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저는 중국에서 온 장 영수(가명)입니다. 현재 한국에 입국한지 어언간 9년이 되였습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와서 현재 벌써 서른 고개를 넘어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아기와 함께 남부럽잖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였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자 더욱더 가족의 소중함과 책임감을 가슴속깊이 느끼게 되고 자기가 진 죄를 가슴 저리게 심심이 느끼게 되였습니다.
요즘에 들어서서 자나 깨나 더욱더 하루속히 속죄하여 당당한 대한민국국민의 신분으로 집에서는 부끄럼 없는 남편,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여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2006년 4월부터 시작된 자진출국프로그램의 시행으로 어둠속에서 갈팡질팡 헤매고 있는 저에게도 광명의 길을 밝혀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1972년 10월, 저는 중국 요녕성 철령시 지원소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시골에서 주로 밭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는데다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조차 몸이 아프셔서 가정형편은 설상가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겨우 고등학교만 졸업하고는 학업을 그만두고 한가정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되였습니다. 같은 또래친구들보다 일찍이 철이 들고 직장생활을 하며 돈을 벌게 되였습니다. 그 당시 중국에서 한 달 노임이 저녘 늦게까지 잔업을 해도 500위안(한국돈 7만원)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 돈으로 어머니 약값에 생활을 유지하려니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한국바람이 불어 주변의 친구들도 하나둘씩 모두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나갔습니다. 한국가면 큰돈 벌수 있어서 한 달만 일해도 중국에서 1년 버는 것보다도 낫다는 말에 저도 마음이 동했습니다. 또 주변에 한국 갔다 오신 분들 멋진 한국 옷에 도시에서 아파트 두 채씩 사놓았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속으로 너무 부럽고 나도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빨리 큰 돈 벌어서 고생 많으신 어머니 병도 고쳐드리고 남부럽잖게 호강시켜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1998년 5월, 친구소개로 브로커 전 길민(가명)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였습니다.
브로커말로는 한국 돈 7백만 원만 쓰면 다른 사람이름으로 2개월 내에 한국에 나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브로커의 지시대로 일단 증명사진 몇 장과 중국 돈 5000원을 선불금으로 주고 한국행수속을 하였습니다. 저의 가정형편으로 한국 돈 7백만 원이란 생각조차도 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숫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꼭 한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저는 어머니와 주변사람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시골의 살던 집을 담보로 일부 대출받고 한국 갔다 온 친척집에서 일부 빌려 한국행수속을 하였습니다.
수속도 생각 밖으로 브로커의 말대로 한 달 정도 걸려서 6월초에 순조롭게 비자발급이 되여 1998년 6월 7일, 위명 계명근 이름으로 회사연수생명의로 그토록 가고 싶었든 한국 땅에 도착하게 되였습니다.
처음엔 주위의 모든 것이 생소하고 두렵기만 하였습니다. 돈 벌기도 중국에서 생각 한 것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 옆에서 도와줄 사람하나 없는 처지라 저녁에 피곤한 몸을 지탱하며 자리에 누울때면 고향생각, 아픈 어머니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참으며 나올 때 진 빚 7백만 원을 빠른 시일 내에 갚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회사연수생이라 아무리 뼈 빠지게 한 달을 해도 월급은 40만 원 정도 밖에 안 되였습니다. 40만원에서 먹고 쓰고 나면 아무리 아껴 써도 한 달에 25만원도 안 남았습니다. 이 돈으로 빚을 갚기는 너무나 아득하였습니다. 마침 고향친구도움으로 회사에서 뛰쳐나와 그나마 일당이 조금 많은 건설현장으로 가게 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귀에게 홀린 것처럼 자기가 얼마나 큰 죄를 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머릿속엔 돈벌이 세 글자 밖에 없었습니다. 별다른 기술은 없지만 아직 젊은 나이에 현장일이라도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처음 하는 현장이리라 힘들고 먼지도 많아 고생은 말할 수가 없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참고 3년 정도 하다나니 빚도 거의 다 갚게 되였습니다. 돈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집도 없이 이 친구 저 친구 집 다니며 눈치 밥을 먹으며 하루살이 생활을 하였습니다. 빚을 다 갚고 난 저는 우선 아무리 싼 집이라도 하나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여 보증금 백만 원에 월 15만원의 완전 지하단칸방을 얻었습니다. 비록 습기 차고 어두웠지만 이젠 눈치 밥을 먹지 않고 자기 집에서 발편잠을 잘 수 있어서 마음만은 기뻤습니다.
