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알아서 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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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알아서 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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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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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2004-1-11

며칠 전 한 신문 토론면에서 이런 글을 접했다. “권력자에게 알아서 기던 시절, 대통령은 입을 열어 수다스럽게 자신을 변호할 필요도,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시대가 바뀌어 언론도 정치인들도 이제 더는 알아서 기지 않는다. 수다스런 대통령의 출현은 곧 대통령 권력의 약화와 민주화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의 필자는 ‘알아서 기기’란 인간심리와 시대의 탈권위적 변화란 관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수다’에 대한 긍정을 시도하고 있다. 대통령의 수다를 민주화의 증거로 제시한 것은 아무래도 논리의 비약이지만 그래도 ‘알아서 기기’란 렌즈는 한국 정치·사회를 관찰하는 데 유용한 도구 같다.

그의 말대로 과거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대통령의 수다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측근들은 대통령의 눈빛만 보고도 심기와 의중을 헤아렸고 언론의 대통령 비판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알아서 기기’란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대통령이 말로 사고를 칠 여지도, 언론이 그것을 대서특필할 일도 없었다.

일제와 군사독재를 겪으면서 불행하게도 한국언론은 ‘알아서 기기’를 체득했다. 권력의 언론 재갈물리기에 완강히 저항도 했지만 혹독한 검열과 탄압, 강제해직 등 강자의 물리력 앞에 저항이 좌절됐을 때 언론이 취할 수밖에 없었던 태도가 길들여지기, ‘알아서 기기’였던 것이다.

한국언론이 ‘대통령이 진노한 것으로 알려졌다’거나 ‘금일봉을 하사했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은 그리 멀지않은 과거였다.

-우리사회선 현저히 극복-

언론이 이런 표현을 쓸 때 그 행위의 주체를 상감이나 제왕으로 간주하는 심리가 깔려 있었지 않았나 싶다. 왕조시대적 냄새를 풍기는 언론의 정치관련 용어는 지금도 적지 않다. 광운대 임태섭 교수는 그런 것으로 ‘대권’ ‘통치권자’ ‘가신’ ‘친서’ ‘읍소’ ‘진언’ 등을 꼽고 이런 단어는 탈권위주의 사회와 맞지 않는 것으로 언론은 여러 계층의 관점을 고루 반영하는 보편적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도올 김용옥이 우리 역사를 왕정과 민주라는 두 도식으로 구분하고 유사 이래 최초로 왕정의 시대에서 민주의 시대로 역사가 옮겨가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눈길을 끈다. 도올에 따르면 그 이행과정 속에 왕이 아닌 대통령 노무현이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수다를 ‘알아서 기기’로부터 탈권위적 민주사회로의 이행과 연결짓는 발상이 완전한 억지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오늘날 대통령 비판을 두려워하는 언론은 없으며 오히려 그 반대다.

언론은 대통령 비판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소설가 이순원이 표현한 대로 ‘희빈 장씨의 저주’가 이만했겠는가 싶다. 이 점에서는 주류 보수언론과 비주류 언론이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비주류 언론도 마치 ‘주류가 되고 싶은 비주류’인 양 비판의 홍수 속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런 탈권위의 흐름 속에도 항상 예외는 있다. 재벌이 권력에 불법 정치자금을 갖다주는 사건이 계속되는 것은 알아서 기는 세태와 떼어놓고 볼 수 없다.

최근 대통령의 사생활에 대해 사석에서 행한 부적절한 ‘수다’를 이유로 한 여경이 좌천된 것도 ‘알아서 기기’형 사건이었다. 어쨌거나 과거와 비교할 때 우리 사회의 ‘알아서 기기’는 현저히 극복됐다. 그러나 강대국이 개입된 대외문제로 가면 양상이 전혀 달라진다.

-강대국 관련땐 아주 달라져-

일제·군사독재 경험 이전의 모화사상이 그 연원일까. 한국언론이 미국정부·언론보다도 앞서 국내 반미감정 확산이나 미군 재배치 우려를 제기하고 호들갑을 떠는 행태에는 필시 ‘알아서 기기’의 측면이 있다. 이라크 파병 문제에서도 이 심리는 발동한다.

정부도 이런 습성에 길들여 있다. 최근 일제 강제동원진상규명 특별법 등 한·일 과거사 관련법안 논의과정에서 정부가 앞장서서 한·일 관계의 악화를 우려한 것도 ‘알아서 기기’의 중요 사례다.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적극 대응보다는 도리어 중국을 두둔하는 듯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알아서 기기’는 파시즘이 내포하고 있는 ‘자발적 예속’의 역설을 상기시킨다. 스피노자는 그래서 “왜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의 문제이기라도 한 양 자신의 예속을 위해 싸우는가?”란 질문을 던졌다.

〈김철웅/미디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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