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사 연재 11
제8절 청나라조선인 명인
청나라 초, 조선기민의 후예 중 한패의 출중한 명인들이 솟아났다. 이들을 간단히 적어본다.
이사충(李思忠) 유명한 무관이다. 1644년 팔기군을 거느리고 섬서로 쳐들어가 동관을 점영하였고 강남으로 잔군하여 양주를 함락하였다. 장강남북 10개 주, 현의 반청세력을 숙청한 그는 그후 지방의 최고군사장관인 섬서제독으로 임명되였다. 그의 둘째아들 이음조(李?祖)도 많은 공을 세워 청나라의 병부상서로 있었다. 이음조의 아들 이병(李炳)은 강희년간 병부시랑으로 있다가 그후에는 지방의 최고행정장관인 안휘성 순무(巡?)로 되었다. 이사충의 셋째아들 이현조(李?祖)는 강희년간에 광동 수사제독으로 있었다.
한걸은(?杰殷) 청나라 초기에 《1등경차도위(??都蔚)》로 있은 한니(?尼)의 아들로서 정홍기만주부도통(正?旗?洲副都?)으로 있었으며 강희년간에는 수도위수 최고장관인 호군통령(????)으로 있었다. 그의 동생 한나진(?乃秦)은 흑룡강부도통으로 있었다.
상명(常明) 청나라 초기, 정황기 제4참령 제2고려좌령인 김선달의 외손자 상명은 건륭년간에 령시위내대신(즉 궁전 내무대신)까지 하였고 태자태모의 벼슬을 추가 받았으며 사망후에는 건륭황제로부터 의근(懿勤)이라는 익호까지 하사받았다
김간(金?) 《요동문현정략》에는〈高?性不??于?洲八旗,如金?亦高?. 隆年?以文??主知,其女后被?入?,遂命???府??正?旗,后遂以金?????管大臣,???也。》라고 적혀 있다. 김간은 건륭년간에 내무부 대신으로 있으면서 사고(四?)전서의 부총재를 맡았다. 무영전(武英殿) 취진판(聚珍版) 2891권을 간행할 때 조선의 동활자를 모방하여 고욤나무로 동활자를 만들어 인쇄를 하였기에 건륭황제는 취진판이란 이름을 선사하였다. 1792년에는 리부상서로 되었다. 그의 여동생은 건륭황제의 귀비로 되었다.
이세탁(李世倬) 《중국화가명인대사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籍,字?章,?谷?,?湖?督如?之子也。少?父?游江南,?王石谷,得其指授山水法,???退山游,又?其?生之?。其人物,官晋士?,得?道子水?道??而?之,遂悟其法。而花?,蔬果,各??意,盖得?舅氏高且?之指墨,而易以?,故能各名一家.》 청나라 건륭년간의 화가로서 양호총독 여용의 아들이며 왕석곡, 마퇴의 진수를 전수 받아 산수화, 화조화, 과실화 등에 뛰여난 재주가 있었으며 단독적인 한 개 유파를 형성하였다.
안기(安岐) 청나라 건륭년간의 저명한 서화감상가이다. 자는 의주(?周)이고 호는 려촌(?村) 또는 송천노인(松泉老人)이다. 서예와 그림을 애호하며 감상에 능하고 수장이 극히 풍부하다. 《묵연회관(墨???)》을 펴냈다. 진, 당나라 이후의 그림가작의 지묵감정, 인장진위감별에 있어서의 권위적 서적으로 되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그림을 건륭 황제에게까지 바치였고 건륭황제는 백은 1000냥을 은사하였다. 안기가 죽은 뒤 그의 소장품은 대부분이 건륭내부(?府)로 옮겨졌다. 안기에게는 여러가지 도장이 많은데 그중 가장 애용하는 것이 《조선인안기지인》이였다. 또 그가 천진에 호적을 두었기에 천진인이라고도 불렀다.
최?(崔?) 《요동문헌정략》에는《家象州,工人物士女,?焦秉?法,?染??,?情婉?,?未能方?古人,而翩翩足?一?矣,?梅亦佳,今官州牧》라고 씌여 있다.
