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남산
장인장모가 대인(大仁)훼리 티켓을 끊어오는 바람에 갑자기 홀가분해졌다. 대인훼리가 오후에 인천항을 출발하니 오전시간이 남아돌았다. 나는 장인장모를 모시고 남산으로 향했다. 이번 기회에 한 번 제대로 된 효도관광을 시켜주고 싶었는데 갑자기 티켓을 끊어오는 바람에 남산으로 마무리를 짓는 수밖에 없었다.
케불카는 흔들흔들 정상을 바라고 올라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울긋불긋 빌딩숲이 아득히 펼쳐졌다. 수많은 전철역과 버스정류소가 한눈에 보이고 강남과 강북이 한눈에 보이고 세상이 한눈에 보였다.
장인장모는 창가에 못 박힌 듯 서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모두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을 연발하지만 웬일인지 어르신들만은 무감각이었다. 정상에 올라가서도 이곳저곳 소개해 주었지만 듣는 모습이 심드렁하다.
“기분 나쁜 일이 있나요?”
장인은 그 때야 사위가 오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사위, 나는 이 사람들을 좋아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통 모르겠소. 고국이라고 와보니 조선족을 헌신짝취급을 하니 무슨 정감이 있겠소. 그들을 좋아하자니 내 꼴이 우습고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고.......”
장인은 처음 한국에 온 조선족들이 흔히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조선족들이 모이면 이런 고민을 털어놓고 몰인정한 한국인들을 비난하고 조소하면서 서로 위로하곤 한다. 그러다가도 ‘돈 벌러 왔으니 참아야지 어쩌겠소.’로 매듭을 짓고는 한숨을 ‘후-’내 쉰다. 그것이 조선족들이 냉담해 지는 과정이 되고 ‘돈 밖에 모르는’과정이 되고 결국은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어르신, 객지에 나오면 어디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있습니까? 우리가 미워하고 증오해도 우린 동포사이고 고국과 동포관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 동안 선진국 문턱까지 가고 보니 간덩이가 부어서 돈 벌러 온 중국동포들이 눈에 띄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중국경제의 급부상으로 인한 조선족의 지위향상과 최다 해외 동포인 조선족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에 온 조선족들은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뇌봉의 ‘나사못정신’을 발양하여 기술을 연찬하고 소질을 제고하여 한국 업체의 매너 있는 파트너로 거듭나야 합니다.”
금방까지도 난색을 하고 있던 장인은 뇌봉을 곁드는 바람에 껄껄 웃으신다. 70년대에 라디오를 조립해서 ‘KBS사회교육방송’과 ‘메아리’방송을 들었다는 장인이다. 워낙 가락을 좋아하다 보니 방송을 통해 흘러간 옛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단다. 그 한국을 무연고다 보니 30년이 훌쩍 지나서야 고령 동포 자격으로 H-2비자를 받고 찾은 것이다.
장인장모의 50여 일간의 한국나들이는 생존경쟁이 치열한 자본주의를 경험하게 하였고 그 속에서 고역을 치르는 조선족들의 생활상을 보게 하였으며 노년에 서러운 마음과 슬픈 추억도 간직하게 했다. (끝)
2007년9월12일 연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