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봉호에 실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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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봉호에 실은 꿈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8.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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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시인 수기>
 부우- 부우- 부우-.

 긴 뱃고동의 여운을 남기고 니가타 항(新潟港)의 푸른 바닷물을 힘차게 가르며 만경봉호는 북한의 원산항을 향해 육중한 선체를 움직였다.

 천국의 꿈에 들떠 조국의 품에 안기는 순간, 그 순간이 일생일대 돌이킬 수 없는 비운의 분수령이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첫 북송 이민객으로 만경봉호 선상에서 배웅 나온 가족과 친지 친척들을 향해 눈물 젖은 이별의 손수건을 흔들며, 성공한 한 가정의 주인공이 되어 다시 찾아올 날을 약속했던 젊은 부부의 꿈도 뱃고동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1959년 12월 14일 975명의 재일교포 북송 제 1진이 니가타 항을 출발한 이래 1967년까지 대략 8만 8천 명의 재일교포가 북한으로 입국했다.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생지옥의 늪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대표적인 케이스다.

 북송자는 대부분 재일동포가 주를 이루었으며, 재일동포와 결혼한 일본인 처도 많이 있었다. 직업별로는 일본 내에서 하층 계급에 속하는 공사장 인부, 일일 고용자, 공원, 상공업 종사자와 열성 조총련계 동포, 그리고 가족 단위의 이주로 인한 학생이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천지인 북한 땅에 가서 좀 더 잘 살아 보겠다는 환상의 꿈을 안고 이민선을 타게 되었다.

 

 그 당시 북한은 한국보다 더 나은 국가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책적으로 재일동포를 위한 경제적인 지원을 아낌없이 집행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로 인해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비처럼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북한으로의 이민을 꿈꾸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북․일간에 재일교포 북송 협상이 이루어지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아마도 우리나라가 36년간의 국권 피탈 문제를 앞세워 일본을 배척하는 국가 정책과 국민 의식으로 하여 빚어진 산물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과 북한의 대일 관계는, 초창기에는 한국이 일본을 적대시하였으며 북한은 오히려 친일적이었다. 그러던 게 시간이 지나면서 1965년 남한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는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고는 오히려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으리라.

 

 2001년 여름 연길 시내에 있는 모 호텔 방에서 북송 재일 조선인 탈북자 할머니와 인터뷰를 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필자도 함께 참석을 하게 되었다.

 탈북한 할머니는 1932년에 동경의 빈민가에서 맏딸로 태어나 조총련계 소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 소재 전신전화국에서 교환원으로 근무를 했다. 조총련 간부로 근무하는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결혼 전 앞날을 설계할 때부터 북한으로의 이민을 꿈꾸었다고 고백을 했다.

 

 아버지의 고향이 황해도이니 즉 조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셈이었다. 북송선인 만경봉호를 타기 이전의 아름다웠던 꿈은 역시 못 이룰 일장춘몽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일본에서 조센진이라는 차가운 눈초리를 피해 떠났던 게 그만 생지옥의 문턱을 자신도 모르게 넘게 되었다고 하소연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었으니 누굴 원망하랴. 북한에서 40여 년을 살다 보니 벌써 자신의 나이가 예순 아홉이 되어 편안하게 눈감을 날만 기다린다며 긴 한숨을 내쉰다. 이 길고 긴 사십 성상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한 시간여 동안 동생에게 보여줄 영상 편지를 녹화하며 할머니에게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소원이라면 지금은 소식이 끊겨 생사를 모르지만 일본에 살고 있을 여동생이나 한 번 만나보고 죽는 게 소원이라고 대답을 한다. 하지만 가난에 시달린 초라한 모습으로 보아 결국은 경제적인 도움을 바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앞선다.

 이민 초창기에는 여동생과 간간이 서신을 주고받았으나 근래에 와서는 서신 연락마저 두절되었다며 몹시 안타까워하고 있다.

 

 “나는 일본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이니 가능하다면 선생님들이 연락을 해 여기 연변에서 여동생을 만나 보았으면 좋겠습니다.”라며 말꼬리를 흐린다. 전에 할머니가 받았던 동생 편지의 주소지를 메모하고 그 날 할머니와의 인터뷰를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주소도 함께 메모를 했으며 가능하면 일본에 있는 할머니의 여동생을 찾아뵙고 오늘 있었던 일과 영상 편지를 보여주겠다고 굳은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 해 11월 초 비디오 저널리스트인 조천현 선생과 필자는 일본 방문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북송 탈북자 영상 편지뿐 아니라 2000년도에 출판했던 시인 심연수(沈連洙) 선생의 모교인 일본 대학 예술학부도 겸사겸사 방문해 심연수 선생의 발자취도 취재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12월 3일 일본 동경 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리타공항에 도착했다. 일본 동경으로 유학 온 조선족 학생에게 사전에 연락을 취해 놓았기 때문에, 그 학생이 자가용을 가지고 마중을 나와 편하게 이케부쿠로 역 앞에 있는 신세계 호텔에 숙소를 정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언어연수 차 동경에 와 있는 딸 친구인 유선이에게 전화 연락을 해 일본 대학 안내를 부탁했다. 유선이의 안내로 대학에 가서 1940년대 전후 학적부를 열람하였으나 심연수 선생의 입학과 졸업을 한 흔적을 일절 찾을 수 없었다.

