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 익힌 ‘모택동 체조’로 젊음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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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 익힌 ‘모택동 체조’로 젊음 유지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7.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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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주베트남 공사 이대용 (82세)

사진=신창섭기자
이대용(82) 전 주월공사는 건강하다. 듣고 보는 데 전혀 지장이 없고, 걸음걸이도 가벼워만 보인다. 옷 소매를 걷으면 팔뚝의 근육이 불끈 드러나는데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라곤 전혀 볼 수 없다. 실제로 요즘도 팔굽혀펴기 50회 정도는 너끈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 공사에게 그같은 건강이 그저 주어진 것은 아니다.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어요.” 이 전 공사가 말했기에 더욱 예사스럽게 들리지 않는 얘기다.

육사 7기로 임관한 후 6·25 전쟁을 맞은 그는 줄곧 삶과 죽음의 경계인 전투 현장에 있었다. 특히 전쟁발발 직후 벌어진 춘천 전투에선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장교 6명 중 유일하게 혼자만 생존했다. 전쟁터에서 맞은 파편 2조각은 아직도 몸에 박혀있다.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비교적 운이 좋았던 셈이다. 그런데 그런 운이 평생 따라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불운은 베트남에서 시작됐다. 1973년 주베트남대사관 경제공사로 부임한 그는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외교관 신분임에도 불법 체포돼 사이공(현 호찌민)의 치화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몸을 제대로 누일 수도 없이 좁고 열악한 환경의 형무소에서 하루 두끼, 죽과 나물로 연명하는 수감생활이 이어졌다. 영양실조 증세로 손톱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체의 고통뿐만이 아니었다. 베트남 경찰과 북한대사관 정보원들에 의해 끊임없이 전향과 귀순을 강요받았다. “수감생활을 몇달 견디고 나니까 체중이 78㎏에서 42㎏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몸의 피하조직이 파괴되고, 눈도 제대로 안 보이고, 귀도 멍멍해져갔습니다. 그 와중에 심문과 자술서 강요가 이어졌어요.”

그러나 이 전 공사는 본인의 의지로 힘든 상황을 견뎌냈다. 그 하나가 일종의 오기였다. 귀순 강요에 “죽으면 죽었지 항복 안한다”고 버텼다. 현지 우익 인사들도 속속 귀순하는 마당에 정신력만으로 외롭게 투쟁했다. 또 하나는 수감생활을 하며 알게 된 공산당원들로부터 ‘모택동 체조’를 익혔다는 것이다. 모택동체조는 몸이 약한 마오쩌둥(毛澤東)이 장수하기 위해 고안해낸 체조다. 그의 수감생활 이야기를 듣다보면 영화 ‘빠삐용’이 연상된다.

그리고 5년만에 그는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한국땅을 처음 밟은후 먹은 음식이 귤입니다. 너무 맛있었어요. 귤뿐이 아닙니다. 돌이라도 있으면 소화시킬 정도였으니까요. 소화기능 하나는 확실히 좋아진 것 같았습니다.” 이 전 공사는 요즘 바쁘다.

육사 총동창회 고문, 재향군인회 원로자문위원, 자유수호국민운동 공동의장 등으로 나이를 잊고 산다.

그래서 지금 그의 건강을 지켜주는 것은 ‘운’이 아닌 삶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인 것 같다.

건강비결

이대용 전 공사가 베트남 형무소시절 배워 지금도 계속해오고 있다는 ‘마오쩌둥(毛澤東) 체조’는 일종의 단전호흡 같은 것이다.

팔을 들어올릴 때 숨을 들이쉬며 아랫배에 힘을 준 후, 팔을 내리며 항문을 오므리며 숨을 내뱉는 것이 한 동작이다. 호흡을 통한 하복부 수축이 체조의 주요 포인트다. 그는 이를 요즘도 매일 아침 500회 이상씩 하고 있다.

걷기도 이 전 공사의 주요 건강관리법 중 하나다. 만보계를 항시 착용하고 다니는데 하루 평균 6000보 이상을 걷는다고 한다.

그는 원래 애주가였다. 예전만은 못해도 요즘도 반주 정도는 즐긴다.

그러나 담배는 베트남에서 돌아온 후 끊었다. 그래도 고민되는 일이 있으면 아직도 ‘한대 생각’이 절실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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