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로 이딸은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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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로 이딸은 자랑스럽습니다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8.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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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희 글

항일로간부이며 일가족 6명을 항일렬사로 잃은 아버지, 최운학을 그리며

 

혁명렬사 최남학의 딸 최금선(왼쪽)과 저자.

[최성희씨는 문화대혁명후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된 첫해 연변의학원에 입학하여 77년급 대학생으로 되였다. 지금은 연변사회정신병원 중층지도일군으로, 정교수급 주임의사로 활약하고있다. 편집자 주]

어머니 노래는 많고 많아도
아버지 노래는 없었답니다
… … … …

매번 이 노래를 듣고 부를 때마다 나는 세상을 달리 한 아버지를 상기하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수가 없다.저 산과도 같은 아버지, 항일로간부인 아버지의 거룩한 존재를 뒤늦게나마 알고 눈물이 앞을 막게 된다. 청명이 오니 더더욱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길이 없다.

(1)

나의 아버지는 최운학이라고 부르며 항일투사로 활약할 때는 최영림으로 통했다. 이런 아버지께서 우리들의 부모가 되시기 전 피어린 항일시절에 아버지 일가족 6명을 항일렬사로 잃은 아픔을 지니고있었고 또한 아버지도 지난 세기 30년대에 벌써 항일투쟁에 친히 몸담고 뛰였다는것을 우리는 썩 후에야 알았다.

알고보면 아버지는 그제날 화룡현 월청사 지신촌 곡구미 (창신평, 오늘의 도문시 월청향 지신 6대)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5남매중 막내로 태여나셨다. 1930년 5.30폭동이후 아버지의 큰형님 최상학과 형수, 둘째형님 최병학과 형수 리동순, 셋째형님 최남학과 형수 모두가 중공당원으로 자라났고 중공개산툰구위 산하의 한개 지부에서 활동하였었다. 둘째형수 리동순은 지부의 부녀회 책임자로 활약하였는데 여기에는 아버지 일가족의 항일사를 그린 단편이 있어 인상적이다.

1931년 가을, 연변을 휩쓴 추수투쟁의 불길은 월청일대에서도 거세차게 타올랐다. 개산툰구 사광사의 수천명 군중들이 중천평, 삼동포를 거쳐 창신방향으로 내려왔다. 월청사의 군중들까지 합치니 대오는 신속히 근 만명으로 늘어났다. 동순이와 남편, 두 시동생은 기신촌의 투쟁골간으로 시위대렬에 뛰여들었다.

수천명 시위대렬이 석건평아래 바위굽이에 이르렀을 때 두만강 대안의 조선 일제 수비대와 남양평, 걸만동 경찰서의 100여명 놈들이 마차 30여대를 가지고 길을 막아나섰다.

체포된 사람들은 32명에 달했다. 적들이 그들을 마차에 싣고 조선으로 건너가려 할 때 군중들이 결사적으로 막아나서며 동지탈환투쟁을 벌이였다.  32명 동지들속에는 기신촌 사람만 해도 6명이였는데 그속에는 리동순의 시동생 최영림과 황금송도 들어있었다.

리동순은 부녀들과 함께 주저없이 마차에 올라 말고삐를 낚아채며 《내 동생을 내놓아라!》하고 소리쳤다. 잇따라 부녀들이 아우성을 쳤다.

《내 남편을 내놓아라!》

《내 오빠를 내놓아라!》

《내 아들을 내놓아라!》

수천명이 함께 외쳐대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놀란 적들은 어쩔바를 몰랐다.

동지탈환투쟁은 해질녘까지 계속되였다. 군중들은 끝내 결박당한 30여명의 동지들을 몽땅 풀어냈다. 나중에 동순의 시동생 최영림과 황금송, 황운룡, 백원춘 등 10여명의 투쟁골간들이 적들에게 끌려갔다.

이는 2007년 10월 민족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조선족력사학자 리함선생의 항일렬사전기―《겨레 항일지사들》(전4권)제2책 리동순 전기부분에 씌여진 편단이다. 이를 보면 아버지는 1931년 가을 그 시절에 벌써 곡구미, 걸만동, 마패의 3개 소대로 무어진 소선대중대의 곡구미 소대장으로서 온 연변을 휩쓸었던 1931년 가을의 군중적추수투쟁에 뛰여들었다는것, 아버지 일가는 그번 추수투쟁의 지방투쟁주력이였다는것을 알수가 있다.

