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의 중국 이주를 한반도에 단일한 조선민족이 형성 된 후부터 살펴보자. 전쟁으로 인한 강제적 이주, 생존을 인한 귀순, 유학, 그리고 상업적 목적과 정치피난 등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1. 당, 송 시기
상호간의 필요에 의해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세력을 형성하였다. 660년, 당고종은 13만의 군대를 백제에 파견하였으며 신라도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백제를 협공하여 그 해에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듬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은 그 화살을 고구려에 돌렸다. 신라의 군사와 군량, 그리고 당나라의 35만 군대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때 고구려는 내부에 분열이 생겨 정권다툼이 치열하였다. 665년 연개소문이 병사한 뒤, 아들 삼형제의 정권다툼 끝에 영토의 일부를 당나라, 신나라에 떼어 주었고 국력은 심하게 소모되었으며, 마침내 668년에 고구려의 멸망에 이르렀다. 이로써 신라에 의한 삼국의 불완전한 통일이 실현되었다. 이 시기 조선인의 중국이주를 보면 당태종이 고구려 침략 시에 고연수(高延壽)가 3만 6800명을 거느리고 투항하자 그 중에서 3500명을 뽑아서 내지로 옮기고 기타는 적당히 처리했다는 기사가 있다. 『한국유이민사』 또 백제가 망한 뒤 의자왕(義慈王)을 포함해 태자, 왕자, 대신, 장군 등 88명과 1만 2870명의 백성이 포로가 되어 낙양으로 끌려갔으며 대부분은 중국 귀족의 노비로 일생을 마쳤다. 고구려가 망한 후에는 보장왕(寶藏王)과 가족 등 귀족과 3만 8300호의 약 20만 백성이 당나라의 포로로 되어 강회(江淮)의 남방 및 산남, 경서 등 주의 광활한 지역에 강제이주를 당했다.
한편 신라와 당나라는 국교를 회복한 뒤 사절의 왕래가 빈번하였으며 각종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어 갔다. 처음 이주민은 바다를 통해 중국에 들어왔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는 대동강을 경계선으로 삼았는데 항선은 한강구(漢江口)에서 산동반도, 전라남도 영암에서 정해(定海, 상해부근)의 두 갈래가 있었다. 819년 신라는 당나라의 요청에 의해 순천군 장군 김웅원에게 3만 군사를 주어 당나라 군대를 도와 내란을 평정하였다. 당나라는 외국인의 난입을 우려하였으며 귀화한 외국인에 대해서는 10년간 세금을 면하였다.
8-9세기 산동, 강소 등 연해지역에는 신라상인을 위주로 하는 집거구(집단 거류지)-신라방이 나타났다. 이는 일본고승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도 묘사되고 있다. 신라방에 대해 최남선은 “신라는 당나라로 더불어 특수한 교제를 짓고 또 연조(年祖)도 길므로 신라인의 당나라에 있는 활동은 종교, 문학, 기술공예(技藝) 등 각 방면에 걸쳐서 더욱 현저한 것이 있었으며 중국의 동해안 및 장안에 이르는 연로에 신라인의 거류지가 연속해 있어 이를 신라방이라고 일렀다.”고 하였다. 『고사통』(古事通) 구당서 199권 149열전 동이 신라조에는 “長慶五年四月 鴻**寺 新羅國告哀質子 及年滿合歸國學生等 共一百五人幷放還”(장경오년사월 홍**사 신나국고애질자 급년만합귀국학생등 공일백오인병방환)이라고 적었는바 홍려사의 혜택을 거쳐 당나라에서 유학한 학생 중 일시에 105명이 귀국한 것을 보아 당시의 유학생 규모를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 당나라는 외국인에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빈공과(賓貢科)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 응시하여 급제한 신라인이 58명에 달하였다.
이들 중 걸출한 인물로는 김운경(金云卿), 김가기(金可紀), 최치원(崔致遠) 등이 있다. 특히 최치원은 12살에 당나라로 가서 18살에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으면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친 것으로 유명하다. 신라로 귀국 후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으며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과 시문(詩文) 약간을 남기었다. 유학생들과 동행하여 고승들의 입당구법(入唐求法)도 성황을 이루었다. 의상(義湘)과 원측(圓測)처럼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의 학덕 높은 승려들과 교유함으로써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한 승려도 많다. 사책에 산재되어 있는 것만 추려보아도 90여 명을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당승 의정(義淨)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에는 60여 명의 구법승려가 기록되었는데 그 중 7명의 신라인이 적혀있다.
