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 기자의 해남 특별기획 : 중국의 맨 남단에 있는 해남성은 특유의 매력으로 국내외에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개혁개방이래 내지인의 줄기찬 운집과 더불어 조선족, 한국인도 잇달아 찾아들어 나름대로 삶의 장을 열어 가며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시장경제이론 교실에서 강의만 하지말고 실천에 옮겨보라
불혹의 나이 남행열차 몸 실었고 꿈은 신기루마냥 사라져
긍정적인 사고로 색다른 인생 선택 후회 없이 오늘을 산다
흰구름, 푸른 하늘 아래 쪽빛 바다를 낀 양포경제개발구(洋浦经济开发区).10월의 마지막 일력이 몇장 남은 하루 오전, 승용차에 몸을 실은 기자는 해남성 소재지 해구시를 떠나 양켠에 녹색이 줄을 지어선 고속도로를 두어시간 달렸다. 개발구의 한가운데 위치한 리플(利浦)청사안의 공상국에 들어서니 김남호국장(57)은 '고향 손님' 이라며 호인답게 맞아주었다.
'하얼빈을 떠난지 어제 같은데 어언 14년이 지났습니다.'수인사에 이어지는 김국장의 이야기는 벅찬 세월 자체였다.
1988년4월,광동성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해남성의 탄생과 동시에 설립된 해남경제특구엔 부동산개발에 초점을 박은 내지의 수많은 업체들이 줄지어 몰려들기 시작,90년대초에 들어선 거대한 개발붐이 일었다.
93년 4월,흑룡강성 당학교 동북아연구소 소장직을 맡고있던 김남호는 일찍 중앙당학교 석사생시절의 지도교수로부터 '시장경제를 강의만 하지 말고 실천에 옮겨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당시 중국시장경제학회 회장직을 맡고있던 교수님은 해남에다 '시장경제학회 회의센터'를 설립하고 자신의 장미빛구상을 실천에 옮기는데 유력한 조수로 김남호를 부른것이다.
당학교서 마레주의 이론을 시장경제와 결부하여 강의를 진행했고, 1992년 중국사회과학원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남호의 학위논문도 '도시부동산시장'에 관한 것이었다.
교수님의 충격적인 '러브콜'에 동요한 그는 학교에 적(籍)을 남겨두는 조건으로 불혹의 나이를 잊은듯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다.교수님이 모 회사의 출자로 마련한 4만 평방미터 농장 토지를 함께 관리하며 개발 준비작업을 다그쳤다.
그런데 김남호가 해남에 도착하여 두달남짓이 지난 6월말에 들어 중앙으로부터 갑작스런 긴축정책이 실시되자 그동안 거침없이 밀려들던 내지의 투자에 제동이 걸리고 그해말에 와서는 크고작은 업체들이 썰물마냥 철거하기 시작했다.
몇달간 버티며 타진해 보니 개발열기는 빙점으로 냉각되어가는 상황, 모든 꿈이 바다위 신기루마냥 사라져 갔다.
'이대로 돌아가느냐 마느냐?'고민의 연속이었다.
'입쌀의 고향'으로 소문난 흑룡강성 오상현 안가진의 한 마을에서 자라 '동란의 연대'에 조선족중학교를 마친 그는 생산대노동에 참가하면서 주경야독으로 '마레주의 경전저작'을 탐독하였다.몇년 후 당시 농촌청년으로선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는 현선전부 간사로 조동.현의 여러 기관 간부를 상대로 강의를 하며 이론수준은 일취월장하여 나중엔 '마레주의 이론가','철학가'란 미명이 따르게 되었다.
현선전부에서 3년간 근무하다 현당교로 전근,83년에는 중앙당학교 제1기 석사연구생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때 흑룡강신문에서도 자학청년의 성공사례로 저에 관한 기사를 여러번 대서특필한적 있습니다." 흥분에 젖은 김국장의 말이다.
86년,우수성적으로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중앙 당학교에 강사로 남았다.몇년간 교편을 잡다가 당시 가족을 데려갈수 없는 상황에서 흑룡강성 당학교로 전근,후에 박사과정을 마치고 92년 파격으로 부교수직함을 땄다.그에 앞서 흑룡강성 당학교와 흑룡강대학에서 공동설립한 동북아연구소 소장을 맡았으니 주변에서 선망의 눈길을 보내기는 당연지사였다.
학교측은 '그곳에 당신같은 학자가 할 일은 없다'면서 언제든지 돌아오면 환영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해남에 남기로 용단을 내렸다.몇달간 생활에서 지난 20년간 몸담아 왔던 강단을 떠나 좀 다른 인생을 살아보자는 각오가 머리속에 집요하게 둥지를 틀었던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벌려논 일을 수습하며 기회를 시탐하던중에 양포경제기술개발구서 전국적인 범위내서 각 부처 인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신문에 실었다.