김세속(金世?1852-1921) 조선 이주사람이다. 1875년 거인(?人)으로 되고 박식다학으로 소문난 그는 1896년에 총관내무대신 겸 공부시랑(工部侍?)으로 되었고 그후에는 종1품 벼슬인 협판대학사(??大?士)로 있다가 군기대신(?机大臣)으로도 있었다. 1909년 선통황제가 즉위하자 그는 퇴직하고 자정원 (?政院)총재의 신분으로 《덕종실록》의 편찬에 종사하였다. 죽은 뒤 태사(太?)로 봉되였다.
제4장 1910-1931년 조선이주민
제1절 원인과 동기
1. 사회배경
1910년 《한일합병》을 계기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였고 일제가 한국에 대한 식민지 정책은 본계도에 올랐다. 첫 번째의 총독 데라우찌는 곧 헌병경찰제도를 마련하는 동시에 조선민족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두 개 사단의 육군과 두 개 해군分遣?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각 군 소재지 에 수비대를 배치하고 현병경찰관에게는 ??에 이르기까지 87조항에 달하는 《즉결권(???)》과 강제집행권을 주어 조선인을 탄압, 살해했다.
헌병경찰제도는 1272개의 헌병대와 경찰서를 가지고 조선인의 의지를 묶어놓았으며 일반 국민에게는 그들의 필요에 따라 태형(苔刑) 등 전근대적인 형벌을 가하는 공포 속에서 식민지체제를 굳혀나갔다.
또 조선의 역사서, 충의전, 무용(武勇)전 등 20만 권의 책을 불살랐으며 조선민족의 렬등감을 고취하면서 조선민족문화의 말살과 민족혼을 매장하려 하였다. 조선인학교에 대해 대폭적으로 삭감하는 동시에 일본어의 보급과 일본인의 성격양성을 강제적으로 추진하였다. 조선인으로서의 지적인 발육의 길을 막았던 것이다. 이밖에 민족의 권익을 대변하는 어론기관과 집회를 폐쇄, 해산시켰다. 《황성신문(皇城新?)》,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大?每日申?)》가 폐간당했다. 또 모두가 익숙히 아는 안악사건 (安岳事件)과 신민회사건(105인사건)도 일어났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조선민족이 생존할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최대한으로 박탈하였다. 그 중요한 수단의 하나가 토지조사사업이다. 1910년에 본격적으로 착수된 이 조사는 1918년에 완료되였다. 이 근대적인 방법에 의한 가장 혹독한 토지약탈에서 총독부는 조선국토의 40%를 차지하였다. 몰락한 농민들은 화전민이 되거나 멀리 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조사에 사용된 경비는 무려 300만 원이나 되었다. 당시 총독부가 1년 예산중 교육비가 30만 원, 의료비가 40만 원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사진 1-04-01 영고탑 부근 조선이주민 부락
민족경제의 파탄은 수산업과 공업부문 등에도 나타났다. 모든 면에서 일본인이 우선권과 독점권을 갖고 있었다. 무단정치시대가 지속되였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직후 신임총독 사이또는 이른바 《문화정캠를 표방하였으나 기본방침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실질적으로는 더욱 강화되였다. 3.1운동 이전 에는 헌병과 경찰이 1만 4358명이였으나 이른바 《문화정캠가 실시된 이후에는 2만 771명 (1922년)으로서 약 절반이 늘어났다. 이 시기 조선인의 일본화정책, 조선인과 일본인간의 결혼장례, 조선인에 대한 고등교육저지(阻止) 등이 실행되였다.
동시기 중국에서의 일본인의 침략도 발걸음을 멈출새 없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의 탄생을 보아 2000여 년 봉건군주제도를 결속지었으나 중국은 여전히 대, 소 봉건군벌의 혼전하에 있었으며 반봉건, 반식민지의 성격은 추호도 변화가 없었다.