(2)

1932년 봄부터 일제놈들의 대거토벌이 시작된 후 아버지의 맏형 최상학과 그의 안해는 조직의 지시로 서남으로 수십리밖의 두만강가 개산툰 연두봉일대로 전이하게 되였다. 그러다가 추위와 굶주림에 어느한 마을로 내려왔다가 불행히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여 한집에 갇히여 살해되고만다.

아버지의 둘째형인 최병학은 지방투쟁으로부터 화룡현 대구유격대의 골간으로 나타난다. 둘째형님 부부는 적들의 주의를 일으켰기에 당조직에서는 그들 둘을 화룡현위가 활동하고있는 평강구로 파견하였다. 그때 그들 부부에게는 애어린 딸애가 있었는데 지방에 떨구어둘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3년 봄이후 어랑촌근거지에서는 얼토당토않은 반《민생단》투쟁이 벌어졌고 둘째형님 최병학은 숱한 동지들과 더불어 민생단으로 몰리다가 1934년 5월 어랑촌근거지 버섯골에서 피살되고 리동순은 남편에 앞선 1934년 새해벽두에 현위의 지시로 근거지 반일회 회장 김승학과 같이 현안의 삼도구일대를 돌아보고 오다가 토산자 쟈피거우 일대서 적들과 맞띄워 포위돌파중 적탄에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셋째형인 최남학은 신씨 녀인과 결혼하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다. 1932년 봄이후 적들의 거듭되는 토벌로 낮이면 등산생활, 밤이면 하산생활로 투쟁을 견지하며 일제놈들이 새로 부설하는 연길현 조양천―개산툰구간 철도파괴투쟁에도 뛰여들었다.

산속생활에 네살짜리 딸애가 문제거리였다. 그들은 딸애를 화룡현 덕신사 남양평 서쪽너머 달라자의 한씨네 집에 부탁하고는 주저없이 떠나갔고 월청일대의 어느 고장에 땅굴을 파고 땅굴생활을 하다가 주구의 밀고로 기습당해 비장한 최후를 마치였다.

아버지는 손우 누나 최귀인과 두살 차이였다. 1931년 추수투쟁때 17살인 아버지는 누나와 함께 소선대원으로서 삐라를 뿌리고 통신을 나르는 일들에 발벗고 나섰다.그러다가 아버지는 연길현 동성용 베틀골(동성9대)로 전이하여 활동하다가 적들에게 그만 체포되여 연길감옥에서 비인간적인 8년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3)

옥중생활 8년에 해방을 맞자 아버지는 그대로 풀려나와서 계속 혁명사업에 뛰여들었고 왕청현 동신팔인구 일대에서 토비숙청투쟁에 나섰다 지난시기 50년대 아버지께서는 왕청현 동신구위서기로 활약하시였다.아버지는 후에 왕청현위에 제발, 1956년도에는 전국로동모범으로 수도 북경에 가서 모택동, 류소기, 등소평 등 중앙수장들의 접견을 받았으며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도 지니셨다.아버지께서 왕청현 부현장, 농업국 국장으로 있는 기간에 우리들은 거의 아버지의 모습을 대할수 없었다.후에 또 한번 전국로동모범 칭호를 받고 중앙당교에서 학습할 기회를 가지셨다.

1965년에 아버지는 주덕해와 남명학의 부탁을 받고 연길현 동성원종농장 농장장으로 부임하셨다.. 이듬해 1966년에 문화대혁명의 폭발로 하여 아버지는 자치주정부에 올라가지도 못하시고 여생을 그대로 농장에서 보내셔야 했다. 그러던 아버지는 66살 되는 해에 정년퇴직하고 계속 로인협회 회장으로 활약하시다가 1994년에 81세를 일기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또 이해 청명을 맞으니 해마다 청명이면 조양촌렬사기념비에 모셔진 둘째형에게 술을 붓고 제를 지내던 아버지의 모습이 삼상하다.

아버지, 50대 중반에 오른 딸 최성희가 뒤늦게나마 영광에 찬 아버지의 혁명력사, 가문의 항일력사를 더듬으며 술을 붓고 절을 올립니다, 아버지의 명복을 비옵니다, 아버지는 훌륭한 항일로간부였지요!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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