《죄인》이 된 심정이였다. 이제라도 하나부터 백까지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 사랑모두를 행동으로 다할 도리밖에 없었던것이였다.

《언젠가는 아들이 이 엄마를 리해할 날이 오겠지요. 리해 못해도 괜찮습니다. 워낙 세상살이란게 그렇지 않습니까. 로고만 있고 공로가 없으면 말해봐야 변명이나 넉두리에 지나지 않지요. 남은 인생에 아들의 뒤받침을 잘하는것으로 보상해야지요.》

이것이 지금 그녀의 진정이였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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