철도의 개통으로 일제는 간도상품원료시장의 독점을 가속화했으며 대량의 렴가상품을 쓸어왔다. 천, 면화, 방직물, 해산물,석유 등 많은 소비품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였으며 일본의 금융자본은 점차 금융시장을 점하였다. 일본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동아권업유한주식회사》를 통하여 토지를 미친듯이 강점하였다. 1926-1931년 6년 사이 《동척》은 간도에 826만 원을 투자하여 토지상조, 농업자금대부금발행 등 명목으로 고리대를 풀어 12만 무의 토지를 빼앗았다. 1929년부터 《동아권업》도 간도일대에 마귀의 손길을 뻗쳤는데 1931년에 이미 7209헥타르 토지를 수매하였다.
《동아권업》은 남만에서도 토지를 수매하였다. 그들은 각종 수단으로 군벌, 관료, 지주의 대량의 토지를 《상조》하였으며 일본토지경영자에게 자금을 주어 그들이 토지를 구매하게 하였다. 또 《중일합작》의 명의로 중국정부를 기편하면서 토지를 구입해 들였디. 1926년 《동아권업》은 만주에서 토지 12만 3000여 헥타르를 구매 또는 《상조》 하였다. 동시에 일본의 大? 등 자본그룹도 토지를 강점하고 농장을 경영했다. 1927년 10월 통계에 따르면 일제는 동북에서 토지 16만여 헥타르를 빼앗았다. (《?蒙?日本帝?主?》 ???)
철도의 부설은 조선이주민의 만주이주에 큰 편리를 주었다. 1911년 봉천당국은 봉천수리국을 각 지방에 앉혔으며 《수전농사장례장정》을 반포하였다. 1912년 중동철도, 남만철도, 안봉선의 개통, 압록강철교의 가설 등으로 인해 조선이주민의 정착지는 봉천, 관동주로 남하하게 되었고 다른 갈래로는 흑룡강과 우수리강 유역에 분포되였다가 진일보로 수원, 요하 쪽으로 확산되였다. 1922년후에는 북쪽으로는 할빈, 치치할까지,동쪽은 중소변경, 해림, 일면파에 이르렀으며 서쪽도 열하, 장자구방면까지 닿았다.
2. 이주원인
20세기전후 대폭 장성세를 보이고 있는 조선이주민의 만주진출은 그 역사적으로 내려오던 맥박도 있겠지만 당시 조선국내와 국제의 복잡한 환경과 직접적연계가 있다. 조선인의 만주이주는 종래로 경제원인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왔으며 이밖에 정치원인, 사회원인, 지리적 원인 등도 홀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1). 경제적원인
(1) 만주지방이 조선에 비해 생활이 안정되고 살아가기가 쉬웠다. 어느 정도로는 부유하였던 것이다. 만주는 인구가 적고 토지가 비옥하며 생활이 쉬이 보장될 수 있어 조선의 빈곤한 농민들의 만주이주가 이루어졌다.
(2) 조선에서 인구과잉현상이 나타났다. 조선의 인구정성율은 18.62‰로서 고장성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인구밀도 (평방리)는 1350명으로서 길림성의 56명, 간도의 340명 보다 많은 폭도의 높음을 보여준다. 경작지가 줄어들고 땅값이 올라 실업자가 늘어나 해외인구수출의 가능성을 마련하였다.
(3) 중국지주가 조선인을 환영하였다. 조선농민은 담배와 수전 농사에 능하였으며 당시 만주에서의 수전재배성공은 거대한 수익을 따냈다. 수전의 대대적인 개발과 더불어 중국지주는 토지와 자본을 조선이주민에게 대부 주었으며 조선인은 소작인이 신분으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상호의 이익과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로 이루어진 이 특수한 관계로 조선인은 맨주먹으로 만주이주를 계속하였다.
(4) 간도협약에 의해 귀화조선인의 토지소유권이 승인받았다. 비록 이는 반면적인 자극이나 당시 조선내에서 토지를 잃은 농민에게는 한갈래의 흡인력이 있는 선택이였다.
(5) 조선에 흉년이 빈번하였다. 농민들의 경제력이 내력가 농업개량이 불가능 하였으며 산림이 황페되고 수원이 말라 한재가 따랐고 풍해, 기후불순 등은 재난을 한층 더 심하게 하였다.
