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이러니다. 내가 샌님이 되었으니 말이다. 워낙 나와 선생은 악연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선생들한테 많이 당한 느낌이다. 소학교에서 중학교로, 학벌이 높아지면 질수록 더 그런 것 같다. 그 중에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몇 가지를 들어본다. 소학교 때 별로 잘 못한 거 없는 것 같은데 젊은 체육선생한테 한번 맞아 터졌다. 초중 때는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여 내내 지각을 지는데 세워놓고 제 자리로 잘 들여보내지 않는데 불만을 표시하느라고 항상 쉬엇 자세로 비뚤하게 서 있다가 그만 우리 담임선생한테 복사뼈가 채여 탱탱 부어나기도 했다.
내가 다리를 저는 것을 본 우락부락 싸움 잘 하기로 이름난 둘째 형이 주먹을 휘두르며 윽윽 하자, ‘거저 때렸겠나? 맞을 짓을 했으니깐 때렸지. 뇌두라! 고운 아이 매 하나 더 준게다’라고 아버지가 으흠하며 말렸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고중에 올라와서 수학시간에 소설『수호전』을 보다가 수학선생한테 들켜 그 남한테 빌린 소설을 갈기갈기 찢기우기도 했다. 나의 문학꿈이 산산이 쪼각나는 순간이었다. 내가 소학교에서 고중을 다닐 때까지는 분명 사도존엄을 비판하던 때이건만 우리 선생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드센지? 우리는 많이들 기가 죽어 있었다. 그래서 선생지위 臭老九고 무어고 떠나 선생하면 질색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 연변대학교 입학통지서를 받았을 때 졸업하면 중학교 샌님이 된다는 말에 입학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때 대학 붙기가 하늘에 별 따기건만. 그런데 그때 입학통지서가 온 대학에 가지 않으면 1년간 대학입학시험 자격을 취소하는 판이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간 것이 연변대학교이다. 1년간 놀며 그럭저럭 공부하다가 돌아오기로 작심하고. 그런데 1년간 공부하는 사이에 어느 새 대학공부가 재미났고 연변대학에 정 들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샌님으로 배치 받아가는 나는 꼭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가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강의는 그럭저럭 떼우고 이판사판으로 석사연구생시험을 준비했다. 붙으면 새로 공부하고 못 붙으면 下海하고. 그런데 개빵으로 붙었다. 연구생공부를 무난히 끝마쳤다. 그런데 운명의 신은 나를 대학교 샌님으로 들어앉힌다. 대학교 샌님이고 뭐고 선생노릇은 딱 질색이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하면 된다, 잘 한다 식으로 짜른 바지 춰주는 바람에 그럭저럭 한 2-3년하고 박사를 한답시고 한국에 유학행을 떠났다. 그런데 지도교수와의 악연은 나를 너무나 피곤하게 하였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번역 출판한 책을 갖다 바치면 그 책을 탕, 탕 책상에 매치며 전공에 아무런 관계도 안 되는 이 잘난 책을 왜 번역하는가하며 야단이다. 용돈 좀 마련하느라고 진행한 번역을 이렇게 닥달하니 나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가난한 중국유학생의 처지를 못 알아주는 지도교수가 너무나 야속하고 얄미웠다. 이래저래 나는 지도교수와 꼬이고 꼬여 결국 박사학위 논문도 10년 가까이 가서야 겨우 심사를 받을 수 있었다. 나의 박사학위는 정말 눈물 젖은 박사학위.
나는 박사학위를 받고 줄곧 대학교 샌님노릇을 해왔다. 어쩐지 이때쯤은 대학교 샌님이 싫지 않았다.
나는 항상 학생들을 너그럽게 대해왔다. 嚴師出高徒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하고 친구가 되고 싶었다. 나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로 대입해본다. 선생은 시어머니, 학생은 며느리, 여기에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듯이 학생도 선생으로 될 수 있고... 그리고 시어머니가 된 며느리가 새로운 며느리를 대하는 상반되는 두 가지 태도를 상정해본다. 시어머니 위엄을 살려 내가 당했으니 너도 한번 당해보아라하는 식. 그리고 이해심이 앞서며 오히려 인간적인 배려를 많이 해주는 식. 선생이 학생을 대하는 태도도 이 두 가지로 상정해볼 수 있다 할 때 나는 단연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웃으며 매부 좋고 누이 좋은 식으로 보다 많이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자율에 맡기는 유연함을 보인다.
2007.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