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觀察)과 인식(認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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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觀察)과 인식(認識)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8.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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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우의 수필 99>

버스를 타거나 기차 여행을 하게 될 때면 나는 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어떻게 생겼으며 옷은 무슨 모양이라든지, 이럴 때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저럴 때에는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살펴본다. 그러노라면 자못 흥미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것을 죽 해오다 보니, 인간의 관찰이란 얼마나 주관적이며 또 부면적(部面的)인가를 알게 되었다.

가령, 젊은 여성 한 분이 차에 올랐다 하자. 맵시 있게 옷을 차려 입고, 몸매도 날씬하다. 얼굴도 제법 예뻐 보인다. 그런데, 어디가 어떠해서 예쁜가 하고 하나하나 뜯어보노라면 별로 예뻐 보이지를 않게 된다. 처음 보았을 때의 예쁜 느낌은 사라지고 그저 평범하게 보이게 된다.

이런 것은 밉다고 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서, 예쁘다고 보면 예쁘게 보이고, 밉다고 보면 밉게 보여지는 것이다. 어쩌면 내게 미추(美醜)를 판별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다시, 바다 위를 날고 있는 갈매기에 대해서 생각하여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망한 바다에서의 외로움을 달래 주는 새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꿈과 낭만이 깃드는 참으로 착하고 멋진 새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갈매기의 실제 생활 모습은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이기적이며, 가장(假裝)할 줄도 아는 지나칠 만큼 약은 새이다. 알을 낳아도 아무 것에게서도 해침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가파른 절벽의 중간 틈에다 낳는다. 또 바다 위를 한가로운 듯이 날아다니다가도 먹이가 물 위에 떠오르면 재빠르게 내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찍어 오르곤 한다.

거리에 서서 교통정리를 하는 순경만 해도 그렇다. 바쁘게 가던 사람들은 그가 자기의 갈 자유를 막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본다면 그는 질서 있는 자유를 여러 사람에게 베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질서가 없는 혼란에서 오는 더 큰 자유의 제약을 그는 막아 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우리의 이성적 판단에도 달리 나타난다.

반딧불로 책을 읽은 차윤(車胤)이나, 겨울에 눈빛[雪光]으로 책을 본 손강(孫康) 같은 사람을 많은 사람들은 모범적인 독서가(讀書家)로 손꼽고 있다.

그러나, 실상 현실적으로 냉철하게 비판해 본다면, 그들은 퍽 게으르며 비능률적인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책을 읽을 만큼의 빛을 낼 많은 반딧불들을 잡아야 했을 터인데 그것을 잡는 시간과 노력을 따져 본다든지, 영하의 추위를 견디며 차디찬 눈 속에서 그냥 배겨 내겠다는 그 게으름 같은 것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어처구니가 없게 된다. 차라리 관솔불이나 기름불을 만들어 쓰기가 시간적으로나 노력면에서 보더라도 훨씬 더 현명하며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사물은 관점에 따라서 매우 다른 인식을 갖게 된다. 어떤 사물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 또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인식이 매우 큰 차이가 나게 된다. 때로는 정반대가 되거나 대립적인 인식을 가져오게도 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매우 슬퍼서 울었다. 한참 울다가 그는 왜 내가 우는가 스스로 물어 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운다고 생각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이 과연 슬픈 일인가? 과연 내가 이처럼 슬퍼서 우는 것일까? 무엇이 슬프다는 말인가? 이렇게 스스로 묻노라니, 슬픈 마음은 어느 사이에 가시어지고 눈물도 나오지 않더란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처음의 관점과 뒤의 관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슬프게 느꼈을 때와 슬프지 않게 느꼈을 때의 그의 관찰 위치는 매우 다른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슬프고 슬프지 않은 큰 인식의 차이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에 대한 것도 그 관점에 따라서는 인식이 매우 다르게 됨을 생각할 때 우리는 사물들에 대한 관찰은 다각적인 면에서 행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여러 가지 면에서 여러 각도로 살펴보고 판단하여 인식하여야만 할 것이다. 일부분만 관찰하다가는 어떠한 편벽된 인식을 가지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코끼리에 대한 설명을 제각기 만져본 대로 늘어놓더라는 우화 속의 장님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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