(6) 조선농민의 생활이 더욱 곤난해졌다. 토지는 농민들의 생명이였다. 《한일합병》후 자본주의경제의 급격적발전으로 조선의 경제상황은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의 자본이 대량의 토지를 강점, 수매하여 소작료가 점차 늘어났다. 자작인이 소작인으로 되고 소작인이 실업자로 변하였다.(참고표 1-04-1) 생활의 안착지를 찾아 조선남부의 거주민은 대체로 일본으로 건너갔고 북부의 거주민은 만주로 이주하였다.
(7) 조선에 있어서 경작지가 줄어들고 땅값이 올랐으며 땅을 팔아 어느 정도의 자금을 손에 쥔 조선인은 땅값이 저렴한 만주땅을 마음에 두었다.
(8) 만주농업이 흥한다는 풍설(??)이 조선에서 돌았다. 당시 중국인지주는 벼 농사의 단맛을 보고 조선농민을 환영하는 지방이 있었다. 사실상 이상의 선전에는 상당한 근거가 없는것도 아니고 이주소개자의 과장된 선전도 풍설이 퍼지는데 일정한 역할을 논 것 같았다. 봉천방면, 동부몽고지방, 동지철도동부연선 지방의 이주자 중 이 부류의 원인으로 이주한 자가 많았다.
(9) 만주 각지역에 농장이 개설됨에 따라 조선농민의 수요량이 크게 늘어났다. 1914년 철령현에 圃?稻田회사가 설립되고 1921년에는 봉천지방에 동아권업회사농장이 나왔고 1923년에 신민부 서공태보에도 농장을 개설했으며 같은 해에 통료 부근에도 농장을 앉히였다. 이들 농장에서는 수전을 대대적으로 개발하였기에 조선농민이 크게 몰려들었다.
(10) 철도의 개통으로 인해 만주이주교통이 편리하게 되었다.
안봉철도는 로일전쟁 때 긴급히 부설한 경편 철도인데 전후 일본은 표준궤도로 고치였다. 일본이 안봉선을 표준궤도로 도친데는 대로 방어의 박절한 수요에서였다. 당시 러시아는 갑자기 시비리아철도복선계획과 흑룡강철도개선계획을 발표하였다.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은 부득불 조선, 만주, 일본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철도선을 연결해야 했다. 개건공사는 1909년 8월에 준공되였다. 1911년에는 또 압록강철교공정을 완성하였다. 배를 타고 내왕했거나 결빙기에 도강하여 월경하는 이주민은 철도의 편리를 타서 남만에서 다른 지방으로 쉬히 이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 남부의 거주자들은 계속하여 만주의 이주를 시도하였으며 두만강지역에 있어서는 1923년 천도(天?)철도 개통, 1927년 국경철교의 준공으로 하여 도문철도의 연결을 완성하였고 사조(四?), 조앙(??)철도(사평-치치할)의 개통에 의해 조남 및 북만의 진출이 매우 쉽게 되었다.
2). 정치적 원인
정치적 원인으로 만주에 이주한 조선인은 그닥 많이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 부류의 이주자는 대체로 《한일합병》전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 이조시대의 실정(失政), 폭정(暴政) 특히 이조말기 페정(弊政)에 의한 민심의 배반이였다.
(2) 《한일합병》을 전후로 조선인이 일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다.
(3) 중국관민이 조선이주민에 대해 어느 정도는 동정을 표시하였다. 중국인의 자신의 직접적 리익에서 출발하여 조선이주민에게 관대한 정책을 풀었다. 이는 중국인의 재정수입 또는 변강개발, 외래세력을 확산방지 등 목적에도 그 근원이 있지만 아무튼 나라를 잃고 일제의 통치를 증오하는 조선이주민에게 있어서는 희망이 가는 손길이 되었다.
3). 사회적 원인
사회에서 떠도는 만주에 대한 예언을 맹목적으로 믿고 이주했거나 사회 환경의 극변되는 영향으로 이주한 자가 있으나 이는 적은 부류의 이주민으로 생각된다.
4). 지리적 원인
조선은 만주와 강 하나를 사이 두고 있어 내왕이 비교적 편리하며 만주는 인구가 적고 비옥한 벌판이 미개간지로 되었기에 조선개척민의 만주이주는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