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成都)는 중국 사천성(四川省)의 수부 도시이다. 면적이 약 57만 평방킬로미터로 남한의 6배이고, 인구도 8400여만 명이어서 우리의 두 배 정도가 된다.
이 성도에는 특이한 이야기 두 가지가 전해 온다.
하나는 무후사로 불리는 일이다.
속칭 무후사(武侯祠)는 성도 시내에 있는 제갈량의 사당이다. 이곳에는 유비의 묘인 혜릉(惠陵)과 한소열묘(漢昭烈廟) 등 촉왕(蜀王) 유비(劉備)와 관련된 것들이 훨씬 더 많다. 정문의 현판도 한소열묘라 했다. 유비전에 걸린 “업소고광(業紹高光)”이란 유비를 계승하여 한(漢)의 고조 유방(劉邦)과 광무제 유수(劉秀)가 제업(帝業)을 크게 일으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무후사로 불린다. 유비가 위업(偉業)을 일으켰어도 제갈량의 삶이 워낙 훌륭해서 보다 더 존경받기 때문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제갈량과 관련된 것이다.
무후사 경내에는 쌍문백(雙文柏)이라 불리는 잣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제갈량이 심었다는 이 잣나무는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했다. 유명한 한의약서인 이시진(李時珍)의 『本草綱目』에도 이 나무의 가지나 잎은 가히 약으로 쓸 만하다고 나온다.
그런데,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건청궁(乾淸宮)을 중건할 때 소사마(小司馬)인 빙청(憑淸)이 황제에게 이 두 잣나무를 목재로 쓰자고 청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이 잣나무를 베려하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까마귀 떼가 날아와 나무를 베려던 사람들을 쪼아대서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렸다. 이에 놀라서 사람들이 사방으로 달아났다.
보고를 받은 빙청이 달려가서 그 쌍문백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사죄하고 화를 풀 것을 청하며 다시는 나무를 베려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러자 까마귀 떼들이 흩어졌다고 한다.
또 북송(北宋) 초년에 도감(都監) 조빈(曹彬)이 무후사를 보고는 전당(殿堂)이 웅장하고 위엄이 있음을 투기하였다. 그래서 무후사를 헐어내고 다시 작게 세우도록 명령하였다. 제갈량은 “평범한 사람으로 공적도 크게 세우지 못했다. 조조(曹操)의 위(魏)나라와 싸워서 승리하지 못해서 촉한(蜀漢)을 중심으로 통일하지 못했고, 또 사람을 알맞게 활용하지 못해서 촉나라에 대장군이 없어서 앞장설 사람이 없게 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의 전쟁 속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하면서 여러 차례 기산(祁山)에 나가 쓸데없이 싸우면서 전공도 이루지 못하다가 끝내는 조조의 위나라에 소멸되고 말았다고 폄하하였다. 그러므로, 이처럼 훌륭하고 웅장한 사당이 가당치 않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명전(孔明殿)의 한 모퉁이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떨어져 내린 기와더미 속에 갑자기 하나의 비석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오직 송(宋)나라 조빈만이 내 마음을 헤아렸다”는 글이 써 있었는데, 글자들이 방금 새로 쓴 것 같이 선명하였다.
조빈이 이를 보고는 두려워하여 황망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제갈 선생은 진짜 성인(聖人)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전당을 다시 빨리 복구하도록 분부하고, 무후사에 새로 회랑(回廊)을 추가하여 건축하였다. 그 뒤로 무후사의 향화(香火) 더욱 왕성해지게 되었다.
오래된 나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은 그것에 무슨 정령(精靈)이 있다고 믿어서라기보다 그 오래됨을 가상히 여기며 기리는 마음이다. 더구나 사당의 나무를 베려 하는 것은 그 주인을 경솔히 대하는 것이니 어찌 이로울 수가 있겠는가.
남을 존대하고 숭상하면 칭찬을 받고, 경멸하고 폄하하면 그 자신 또한 비난받게 된다. 헐뜯고 깎아내림에는 소인도 노여워함인데, 하물며 만인이 존숭(尊崇)하는 분에게야…. 빙청(憑淸)이 쌍문백을 베려 한 것도, 조빈(曹彬)이 무후사를 헐려 한 것도 다 훌륭한 삶을 산 제갈량을 업신여기고 깔본 것이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조용할 수 있겠는가. 이 어찌 신비하거나 신령스러운 일로만 치부할 일인가. 혜릉이나 유비묘로 부르지 않고 제갈량의 사당 무후사로 불리는 뜻을 새겨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