아리예발마(阿離耶跋摩), 혜업(慧業), 현태(玄太), 현조(玄照), 현각(玄恪), 혜룬(慧輪), 구본(求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뒤를 이어 혜초(慧超)는 구법천축(求法天竺)한 자 중에서 가장 특출한 인물이다. 1908년 돈황석실에서 발견된 『왕오천축국전(王五天竺國傳)』은 이러한 결과로 거두어진 성과 중의 하나이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아시아대륙의 남부를 최초로 훑은 사람이며 또 최후의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 신라의 국위를 해외에 선양한 사람으로 추모를 받고 있다.
신라 이후에도 이러한 조선인의 해외활동은 정지되지 않고 지속적이었다. 당나라가 망한 후에는 송나라가 중원을 장악하였고, 고려와의 문물교류가 흥성했으며 고여관의 설치가 그 일례이다. 이러한 문물교류의 성행으로 피차간에 귀화가 있었다. 김행성(金行成), 강전(康戬)과 같은 인물은 고려인으로 송나라에서 고관직에 있었다. 고려와 송나라의 교섭은 서해의 바다길이 이용되었다. 따라서 수도 개성의 해상문호인 예성항(禮成港)은 일찍부터 번창하여 송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져다. 송나라와의 대외관계는 문화와 경제면의 교섭이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고려 화가 이녕(李寧)이 송나라에 갔을 때 송휘종의 명으로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려 포상 받은 데에서도 그 사정을 엿볼 수 있다. 고려청자와 목판인쇄의 발달은 송나라의 자기와 서적의 수입으로 더욱 가능 하였던 것이다.
2. 요, 원 시기
고려는 송나라와 평화적인 교류와는 반대로, 발해를 멸하고(926년) 만주일대를 휩쓴 거란족의 요나라와는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993년, 1010년, 1018년에 거친 3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에서 많은 포로가 생기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요사지리지』에는 요나라에 억류된 고려민이 집단부락을 형성하여 생활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주(현 적봉동남에 있음)에는 고려민을 안착하기 위해 주(州)를 설치하였다고 적혀있다. 삼한(三韓)현은 성종이 고려를 징벌하여 삼한유종의 포로로서 현을 편성한 것이며 호수가 5000호, 가솔이 1만 명이 되었다. 이때 여진의 세력은 날로 강성해져 가고 있었다. 아골타는 여진을 통합하여 1115년에 금나라를 세웠고 1125년 거란(요)을 멸하고 2년 후에는 송나라를 쳐서 그 수도를 함락 시켰다. 이리하여 금나라는 양자강 이북의 중국대륙과 만주대륙 전역을 지배하는 최대 강국이 되었다. 금나라는 고려에 대하여 우월한 입장에서 국교체결을 요구하였으며 고려는 평화유지라는 현실 문제를 고려하여 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금나라의 무력진출을 피 할 수 있게 되었다.
몽고사신 저고여의 피살을 구실로 몽고의 고려 침략은 1231년 1월에 시작되어 1260년까지 지속되었다. 몽고의 침략으로 인한 참상은 갈수록 심해졌다. 특히, 차라대(車羅大)의 군대는 1254년에서 1259년에 이르는 6년 동안 고려의 내륙 지역을 모조리 유린하였다. 『고려사』는 “남녀포로 20만 6800명, 살육당한 자는 셀 수도 없었다.”고 기록한다. 고려인이 몽고에게 투항한 사실도 있다.
