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의 그림에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이 있다. 한 젊은 여인이 자신의 가슴을 헤치고 노인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이다. 노인은 발가벗겨진 상태로 앉아 있는데 허벅지 부분만 천으로 덮여 있을 뿐이다. 젊은 여인은 노인의 오른쪽에 앉아서 허리를 틀어 노인의 고개를 왼손으로 둘러 안고서는 오른손으로 젖통을 받쳐 젖꼭지를 노인의 입에 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이 그림을 보고 나는 흠칫 놀랐다. 늙은 남자와 젊은 여인의 특별한 모습, 그것도 그 흔한 포옹이나 입맞춤이 아닌 젖을 물린 모습이라니…….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상황이 특별하다. 노인은 쇠사슬로 두 손이 뒤로 묶여져 있다. 앉아 있는 자리도 겨우 짚이 깔렸을 뿐, 가구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배경도 두툼한 벽들로 채워지고, 왼쪽 위 귀퉁이에 황혼이 비친 창살이 달린 창이 조금 보일 뿐이다. 감방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젊은 여인은 옷차림이 화려하다. 치마는 밝은 붉은빛이고, 겉자락을 양쪽으로 젖힌 웃옷도 속적삼도 흰색이다. 살지고 풍만한 모습이 분명 젊은 아기엄마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노인은 죄수이고, 여인은 찾아온 여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관계는? 젊은 아내일까, 연인일까? 그렇더라도 젖을 먹이는 모습은?
그런데, 이들은 부녀 사이라는 것이다. 아기엄마인 젊은 딸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늙은 아버지에게 자기의 젖을 꺼내어 먹여주고 있는 모습이란다. 뜻밖이다. 딸의 숭고한 행동이 충격적이다.
서기 30년경 로마의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쓴 책 <Facta et Dicta Memorabila>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한다.
시몬(Cimon)이라는 사람이 무거운 죄로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밥을 주지 마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노인은 여러 날을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
딸 페로(Pero)가 그 소식을 듣고 감옥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음식은 일절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맨손으로 들어간 딸은 굶어 지쳐서 거의 죽게 된 아버지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이것이라도 먹여드리자.’
딸 페로는 가슴을 헤치고 자신의 젖을 꺼냈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일으켜 안고는 젖꼭지를 물렸다. 아버지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지만, 딸은 품어 안으며 안달을 했다.
“아버지. 잡수세요. 젖은 우리 아기가 실컷 먹고도 남아요.”
마침 딸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때여서 젖이 통통 불어올라 있었다. 딸은 오래 동안 굶주린 아버지의 입안에 젖꼭지를 밀어 넣고 손으로 젖통을 눌러 젖을 짜 넣었다. 목마저 말랐던 아버지는 별수 없이 입안에 흘러들어온 딸의 젖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간수가 너무나 감격하여 윗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당국도 그 숭고한 효성에 감동하여 아버지를 석방시켜 주었다.
이 이야기를 주제로 그린 그림들이 로마시대에 유행되었고, 16세기 르네상스 시절에도 많이 그려졌다고 한다. 현재는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1540년에 그린 Sebald Beham의 <시몬과 페로>(Cimon and Pero)가 가장 오래된 것이고, 그밖에 Jean Baptiste Greuze와 작자를 알 수 없는 작품 몇이 더 있다.
늙은 아버지에게 딸이 젖을 먹인 이야기도 몇이 전한다.
그리스의 에반더(Evander)라는 왕이 왕위에서 쫓겨나 감옥에서 굶어 죽어갈 때 그의 딸 유프레시아(Euphresia)가 젖을 먹였다고 하며, 시모노스(Cimonos) 왕을 딸 잰티페가 젖을 먹여 오래 연명시켜서 간수를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도 붓다 시대에 가빌라 나라의 아세도 왕이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먹을 것을 적게 주어 굶어죽게 하자, 갇힌 왕의 왕비가 온몸에 꿀을 바르고 면회를 가서 그걸 빨아먹게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또 미국의 작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끝부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산 후의 여인이 불은 젖을, 굶주려서 죽어가는 남자 노인에게 가슴을 풀어헤치고 내밀고, 노인이 거부하자 어서 먹어야 한다며 노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젖꼭지를 노인의 입에 물린다.
여성에게 젖은 여성성(女性性)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보이거나 만지게 하지 않는다. 젖을 먹이는 것도 자신의 아이에게만 한한다. 남의 아기라 하더라도 그 아이의 생존과 관련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젖을 주지 않는다. 젖을 보이고 물리는 것 자체가 이미 성(性)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낳고 길러준 아버지라 하더라도 젖을 보이거나 물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루벤스의 <노인과 여인> 그림은 아버지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이다. 여성성을 뛰어넘은 생명 존중이요, 효성(孝誠)의 발로(發露)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동적이고 충격적이다. 이 어찌 윤리나 도덕을 논할 것인가. 위대한 작품은 평범한 인식을 뛰어넘을 때 나타나며, 상상을 초월할 때 감동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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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상지대.연변대 초빙교수 역임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남한강문학회 회장
국제펜클럽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