1994년 5월,면접에서 어렵잖게 합격한 그는 인차 전근되어 개발구 정책법규실 주임을 맡았다.고학력에 무슨 일이든 능란하게 처리해 나가는 솜씨는 인차 뭇사람의 관심을 끌어 2년후 개발구경제발전국 국장으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개발구 투자유치국을 설립하자 그는 국장을 겸임.1997년말,체제개혁을 실시하며 경제발전국,투자유치국,공상국을 하나로 합병하며 국장을 경쟁초빙했다.김남호는 뛰어난 이론지식과 실무능력으로 수많은 경쟁자를 따돌리고 국장에 위임되었다.'학자향 관리간부'의 본보기로,조선족은 기질있는 우수민족이란 정평이 따랐던 결과였다.
당시만 해도 개발구엔 변변한 건물 몇채 없이 여기저기 열대식물이 제멋대로 자리를 틀고 앉은 상태어서 말그대로 할 일이 태산같았다.
1998년,그는 남해의 천연가스를 원료로, 다국적 그룹인 듀폰,파프스가 투자키로 합의한 초대형 화학비료공장유치를 직접 맡아나서 베이징을 근 20차 다녀왔다.이해 공중에서 보낸 노정이 지구를 몇바퀴 회전한 거리에 해당된다는 이야기다.
이 프로젝트유치가 성사되면 일련의 기반시설, 상관산업투자가 1000억위안 이상으로 추산되어 개발구의 발전은 막대한 탄력을 입을 전망이었다.이렇게 당지 최대 관심사로 회자되었던만큼 국무원으로부터 정식 비준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관원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환성을 올렸으며 김남호국장은 일조에 개발구의 '스타'로 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부측 특수사정으로 이 프로젝트가 최종 양포에 자리잡지 못하고 해남의 다른 지역인 동방시에 축소된 규모로 정착하였다.
'이 프로젝트의 유실은 양포개발구발전템포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왔다 할수 있으며 내 평생에도 잊지못할 유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움에 젖은 심중이었다.
1999년말,지방정부로부터 탈리한 공상체제수직관리가 실시되자 김국장은 다른 부서의 직무는 내놓고 공상국장을 택하여 그챌새 없이 고된 '회의업무'에서 벗어남으로써 지금까지 잇달아 찾아드는 투자기업의 공상관련업무에만 전력하게 되었다고 한다.
2007년 상반기까지 개발구내 건설중에 있거나 가동된 기업은 30여개에 달하며 현재 추진중에 있는 대형 프로젝트로는 연간 100만톤규모 에틸렌공장,1000만립방미터 원유탱크,300만톤 LNG 등을 꼽을수 있다.그가운데 중한합자 혼합연료공장의 투자액은 9억위안에 달한다고 했다. '금년 9월,국무원은 양포보세항(保税港)설립을 정식 비준하였습니다.이는 전국적으로 대련,천진,상하이에 이어 네번째로 되는 특혜항구로서 양포개발구는 국내외투자업체의 새로운 관심을 끌게 될것입니다.'
3면이 바다가 둘러있는 양포개발구의 면적은 31평방킬로미터,그중 보세항 면적은 약 10평방킬로미터다.동남아로부터 한국,일본,러시아에 이르는 해상연결항로에 위치한 양포반도는 해안선 길이가 약 150킬로미터,북부만지역에서 대형항구건설에 최적의 조건을 구비하여 이미 30만톤급선박출입항구를 건설하였다.
아울러 남해(南海)의 석유천연가스자원과 최근거리에 위치한 공업기지로서의 양포항보세항은 석유,천연가스,화공원료,팔프 등의 보세저장,중간무역위주의 물류센타를 건설함으로써 향후 5~10년간 전국 굴지의 화공제품가공수출기지로 부상할 전망이다.
'녹색관광,환경보전'이 최우선 시책인 해남성의 서부에 위치한 양포개발구는 제조업을 비롯한 여러가지 산업기반이 취약하다보니 연해지역 여느 개발구보다 발전템포가 더딘 편이지만 여기저기 건설현장마다 공중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크레인이며 줄을 지어 달리는 컨테이너차량은 개발구의 창창한 앞날을 그려주고 있다.
'그동안 차례진 일에 몸을 내맡기고 뛰었으나 두드러진 성과는 별로 없습니다.하지만 14년전 저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로 오늘을 살며 자기가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것이 바람직한 인생이라는 김남호국장의 신조이다.
<기고 흑룡강신문 김명환 기자 j_mh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