2002년 5월 친구소개로 아내 최 미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착하고 소박하며 여성스러운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당시 아내도 불법체류신분이여서 저의 힘든 처지를 더욱더 잘 알고 이해해주었습니다. 서로 마음이 맞고 힘들 때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생기게 되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2003년 아내 최미봉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비록 두 사람 다 불법이여서 서류상으로 정상적인 결혼신고는 못했지만 두 사람은 정식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게 되였습니다. 이국타향에서 여직 껏 외롭게 혼자서 살아온 저에게 장모, 장인이 생겨서 너무 좋았습니다. 앞으로 부모님 공대하며 남부럽잖게 행복하게 잘살자고 아내와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우리가정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2003년1월 장모님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자궁암말기라는 판정을 받게 되였습니다. 당시 장모님도 외국인이라 의료보험혜택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여서 병원비는 터무니없이 비쌌습니다. 처음엔 한 달에 거의 천만원정도 들었습니다. 한 달에 저희 부부와 처남부부가 번 월급에 빚을 내면서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습니다. 자식 때문에 평생을 고생하신 장모님을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아내를 보는 저의 마음은 칼로 에이는 듯 하였습니다. 저희들의 노력도 무기력하게 장모님은 거의 2년 동안 암과의 투쟁 속에서 시달리다 2004년 6월 21일 아쉽게도 59세의 젊은 나이에 3천만원정도의 빚만 남겨두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후 저희들이 외로이 홀로 남은 장인을 모시고 같이 살게 되였습니다.
2006년 4월 저희부부사이에서 귀여운 아들애가 태어났습니다. 아기 키워줄 사람이 없어서 아내는 집에서 아기를 키우며 가정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인어른도 장모님이 돌아가신 후 우울증에 몸도 안 좋으셔서 일도 다니지 못하고 집에 계셨습니다. 2007년 9월, 복부염증으로 수술까지 하였습니다. 비록 저의 두 어깨에 짊어진 짐은 더 무거워졌지만 귀여운 아들애를 볼 때마다 힘이 나고 하루속히 정상적인 신분으로 떳떳한 아빠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2005년 새로운 귀화정책의 덕택에 아내는 장인 호적을 따라 귀화신청을 하게 되여2005년 8월 국적을 취득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정상적인 신분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은행에서 자기이름으로 된 통장하나 만들기도 힘들고 인생에서 필요한 보험하나 가입하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건설현장에서도 일부 사업주들은 제가 불법체류자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몇 개월을 피땀 흘려 힘들게 일해도 계속 미루며 제대로 월급을 주지 않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못 받은 돈만해도 2천만 원이 넘습니다. 이 돈을 받으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녀 봤댔자 불법체류자라는 죄명 때문에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렇다고 자진신고 하여 귀국한다할지라도 그 당시 정책으로는 저처럼 위조여권으로 입국한 사람은 5년 동안 입국규제 받게 되며 한국국적을 취득한 아내와 정상적인 혼인을 한다고 할지라도 5년 후의 일이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아들애와 헤어져서 살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고 도저히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가정에서 아내, 아들애, 장인어른 세 식구가 모두 제가 번 돈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인데 제가 없으면 저희가족의 생계조차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장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빚까지 갚아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에겐 다른 사람보다 배로 열심히 일해서 돈 버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죄가 죄를 만들며 현재까지 오게 되였습니다.
현재 아내 최미봉과 결혼하여 귀여운 아들애까지 낳고 행복한 가정을 갖게 되였지만 마음한구석엔 항상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죄를 짓고는 발편잠을 잘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매일을 불안한 마음으로 전전긍긍하면서 깊은 밤, 귀여운 아들, 사랑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뜬 눈으로 세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현재 저와 아내는 서류상으로 한국에서 결혼신고는 끝난 상황입니다.
저와 아내는 항상 버는 것보다 아껴 쓰는 게 중요하다는 생활관으로 열심히 일하고 아껴 쓰며 현재 장모님 때문에 진 빚도 절반정도 갚고 구로동에서 싼 월세집이라도 잡아서 장인어른 모시고 어린아들애 키우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2006년 4월부터 시행되는 자진출국프로그램에 따라 2006년 8월 구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9월 14일 서울남부지방검찰청에서 불기소이유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불법체류신분 때문에 못 받은 돈이 2천만원정도 남아있는 상황이고 생활력이 전혀 없는 처와 이제 5개월도 안된 아들애, 앓고 계시는 장인을 두고 차마 발길을 땔 수가 없었습니다.
매일을 불안과 허위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죄 많은 저에게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십시오! 꼭 속죄의 기회를 소중히 여기며 수천 번이라도 머리 숙여 반성하겠습니다. 비록 제가 얼마나 큰 죄를 지고 있는지 알고 있지만 제가 없이는 안 되는 아내와 어린아들애를 봐서도 인도주의 차원에서 출국하지 않고도 속죄할 수 있도록 관대하게 처리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7 09 23
장 영수(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