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에서의 첫 번째 친일단체는 조선인거류민회이다. 이 조직은 1918년 12월 5일 국자가(오늘의 연길시)에서 성립되었고 회장은 최윤주였다.
필자는 최윤주의 고향, 생년월일 등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때 한국궁내부주사였고 독립운동에도 그림자를 비친 적이 있다고 하며 한일합방 이후에는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된 친일파로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16년 간도로 왔고 그때로부터 광복이 나던 때까지 동족의 피를 빨아 사욕을 챙기고 반일투쟁을 탄압하는 데 앞장서온 일제의 충실한 주구였다. 그의 역사 행적을 따라가노라면 일제의 침략을 위해 고심한 간도 친일파들의 노력의 자취를 영화의 장면처럼 볼 수 있다.
그는 용정일본영사관의 지지를 받아 <<조선인거류민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였다. 이 조직은 일제가 <<한국인이 한국인을 통제하는>> 수법으로 조선민족내분을 조장하여 민족분열을 가속화하며 중국에 대한 저들의 침략계획을 순조롭게 추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친일반동조직이었다.
1929년 <<민성보(民聲報: 용정에서 발행된 진보적 신문)>>에 연재된 독립운동가 심여추(沈茹秋1904-1930)의 <<연변조사실록>>에서는 당시 <<조선인거류민회>>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조선인거류민회가 내건 간판은 조선인의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여 일본관청의 감독 밑에서 직무를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민회의 직무는 공포된 데 의하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가 있다.
(1) 호구조사
(2) 기타 여러 가지 조사
(3) 아름다운 풍속을 형성시키는 사항
(4) 분쟁을 화해시키는 사항
(5) 관청(일본)에 서류를 제기할 때 경유하는 사항
(6) 소속되는 관서의 명령 및 기타 포고에 관한 사항
(7) 교육, 위생, 생육, 예술, 종교 등에 관한 사항
(8) 통신연락에 관한 사항
(9) 금융에 관한 사항
(10) 기타 공덕에 관한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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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10조 가운데 제3조와 제10조는 텅 빈 말이다. 제1조와 제2조는 호구조사로부터 인민의 일거일동에 이르기까지 빠짐 없이 조사하는 것이다. 제4조는 일본관서를 대리하여 조선인들 사이의 모든 분쟁을 해결하다가 화해에 효과를 보지 못하면 일본경찰서에 맡겨 처리하는 것이다. 제5조와 제6조는 조선인과 일본영사관 사이에서 인민들의 모든 문서를 일본영사관에 전달하며 일본영사관의 명령과 기타 포고 등을 조선인에게 선포하고 대리로 그 직무를 집행한다는 것이다. 제7조의 제1항(교육)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조선인의 사립학교는 그 태반이 민회에 의해 꾸려지고 주최되며 그에 따르는 교육정신은 물론 일본과 친근하고 일본에 아부하는 것이 중심이다. 제8조 통신연락사항은 연변 4개 현의 향간에 배달이 통하지 않는 형편에서 민회가 촌민 통신처로 되고 오고 가는 서신을 많이는 민회를 통해 전달한다는 것이다. 제9조는 일본인의 금융부가 조선인의 금융권을 장악한다는 것이다.(<<20세기 중국조선족 역사자료집>>(<<연변조사실록>> <<나의 회고>>편 제48페지)
민회와 호구조사 및 기타 모든 경찰행정과의 관계, 민회와 금융업과의 관계, 민회와 교육에 관해서만 보아도 일본주구 조직으로서의 민회의 반동적 면모를 보아낼 수 있다.
각 향촌 민회에는 참의원 신분의 정탐이 있다. 그는 해당한 마을의 호구며 기타 농업수확, 목축성과 지어는 매 개인의 사상- 즉 누구는 친일파이고 누구는 배일파이며 누구는 친화파이고 누구는 빨갱이인가 등을 일일이 일본경찰서에 보고한다. 그러므로 일본경찰들은 편안히 앉아서 힘을 들이지 않고 항일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금융부의 돈을 꾸려면 민회의 소개를 거쳐야 했고 민회에서 주관하는 학교에서는 일본교과서를 채용하고 교수용어도 일본어로 했고 우리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학교의 취지는 일본주구들의 후비(後備) 인재를 양성하였다.
민회는 회장, 주사, 의원, 참의원,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연변 4개 현에 18개 조선인거류민회가 있었는데 용정촌, 국자가, 동불사, 걸만동, 가야하촌 민회의 회원 수만 해도 10만 명이었다. 그 외 나머지 13개 민회 인원에 대한 통계 숫자는 없지만 얼추 짐작해도 20만이 더 될 것이다. 당시 연변의 조선인이 40만이라고 한다면 75% 인구가 민회의 성원이라는 계산이다. 조선인들로 하여금 민회가 일제의 주구단체임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참가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원인을 심여추는 두 가지로 이야기했다.
