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류연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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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류연산 칼럼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8.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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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데 어찌 효자있을까" 외할아버지 한탄 여전히 계속돼

나의 외할아버지는 일가 친척들한테서 효자할아버지로 통한다. 어머니 삼년, 아버지 삼년 시묘를 살았고 그래서 효자문을 하사받았다는 설도 있다. 6년 세월 묘를 지켜서 하루 세 끼 따뜻한 제상을 올리는 동안 나라는 일제한테 통째로 먹혀 버렸다. 의병항쟁에 나섰던 허 씨 일가친척들이 바로 조상 무덤가에서 일제한테 총살을 당했다. 그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으신 외할아버지는 "나라가 없는데 효자가 있을쏘냐!"라고 한탄하고 가족을 데리고 분연히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남부여대하고 떠난 일가식솔들의 보따리 속에 제일 귀중한 보물은 위패와 족보였다. 나라가 뿌리라고 하면 가족은 가지일 것이다. 걸음걸음 피눈물 고인 만주행에 아침이면 떠나면서, 저녁이면 묵으면서 조상 산소를 지키지 못한 불효를 빌고 이제 다시 나라를 찾아 그 뿌리에 가지를 접목할 것을 다짐했다. 외할아버지가 자리잡은 곳은 현재 중국 길림성 화룡시 덕화진 상화촌이었다. 원래의 마을 이름은 개시앙골, 개사냥골의 함경도 방언으로 개를 풀어서 사냥을 했던 오지였다. 한일합병 이후 홍범도 등 사포수들의 아지트로 제격이었고 그 후 1940년대 초까지도 독립투쟁이 지속되어온 고장이었다.

마을 이름의 유래설로 미루어서도 얼마나 삶의 환경이 열악한 곳이었을까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숲이 깊고 땅이 습해서 감자농사가 주업인데 그나마도 멧돼지 성화에 수확을 눈앞에 두고 폐농이 십상인 고장이었다. 소작농의 삶이란 등이 휘고 뼈빠지는 노동의 반복이었고 세월이 갈수록 가난 저축밖에 안 되는 신세였다. 그렇다고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하늘 높고 땅이 넓어도 역성을 들어줄 곳이 없었다. 유일한 믿음은 방안에 고이 모신 위패였다.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하고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소금반입이 금지되어 있던 때에 무산에서 소금을 밀수입하여 독립단체에 넘겼고 그 혐의로 1941년에 경찰에 잡혀 일본인 순사한테 상투를 껴잡혀서 매를 맞으셨다. 간신히 고문을 이기시고 집으로 돌아오자 외할아버지는 가위를 들고 상투를 썩뚝 잘라 버렸다. 수지부모라고 금지옥엽처럼 다루어온 머리칼이 일본인한테 더럽혀졌다고 수치스럽게 여기셨던 것이다. 그리고 원통함을 참지 못하시고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63세를 일기로 1943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결국 당신은 개사냥골에 무덤으로 종지부를 찍었고 데릴사위로 들어간 우리 아버지에 의해 윗방에 위패로 모셔졌다. 그리고 세월은 수십 년이 흘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위패며 족보며 불태워졌다. 위패 대신 모택동을 모시고 하루 세 끼 만수무강을 축원했고 혈육의 정보다 공산당의 은덕에 목이 메어야 했다.

땅에 꽂힌 버들가지에 뿌리내리고 가지가 나고 잎이 무성해지듯 우리의 친가나 외가처럼 조선족 전체가 뿌리가 뽑혀 나갔다. 뿌리 없는 나무는 죽기 마련,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어서부터 60년 세월이 흐르고 나자 조선족 사회는 급속한 동화의 양상을 보였다.

아버지 류민상(柳敏相 1910~1984년)과 어머니 허숙(許淑 1918~2005년)은 생전에 고향이야기며 가까운 친척들의 성명을 남기셨다. 1990년 한국에 간 나는 친가와 외가편을 찾아보았다. 아버지의 고향은 강원도 춘천 남면 후동리, 남면에는 친척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고향 강원도 홍천군 내천면 성바우골로 기억하는 어머니의 고향은 알 수가 없었고 양천 허 씨들도 만났으나 외가 혈육들은 좀해서 나타나지를 않았다. 1992년에는 중국에 사는 아버지 삼형제와 그 후손들이 고흥 류 씨 족보에 기재되었다. 그러나 외가편은 소원하기만 했다. 효자할아버지는 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반쪽이 되어 조상을 찾아간 셈이었다.

개혁개방이 되고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족들은 너도나도 한국의 혈육들을 찾아 족보에 이름들을 올렸다. 그 중에는 개별적으로 국적을 옮긴 사람도 있지만 절대 대부분 외국인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하나의 뿌리였는데 반쪽이 되어 돌아온 조선족은 여전히 소외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가족의 뿌리는 자기의 혈통이 귀속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없는데 어찌 효자가 있을 수 있느냐." 외할아버지의 한탄이 오늘 외손자의 대에까지 연장되어가고 있음을 듣는다.

연변대학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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