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15년 전인 1992년 말까지만 하더라도 정성원(현 48세)씨는 서울에서 그리 크지 않은 건재상을 갖고 있던 갓 서른을 넘긴 총각이었고 문경희(현 36세)씨는 중국 연길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후 자그마한 자영업을 하고 있던 스무 한살 꽃나이 아가씨였다.
둘은 인연이었던지 한국에 간 문 경희 친구의 소개로 만났고 또 인차 결혼을 약속하였다. 1993년 3월 초 문 경희는 마침내 서울로 왔다. 연변에 연분홍진달래가 피고 서울에서는 벚꽃이 화사하게 필 무렵에 그들은 성황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현재 이들 부부가 경영하고 있는 ‘상현철물 건재상’, ‘상현생활용품할인 만물상’은 서울 구로구 6동에 위치해 있다.
기자가 4년 전에 그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그다지 크지 않은 하나의 보통 철물점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고객들이 많이 찾는 큰 건재상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건재용품들을 건물 안에다 진열할 자리가 없어서 거의가 반은 밖에다 내놓고 영업을 하고 있다. 그들 부부는 늘 웃음으로 고객을 맞이한다. 이곳을 찾는 고객들은 거의가 그의 단골손님이고, 처음 찾아온 손님들도 자연히 단골손님이 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손님도 있단다.
장사가 잘 되는 비결이 어디에 있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별다른 비결은 없습니다. 남들보다 일찍 문을 열고 밤늦도록 손님을 맞이하고 언제나 반가운 얼굴로, 근면 성실한 태도로 손님을 상대해야 하고요, 더 중요한 것은 상품의 질이 좋아야 하며 이윤을 적게 남기고 많이 팔아야 합니다.” 아니, 또 하나는 서로에게 사랑과 믿음을 주는 그들 부부의 화목한 모습이 비법중의 비법이 아닐까?
한국생활에 힘이 들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더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네, 돌이켜보니 제가 한국에 온지도 어언간 15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이렇게 긴긴 세월을 보내면서 저는 두 개의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첫째는 인생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고, 둘째는 삶의 지조는 믿음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혹시 기자선생님은 ‘도로 남’이란 노래를 아느냐고 묻는다. 그 노래가사가 참 의미심장하단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살다가, 어느 날인가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찍어서 도로 남이 된다는, 인생을 장난삼아 여기는 부부들을 풍자해서 만든 노래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한국생활 15년 세월이 평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서로 부동한 사회체재와 부동한 문화권, 부동한 생활환경속에서 살아왔으니 어찌 모순 없이 늘 하루같이 좋아하겠습니까?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신화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처음 정 성현 씨를 보았을 때 어딘가 모르게 남보다 특이한, 말없이 착하고 근면성실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남자면 내 남편이 될 수 있겠구나!’하고 믿음과 신뢰를 갖고 생활을 해왔지요. 그러다보니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간혹 모순이 생기게 되면 서로가 한걸음씩 물러서서 자신의 문제점부터 찾아보았습니다. 서로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또 한발자국씩 다가가 위로를 해주고 힘내라 격려해주고 사랑으로 아픔을 감싸주곤 하였지요.”
그랬다. 인생은 장난이 아니다. 부부로 맺어졌으면 서로를 믿고 사랑해야 할 것이다! 참말이지, 이들의 삶의 지조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들 부부에게는 중학교 1학년에 다니는 14살 딸애와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11살 나는 아들-사랑스런 남매가 있다. 자식들은 바로 그들 생활의 기둥이었다.
그들에게 부부금슬을 물으니 정성현 씨가 농을 한 마디 한다.
“아이고 말도 마세요, 나는 머슴이고 이곳 사장님은 문경희 여사에요.”
이에 문 경희 씨는 말없이 웃으며 돌아서서 손님을 맞이했다.
이철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