첫째; 민회는 일본인의 통치를 받는 연변조선인의 기관이기 때문에 만약 가입하지 않는다면 배일의 혐의를 받는다. 연변지대에서 중국을 배척하는 것은 일 없으되 일본을 배척한다면 하루도 살아나갈 수 없다. 일단 배일적인 표현이 보이기만 하면 즉각 포승줄에 묶이운다. 둘째; 사람의 일이란 상서롭지 못하여 만일 뜻밖의 일이 생긴다면 민간의 개인들에게서 돈 꾸기란 아주 어렵기도 하고 이자도 높지만 만약 민회에 가입한다면 그의 소개로 금융부의 돈을 꿀 수 있는 것이다.(동상서 67페지)
바로 이같은 친일조직의 대표로 되어 일본인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최윤주는 1922년 동양주식회사 간도출장소에서 5년 기한으로 도시건설자금 2만원을 대부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돈으로 국자가 웃시장(현재의 연길시 서시장)의 땅을 사고 수백 채의 집을 지었다. 그리고 일제의 세력을 등에 업고 국자가 아래시장(현재 연길시 동시장)에 거주하는 7,8십호의 조선인 상업자들을 강박으로 이사시키고 집세를 비싸게 받았다.
1925년 그는 또 동양척식회사의 돈 2만원을 대부하여 <<국자가 무역주식회사>>와 <<국자가 저금조합>>을 세우고 고리대금업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국자가에 양곡상점을 꾸리였는데 일본에 보낸 백미만 해도 30만 석이 된다고 한다.
동양척식회사 간도출장소는 민국 7년(1918년)에 설립되었다. 선통 2년(1911년)에 용정촌(오늘의 용정시)에 큰 화재가 일어난 것을 기회로 삼아 일본관방에서는 조선 이재민을 구제한다는 미명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구제금 2만 5천원을 내어 용정일본총영사관내에 구제회를 세우고 토지를 담보로 하여 이자를 놓았던 것이다. 간도출장소는 구제회를 전신으로 한 일본의 금융조직이었고 최윤주는 일제의 침략자금으로 자기의 경제적 기반을 다졌던 것이다.
간도 조선인거류민회는 역사사명을 다하고 1936년 12월에 해산되었다. 거류민회가 일제의 침략에 얼마만한 공로가 있다고 한다면 최윤주의 공로도 그만한 것이다. 그는 거류민회장을 하는 사이에 친일주구단체인 민생단과 간도협조회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였다. 박석윤, 조병상, 전성호 등이 민생단을 건립할 때 최윤주는 선봉장이 되었고 국자가 민생단을 발기하고 조직하였으며 상무이사로 되었다. 그는 1932년 일본의 대신한테 편지를 써서 군사역량이 없이는 국자가의 중국 관방을 제압하고 간도공서를 세울 수가 없으므로 조속히 출병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다. 하여 일본군 여단장과 간도출병에 대한 약정을 했으며 그리고 관동군 사령 모도아쯔의 지시를 받고 연변을 만주국 간도성으로 만드는데 탁월한 공적을 쌓았다.
1934년 9월 그는 <<간도협조회>>의 고문이 되었다. 이 시기의 그의 친일행각에 대해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3 <<봉화>>(제243페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협조회>> 회장 김동한, 부회장 손기환 등과 결탁하여 당과 혁명조직을 파괴하였으며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고 귀순시켰다. 그는 <<협조회>>의 <<특별공작반>>과 <<의용자위단>>과 같은 일제의 특무기관의 외각조직을 내오고 일군과 함께 <<토벌>>을 감행했으며 도처에서 우리 당과 항일유격대의 정보를 탐지하였으며 <<토벌>>대의 향도로 충당되여 항일무장역량과 인민군중의 반일투쟁을 잔혹하게 탄압하였으며 우리 당의 지하조직을 파괴하고 와해하였다.
조선인거류민회가 해산된 이후 최윤주는 국자가 일본경찰서의 정보원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1943년 2월에는 <<결사전황민단>>을 내올 것을 제의했다. 그의 간청은 괴뢰 만주국 간도성 부현장회의에서 통과되어 <<결사전황민단>>이 <<협화회>>에 귀속된 하나의 분과독립기구로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조직의 취지는 <<황도정신을 키우며>>, <<필승의 신념과 무장결사전의 정신을 확립시키는 것>>이었다. <<결사전황민단>>이 성립된 후 최윤주는 연길현 <<결사전황민단>>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일본인 모리죠다로와 함께 자진하여 사인재산 20만원을 기부하여 <<결사전황민단>>을 부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만주국 협화회 중앙본부 위원으로 되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발동하자 최윤주는 일본 도꾜에 가서 도죠 이데끼의 접견까지 받는 등 친일파로서의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광복되던 해까지 최윤주는 연길에서 30년 세월을 살았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다는 세월 동안 일제를 등에 업고 나라와 민족과 인간의 양심까지도 헌 신짝처럼 저버리고 연길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만한 갑부로, 누구 보다도 손색이 없는 친일파가 되었다.
먼지 오른 자료를 뒤적이고 알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인터뷰를 해보아도 최윤주의 그 후의 행적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광복 후 중국에서 청산을 맞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역바른 친일파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으로 새버린 듯 싶다. 소문에 의하면 광복 후 그는 한국을 통해 미국에 가서 천명을 다했다고 하는데 진실여부는 파악할 수 없다.
혹시 한국의 독립유공자의 명단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가져보기도 한다. 국가유공자 명부에 올라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조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