 

 그 까닭을 추리해 보면 심연수 선생 졸업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으로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졸업생을 군인으로 징집했던 시기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심연수 선생은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고 부관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고향인 연변으로 피신을 했다. 졸업식을 기피하고 몰래 현해탄을 넘어 일본을 탈출한 괘씸죄에 걸려 대학의 모든 학적부에서 선생의 기록이 삭제되었으리라 추측된다.

 더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그 대학 교수의 안내로 한국 유학생을 찾으러 식당에 들르게 되었다. 교수님이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이 있으면 손 들어보라는 말에 식당 안에 있던 학생들은 잠시 동안 조용해졌고 재차 물어봐도 손을 드는 학생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식당 안 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수군대더니 여러 학생이 어떤 낯선 여학생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말을 건넨다. 그제야 얼굴을 붉히며 자기가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이라고 실토를 한다.

 외모로 봐서는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을 구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일본어만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다면 굳이 한국 유학생이란 신분을 탄로 내며 매몰찬 질시의 눈초리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떳떳하지 못하게 한국에서 유학 온 사실을 숨기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한국인보다는 일본인 행세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에 일어난 상황 같아 보였다.

 

 왜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었는가 한번쯤 짚고 넘어가도 좋을 것 같다. 뚜렷하게 이거다 하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연수 선생에 관한 일본 동경 내에서의 발자취를 찾아 봤지만 뚜렷한 소득은 얻지 못했다.

 이틀 후 시간을 내 준 유선이를 앞세우고 탈북 재일교포 할머니의 여동생 집을 찾아 나섰다. 메모해 온 주소지는 동경 외곽 지역에 위치한 동쪽 바닷가였다.

 어렵게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으나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몇 번인가를 계속해 누르니 일층 아주머니가 나와, 그런 분이 2층에 살고 있다는 대답과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온다는 말을 전한다.

 

 동네 분위기는 영세민들의 집거 촌 같아 보였고 우리나라로 치면 한산한 골목에 위치한 다가구 주택 단지 같아 보이기도 했다. 건축 구조는 순수한 일본식 목조 건물이었고 건축한 지 꽤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집이었다.

 묵고 있는 숙소에서 다시 찾아오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라 아예 온 김에 만나 볼 작정으로 쉴 곳이 있나 동네 근처를 돌아다니며 기웃거려 보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다. 한참을 걸어 나가 지하철 역 근처에서 카페를 찾아낼 수 있었고, 여러 시간을 그 카페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내고 늦은 밤 다시 아주머니 집에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다.

 풍파에 시달려 초췌해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2층 현관문을 빠끔히 열고 가로등도 없어 캄캄한 대문 밖을 내다보고는 누구냐고 묻는다. 대문 앞에서 찾아오게 된 사연을 대충 말씀드렸지만 그 말을 듣고도 망설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문 밖의 방문자를 경계하는 듯 한참을 말없이 머뭇거리다가 일층 대문으로 내려와 문을 열어주고 우리 일행을 방으로 안내한다.

 

 집 내부는 예상한 대로 허름했고 가난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쪽방이었다. 채 한 칸도 못 되어 보이는 응접실을 지나 다다미방으로 안내되었다. 집의 구조로 보아 영세민임엔 틀림없었고 60이 훨씬 넘어 오종종해 보이는 그 아주머니는 청소원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집으로 들어설 때 힐끗 본 일본인 남편은 몸이 불편하여 부인의 소득에 몸을 의지해 살아가고 있는 처지 같았다.

 인사를 나누고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집안 사정을 대충 이야기해 주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조총련 간부였으며 대쪽같은 성격 때문에 자식들도 일본 학교에도 못 다니게 하던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언니와 자신도 조총련계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고 알려준다. 아버지는 아주 오래 전에 타계했으며, 북한으로 이민 가겠다는 언니를 어린 마음으로 말렸으나 운이 없어 결국엔 이렇게 되고 말았다고 지나간 과거사를 털어 놓는다.

 

 우리 일행이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워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그러나 연변에서 녹화해 온 영상 편지를 읽는 언니를 바라보며 동생인 아주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만경봉호를 타고 조국으로 간 언니가 어렵게 산다는 연락을 받고는 자신의 살림살이도 어려웠지만 정성을 다해 뒤치다꺼리를 했다고 실토를 한다. 그러던 어느 해인가부터 일절 서신 연락이 두절되어 이제까지 소식을 모르다가 오늘에서야 살아 있는 언니 소식을 알게 되어 고맙다고 연신 치하를 한다.

 혹시나 언니를 만나러 중국 연변에 갈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엔, 마음은 있지만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고 또한 시간도 없다며 거절을 한다. 실은 가정 살림살이나 아주머니의 행색으로 보아 이 같은 질문에 대한 아주머니의 부정적인 대답은 아주 당연해 보였다.

 

 언니에게 보여줄 영상 편지를 촬영한다는 말에 아주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커다란 사진을 부둥켜안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두 시간 여의 대화와 영상 편지를 보여 준 후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때, 그 아주머니는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여비에 보태 쓰라고 일화 1만엔을 봉투에 담아 내민다. 오히려 우리가 보태줄 처지 같아 극구 사양을 했지만 선생님들의 고마운 뜻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간절한 뜻이라며 재차 권한다. 더 이상 사양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일만 엔이 들어있는 봉투를 받아 들고 우리도 몇 번인가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늦은 시간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도 씁쓸했던 그 순간의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 아주머니에게 일만 엔이란 막노동으로 번 정말로 큰돈인데 끝까지 거절하지 못한 죄책감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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