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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상지대.연변대 초빙교수 역임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남한강문학회 회장
국제펜클럽 이사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가면 어가(御家) 한 채가 있다. 1999년에 강원도에서 건립한 것인데, 단종이 이곳에 귀양 와 살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어가는 전면 6칸에 측면 3칸의 기와집인데, 경상 앞에 앉아 있는 단종과 엎드리고 선 선비, 그리고 시녀들의 소상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놓았다. 방안에는 이불이며 옷가지들, 횃대 같은 것도 비치하였다. 어가 옆에는 시녀들이 쓰는 5칸의 초가를 따로 세워 놓았다. 당시의 모습을 보다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어가의 주변에는 높이 자란 소나무들이 우거져 있는데, 일반인의 출입을 막는 금표(禁標)와 단종이 이곳에 살았다는 유지비각(遺址碑閣)이 있다. 단종이 걸터앉아 놀았다는 수령 600여년의 관음송(觀音松)도 있고, 한양 쪽을 바라보며 그리워했다는 노산대(魯山臺)와 갈 적마다 돌을 주워 쌓았다는 망향탑(望鄕塔)도 있다.
단종의 어제시는 어가의 정면 중앙 처마 밑에 판액으로 걸려 있다.
千秋長恨寃 천추의 한을 가슴에 품은 채
寂寧荒山裡 적막한 영월땅 험한 산속에
萬古一孤魂 만고의 외로운 혼은 홀로 헤매는데
蒼松繞舊園 울창한 솔은 정원을 둘러쌌네.
嶺首三天老 높은 봉우리는 세 세상에 늙었고
深流得石喧 깊은 물살도 돌에 부딪쳐 소란만하다.
山深多虎豹 산은 깊고 맹수는 득실거리니
不多掩柴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는다. (필자가 번역 손질)
이 시는 얼른 생각하면, 청령포의 울창한 숲속에 유배된 단종이 산과 강물에 가로막히고 득실거리는 맹수들로 사립문을 일찍 닫아야 하는 외롭고 서글픈 삶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외로운 혼’은 단종 자신이다. ‘울창한 솔’은 주변의 실제 소나무 숲이지만 유배시켜 못 나오게 하는 세력을 뜻하고, ‘높은 봉우리’도 실제 산봉우리이면서 ‘세 세상’(세종, 문종, 단종)을 이끌던 중신들로 지금은 ‘늙어’ 힘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깊은 물살’은 청령포를 감싸 흐르는 강물이지만 단종을 따랐던 많은 신하들로, 이들은 가로막고 방해하는 세력들인 ‘돌’들에 걸려서 ‘소란만 할’뿐인 것을 말한다. ‘산’도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단종의 처지를 의미하며, ‘맹수’도 산짐승보다 단종을 해치려는 세력들을 뜻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처지가 더욱 악화되고 있음을 ‘저물다’로 은유하였고, 따라서 ‘사립문을 닫는다’는 것은 자신을 지키고 싶은 심정의 표현으로 각각 볼 수 있다.
따라서, 단종의 어제시를 관광객들이 청령포를 둘러보며 느끼듯, 단순히 산이 높고 험하며 강물이 빙 둘러막은 좁은 숲속에서의 외로운 삶의 모습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신하들의 갈등과 변화, 그런 세상의 흐름 속에서의 자신의 불안과 초조, 나아가 생명의 위험 감지 등의 심리적 변화와 모습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어제시는 청령포의 지형적 특성을 살려 자신의 삶을 담으면서, 당시의 정세 변화 속에서의 자신의 정신과 심리까지 중의적(重意的)으로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과 산, 나무와 숲만 있던 청령포에 어가가 세워진 것만으로도 당시 상황과 모습을 훨씬 쉽게 느끼게 한다. 그러나 보다 심정적으로 깊게 느끼게 하는 것은 어가에 걸린 어제시일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가슴으로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