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야만 큰돈 버나요?" 박명옥씨의 창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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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야만 큰돈 버나요?" 박명옥씨의 창업이야기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7.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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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해성두만강불고기성 사장 박명옥씨의 창업이야기

  수많은 농민대군들이 지난세기 80년대말 90년대초 산업화붐을 타고 농촌에서 도시로 진출하여 부를 축적할 당시 신민시 호대향 조가포촌 태생인 박명옥씨(1960년생)는 심양에서 안산 해성으로 가서 식당업을 시작하여 현재는 여러개의 식당을 가진 사장으로 탈바꿈하였다.


  해성에 처음 가는 사람도 택시기사에게 두만강불고기성이라 하면 더 물어보지 않고도 목적지까지 도착할수 있다. 성수기엔 《이 집에선 공짜로 먹나?》할 정도로 손님들로 만원을 이룬다 한다.

  해성의 명소로

박명옥씨가 해성에 발을 붙히게 된것은 녀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해성농업은행에 배치받은후인 1989년 7월부터이다. 그때 그녀는 어머니가 마련해준 3%의 개인리자돈 4,000원을 밑천으로 해성남관에 있는 농업무역시장안에 넉상짜리 불고기집을 꾸렸다. 처음 하는 장사라 다른것은 념두를 못내고 심양에 있는 두만강식당에 자주 간적이 있어 식瑛?하면 돈벌이가 괜찮을것으로 판단하고 식당을 꾸린것이다. 생각보다 고되고 힘들었지만 일찍 젖소를 사육하고 의류시장에서 기성복을 만들아 팔고 또 100무되는 수전농사를 짓기도 하고 한족식당에서 그릇을 씻는 등 고된 일로 잔뼈를 굳혀온 그에게는 별로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악착같이 일한 덕분에 그녀는 1997년 5월, 30만원을 투자하여 두만강불고기성을 오픈하였다. 2003년 사스로 전 중국이 공포에 휩쌓여있을 때 그는 38만원을 더 투자하여 새롭게 장식하고 규모를 560평으로 확대하였다. 식당경영에 미립이 트면서 그녀는 《양로도 되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왜 투자하느냐?》는 친구들의 만류도 마다하고 올해 6월 20일에 또 130여만원을 투자한 두만강불고기성 2호점을 오픈하였다. 1호점에서 택시를 타고 5분거리, 중심거리는 아니지만 주변에 해성대주점 등 건물들이 위치하여 앞으로 발전전망이 있는 지역이다. 1,2층으로 된 2호점은 약 600평 규모, 그리 호화롭지 않지만 깔끔하고 맵씨있게 꾸며져있었고 룸은 서울, 인천, 대구, 부산 등 한국지명으로 지어 《한류》가 물씬 풍겼다. 오픈식날 해성시의 시정부관계자들이 참석하여 2호점 탄생을 축하해주었다 한다.


오픈한지 얼마 안되지만 2호점도 1호점 못지 않게 매상이 껑충 올랐다. 《해성에선 2월중순부터 10월까지 장사가 호황인데 자리가 없어 더 팔지 못해요.》 아쉬움과 자랑이 섞인 그녀의 말이다.


최근년에 해성에 크고 작은 구이집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그속에서도 《해성두만강불고기성》은 일류에 꼽힌다. 그는 한족들에게 한국특색의 불고기 진맛을 보여주기 위해 선후 5차 한국을 찾았고 한국식당에 가서 도적질하듯 조금씩 배우것이 성차지 않아 돈을 주고 주방장한테 양념을 배합하는 묘법을 배웠다. 두만강불고기성은 불고기전문으로 소갈비, LA갈비, 한식양고기, 돼지고기갈비 등이 특색이다. 그래서인지 대련이나 영구, 수암에 드나드는 한국인들도 해성두만강불고기성은 들려가군한다고 한다.


성공에서 또다른 비법의 하나가 식당위생이 깨끗하고 서비스가 철저한것. 그래서 2004년 두만강불고기성의 위생이 깨끗하고 서비스가 좋다고 해성텔레비죤에 크게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녀는 매일 조회를 열고 맛, 서비스, 위생, 실제행동을 강조하여 직원들에게 확실한 서비스정신을 주입시켰다. 그리고 지각하거나 제도를 위반할 경우 5-10원, 지어 50원의 벌금을 안겼고 또 우수한 직원에 대해서는 년말 선진으로 뽑아 물질장려를 하여 직원들에게 주인공인식을 심어주었다. 현재 그녀가 거느리고있는 직원은 80여명인데 그중 25명이 5년이상 근무하였고 부부 직원도 9쌍이다. 업체들에서 꺼리는 부부 직원에 대해서는 잘 교육해서 쓰면 좋을 때가 더 많다고 했다.

한국 가야만 큰돈 버나요


한국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는가고 묻자 그녀는 웃으며 《저도 한때 한국엘 가려고 예약금 5천원을 낸적도 있었어요》라고 말한다. 현재는 한국에 가서 일하는것보다 더 보람있다고 했다. 《꼭 한국에 가야 큰 돈을 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중국에서도 열심히 일하면 얼마든지 부를 축적할수 있는 기회가 생겨요.》 그녀가 현재까지 번 돈이 300여만원, 아직 대출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한다.

돈은 벌줄도 알아야 하지만 쓸줄 알아야 한다고 일복이 많아 일밖에 몰랐던 그녀는 가정이 파탄되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두 딸을 훌륭하게 키웠다. 큰딸은 현재 료녕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있고 둘째 딸은 대련재경학원을 다니고있다.

효심이라 할가 그녀는 금년 8월 어머님의 칠순잔치를 크게 차려드렸고 고향로인들이 대련유람을 갔다가 해성을 지날 때마다 특별히 자기식당에 초대하였다. 그리고 금년 10월 심양시조선족로인협회에서 처음으로 로인사교무시합을 하였을 때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심양으로 달려와 즉석에서 현찰 2천원을 기부하고 앞으로도 로인들의 활동에 저그마한 힘이라도 보태고싶다고 했다.


자그만한 식당으로부터 시작하여 기업으로 발전한 박명옥씨의 꿈은 연약하고 왜소한 녀성의 몸매와는 달리 품은 꿈은 컸다. 얼마전 북경에 갔다온적 있는 그는 북경에 있는 식당들이 값비싼데도 불구하고 잘되는것을 보고 기회가 되면 북경에 가서 발전해보고싶노라고, 심양에도 이미 230평의 장소를 보아두었다며 젊었을 때 한번 더 해보고싶다고 자기의 심경을 토로했다.


굴릴수록 커져가는 눈덩어리처럼 그녀의 꿈이 더 크게 영글어져가기 바란다.

요녕조선문보/ 오지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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