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일전 한국 서울 강남구 베스티남병원 입원실에서 ‘1.7’리천화재참사(리천시 호법면 랭동창고 ‘코리아2000’에서 발생)의 유일한 조선족 생존자 임춘월(46세)씨를 찾아보았다.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은것은 모두 고마운 여러분들의 덕분이예요.”
한쪽 눈과 코, 입만 내놓은 채 전신이 붕대에 감겨있는 임춘월씨는 힘겹게 앉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입원하여 지금까지 대 수술 6차, 총 9차례 수술을 받은 임춘월씨는 화재참사현장의 13명 조선족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다.
40 명 생명을 앗아간 화재사고발생 당 날, 임춘월씨는 남편과 가지런히 현장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다.
“불 났다, 불이 났다!”
문득 누군가 웨치는 소리에 임춘월씨는 옆에서 한창 일하던 남편을 끌었으나 웃층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들을 기다렸다가 함께 나가야 한다며 남편은 빨리 먼저 나가라고 임씨를 떠밀었다. 임춘월씨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밖으로 뛰여 나왔다. 뒤이어 ‘쾅!’하는 소리와 함께 화염에 휩싸였다. 삶의 본능으로 그녀는 땅에서 뒹굴었다. 이때 한 현장에서 일하던 우즈벡 아저씨가 달려와 그녀의 몸에 달린 불을 꺼주었다…
임씨는 뒤이어 곧바로 차에 실려 린근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대충 상처를 싸맨 그녀는 곧바로 서울 강남구 베스티남병원으로 옮겨졌다.
자꾸만 눈이 감겨졌다.
“잠들면 안돼요. 꼭 정신을 차리세요.” 의사와 간호원들의 간절한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의사들은 그때 의식을 잃으면 다시 깨여나기 힘들거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의식만은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도란도란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임춘월씨는 그때 현장의 생생한 목격자로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였다.
병원측은 그녀에게 ‘3도 화상’이란 진단을 내렸다. 임춘월씨의 생사를 두고 “아직 한주일 정도 지나봐야 알 것”이라는 병원측의 말에 임씨의 언니 임춘화씨는 련 며칠 밤낮 동생을 간호하느라 3차나 까무러쳤었다. 그녀는 “제부를 잃은 내가 동생까지 잃어서는 안된다”며 낮에는 현장에 일하고 밤이면 병원에 달려와 동생을 간호했다.
2000년 비즈니스차로 한국에 입국한 임씨는 몇 년간 남편과 함께 불법체류자로 일하다가 한국정부의 정책 완화로 2006년 7월 재 입국하면서 합법적인 신분으로 한국에서 취직해 일하게 됐다.
한국에 재 입국한 임춘월씨는 남편과 나란히 한 현장에서 일하면서 열심히 돈을 모았다. 그간 모은 돈으로 고향 영길에 아파트도 한 채 사놓았다. 만년에 남편과 아기자기 살아갈 ‘보금자리’를 마련해 놓은것이다.
남편의 사망소식을 들은것은 기자의 취재를 받기 이틀 전날, 그러니 꼭 남편이 사망한 2개월만이다. 그것도 우연히 친척들간에 오가는 말에서 낌새를 챈것이였다. 친척들은 임씨의 건강과 심리상태를 념려해 여태껏 숨겨두었던것이다.
나이가 동갑인 남편은 화재사고발생 화염에 휩싸여 더는 깨여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임춘월씨는 “화상으로 중상을 입은 남편이 현재 다른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중”일거라며 “빨리 병이 완쾌되면 남편부터 찾아보아야 겠다”고 벼르고 있었던 참이였다.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임씨는 남편의 말을 꺼내자 숨이 거칠어지며 눈시울부터 젖어 들고 있었다. 남편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사랑하는 이를 처참하게 저승에 보낸 가슴 터지는 애닯음 때문이리라.
처음 남편과 함께 한국에 입국하여 제 각기 일거리를 찾았으나 “아이구, 요렇게 이쁜 아줌마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지?”라며 어중이 떠중이들이 쩍하면 치근덕거리는 바람에 임춘월씨는 아예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때부터 같이 한 현장에서 일했다고 했다.
“참, 저렇게 떠나려고 그런거지 요 2~3년 동안은 저를 각별히 잘 돌봐 주었어요. 퇴근후면 밥도 지어놓고 빨래도 하고… 일터도 나란히 같이 다니고 함께 일할 때면 모두들 부러워하는 눈길로 우리를 쳐다 봤지요.” 달콤했던 그때를 회상하는듯 그녀는 도란도란 말을 이었다. “이제 돈 좀 벌어 잘 살 때라고 생각했는데…그만…”그녀는 드디여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잇지 못한다…
“참, 정부에 감사를 드려야 겠어요. 한국정부도 그렇고 중국정부도 그렇고 너무도 고마웠어요.” 임춘월씨는 화재발생 당시 자기를 구해준 생면부지의 우즈벡 아저씨가 고마웠고 서로 다투어 차량을 들이대며 병원으로 호송하겠다던 화재현장에 있던 한국분들이 고마웠으며 사고발생 후 주 한국중국대사관과 령사관의 관계일군들이 몸소 현장과 병원까지 찾아와 위문해준데 대해 고마움을 전했다.
“생명이 일각을 다투던 그때 한국 아저씨들이 서로 다투어 차로 저를 싣고 병원으로 달렸지요.” 임춘월씨는 그때 조금만 시간을 지체했어도 자기는 살아남기 힘들었을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또 “사고발생 후 중국의 호금도 국가주석과 온가보 국무원 총리께서 사후처리를 잘 할것을 주 한국 중국대사관에 지시한 소식을 병원에서 들었어요. 그리고 중국대사관과 령사관의 책임자들이 몸소 사고현장과 병원을 찾아 위문해준데 대해 더없는 감격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에서 리천화재참사의 수난자를 위해 의연금을 모금했다는 소문도 들었다”며 정부의 튼튼한 뒷심으로 현재 사후처사가 순조롭게 풀리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측은 화재로 인한 사망자에게는 7000만원(한화)의 보상금을 지불한 상태이며 뒤따른 보상도 협상중에 있다. 또한 임춘월씨 같은 중환자에 대한 의료치료 및 보상도 협의중에 있는것으로 알려졌다.
“병이 완쾌되면 계속 한국에 남아 일하고 싶어요.” 임춘월씨는 옆에서 병 시중을 드는 다 자란 아들을 대견스레 바라보며 “이젠 전에보다 더 억세게 살아야지요. 자식을 위해서라도 더 굳세게 살고싶어요.” 라며 말끝을 맺었다.
흑룡강일보/박진엽 기자 전길운 특약기자 chaoy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