“인주(邻州) 도령인 홍복원(洪福源)은 1231년에 40개 성의 1500호를 거느리고 최초로 몽고에 집단 투항 했으며 요양과 심주(심양)로 이주하였다. 원나라는 요양에 고려군민 만호부(高麗軍民萬戶府)를 설치하고 홍복원을 만호로 봉하였으며 1261년 원세조 쿠빌 라이는 고려군민 만호부를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總管府)로 고치고 홍복원을 총관으로 하려 군민 5183호를 관할케 하였다. 1233년 김신효(金信孝)가 10여 성으로써 서경에서 몽고에 투항했으며 『원사』208권에 의하면 1238년 5월에 조현습(趙玄習), 이원우(李元**)가 2000여 명을 거느리고 몽고에 투항해 요양에 안치되었다. 1258년 영흥지방의 조휘(趙暉)와 탁청(卓靑)이 투항하여 영흥이북의 비옥한 지대가 몽고의 판도에 들어가게 되었고 1269년 세경총관하리 최탄(崔坦)이 서경 54성을 이끌고 몽고에 귀부(歸附)하였다.” 『고려사』 卷二六 世家
“홍씨 가문을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홍씨 가문의 몽고와의 관계는 그의 부친 대에서부터 싹트고 있었다. 1217년 거란유종의 난이 반도에 미쳐 몽고군이 토벌에 나섰을 때 인주도령으로 있던 홍복원의 부친 홍대순(洪大純)은 몽고군에 귀부하여 거란토벌에 협력하였다. 몽고군의 제1차 토벌이 실패하여 철수한 후에도 홍복원 일가는 계속 서경에 머물렀고 여전히 고려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최이(崔怡)가 3000명 병사를 일으켜 서경으로 진격하자 홍복원은 요동으로 달아났다. 요양에서 몽고로부터 금부(훈장)를 받고 몽고군에 투항한 무리를 요양에 안치하고 관리하였다. 몽고의 제3차 고려 침략 때 홍복원은 가이드로 나서서 함께 압록강을 건넜으며 제4차 때도 수행하였다. 제5차 때는 차라대 정동원수의 가이드로 쳐들어 왔고 제6차 때 역시 따라왔다. 그러나 그는, 1258년 심양에서 영녕공 왕순(王淳)과의 싸움 끝에 죽었다. 그의 둘째 아들 홍다구(洪茶丘)는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服屬)한 시기에 있어서 몽고인 이상으로 고려를 괴롭혔다. 또 홍다구의 아들 홍중희(洪重喜)도 조상 못지않게 고려에 해독을 끼친 자이다. ”
고려는 원나라의 강요에 많은 공녀(貢女)를 보냈으며 이로 인해 고려에 조혼풍속이 생겼을 정도로 심했다. 공녀출신 중에는 기황후(奇皇后) 기황후는 고려 총부산낭(總部散郎) 기자오(奇子敖)의 딸로서 일찍이 원에 들어가 궁녀노릇을 하던 중 순제의 극진한 사랑을 받아 ‘몽고녀 외의 여성으로 정후를 삼지 말라’는 원실의 가훈을 깨뜨리고 1365년 12월에 정후로 책봉되었다. 그 결과 친가 3대가 봉왕되고 부친 자오는 영안왕, 오라비인 기기식(起奇軾), 기철(奇轍)은 행성참지정사 한람학사의 벼슬을 받았다. 아들 아이우시리다라가 황태자로 책봉되어 기씨 일가의 세력은 이후 고려, 원나라 말기의 천하를 좌우하게 되었다. 기황후의 이름은 몽고식으로는 숙량합완자홀도(肅良合完者忽都), 자신의 재부(財賦)를 장관하는 관서로 자정원(資政院)을 설치하였으며, 자정원을 배경으로 한 고여관리들의 고려 정계에서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자정원의 정치세력이 원나라 행정부서에까지 미치었고 원나라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었다.와 같이 원나라 황제의 배필로서 부귀와 영화를 누린 여자가 있었으나 대부분은 불행한 일생을 마쳤다. 고려의 유이민에 대해 원나라는 포섭,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그들에 대해 우대하였다. 나아가 이들로 만주의 광활한 초지를 개발하고 조선을 동방진출의 정치적, 군사적 터전으로 삼았다. 안무고려근민총관이라든지 심양왕의 존재 등은 고려를 분열시켜 원나라의 영향권 아래에 매어 두려는 시도였다. 고려는 몽고의 침략으로 인해 국가재정이 허물어지고 있어 백관의 봉록도 정지되는 형편이었고 “평민은 부역(賦役)을 할 사람이 없어 양반의 노비들이 평민층의 부역을 대신”할 정도였다.
『고려사』卷八五 刑法 대량의 이주민에 대해 고려는 그들의 대한 사전방지 등 대책을 취하였다. 요양, 심양 등 일대에 집중 된 고려민 총 호수는 1330-1332년에 5183호, 『조선전사』7 중세 편 고려사 2에는 17세기 중엽 수십만의 고려인이 요양, 심양지대에 있었다고 기록한다. 이들은 또 요양성에만 거주치 않았으며 요양, 심양 부근의 14개 주에 흩어져 집단부락을 이룩하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