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45년 조선의용군 제5대대에서 꾸린 청년강습반에 참가하여 많은것을 배웠다. 강습반은 흥경현(현재의 신빈현) 원 위만경찰서가 있던 동대영에서 진행되였는데 현내 각 농촌 청년 40여명이 참가했고 안종주대대장, 조관부대장 및 간사들이 교관을 담당했으며 강습내용은 사회발전사,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론》, 국제국내 정세와 토지문제 등이였다. 이 강습반을 통해 나는 팔로군, 신사군의 취지, 성격, 목적 등에 대해 알게 되였으며 더우기 중국공산당이 망국노인 조선청년들을 동원하여 조선의용군을 부추겨 세워주고 물심 량면으로 도와준데 대해 알게 되였다. 그중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장군의 전기적생애와 투쟁경력을 교관들의 강의를 통하여 다소 알게 되였다. 반세기가 지난 1990년 홍군 지하일군 한청으로부터 물려받은 《조선의용군 발자취》집필조에서 편집출판한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란 책자에 실린 무정장군의 투쟁사를 읽으면서 더욱 감회가 깊었다.
금년(8월)은 항일전쟁승리 62주년이 되는 해이며 무정장군 서거 56주년이 되는 해이다. 다행한것은 현재 동북에 생존해있는 원 조선의용군 로전사들과 조선족유지들이 무정장군이 1945년 심양시 우홍구 오가황조선족소학교에서 소집했던 전군대회를 기리며 그 자리에 력사적인 기념물을 세우기 위해 서두르고있다는것이다. 이에 이 글을 쓰게 됨을 밝혀둔다.
무정(본명 김무정, 1904.5.16~1951.8.9)은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탄생, 청소년시절 서울기독교중학교를 졸업했다. 일제의 발굽아래서 서울시민들의 처참한 생활을 목격한 무정은 일제침략자를 몰아내고 광복을 이룩할 결의를 다지며 배움의 길을 찾아 국경을 넘어 북경으로 왔다. 1924년 보정군관학교(강무당) 포병과를 졸업했으며 그 이듬해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후 상해로 가 중국공산당 상해조선인지부에서 사업했다.
한번은 상해 조선인소학교 운동대회시 무정이 운동장에 나타나자 이단자들이 무정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방하며 수군거렸다. 이 소리를 들은 무정은 당장에 달려가 손에 들었던 사꾸라몽둥이로 그자들을 족쳐 쫓아버렸다.
후에 무정은 상해를 떠나 서금에 가 중국로농홍군에 참가하여 팽덕회의 수하에서 사업했다. 1930년 7월 팽덕회가 전위서기를 담임하고있는 홍군 제3군단은 묘략으로 동정호반의 악주를 점령했다. 그러자 동정호에 정박해있던 미국, 영국, 일본 련합함대가 악주성을 미친듯이 포격했다. 당시 패장이였던 무정은 팽덕회를 찾아가 대포로 적들의 포격에 반격을 가하자며 자기의 타산을 말했다. 팽덕회는 무정의 타산에 찬성하며 격려해주었다. 당시 무정의 수중에는 야전포 4문과 산포 2문이 있었는데 이 대포들은 악주성을 점령할 때 적들이 버리고 간것이였다. 무정은 전사들을 지휘하여 로획한 대포들을 은페지에 끌어다놓고 포를 한번도 본적이 없고 만져보지도 못한 전사들에게 포사격요령을 가르쳤다. 포에 장탄한후 적함을 겨누고 사격하자 적함에서 불길이 일었다. 이것을 보자 전사들은 환호했다. 전사들의 사기는 충천했다. 대포 20여발을 쏘아 적함 10여척을 명중하자 놀란 적 련합함대는 더는 덤비지 못했다.
이때부터 무정의 이름은 전 홍군에 널리 알려졌고 홍군에 조선인이 있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졌다. 당시 홍군내에서 대포를 다룰줄 아는 사람은 팽덕회와 무정뿐이였던것이다.
1934년 10월 중국로농홍군은 2만5천리 장정을 시작했다. 무정은 홍군 제3군단 팽덕회를 따라 대도하를 건느고 설산을 넘어 파서에 이르렀다. 당시 홍군 제4방면군은 장국도의 모략으로 무전암호를 거두어 군과 군, 각 군과 모택동과의 련락을 끊어버리고 홍군 제3군단을 핍박하여 북상을 정지하고 남진하게 하려 했다. 장국도의 이 모략을 분쇄하려면 아계로 진출한 제1군단과 련계를 맺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제3군단은 송신기를 마련하고 무전암호를 만들어 제1군단에 보내주어야 했다. 팽덕회는 이 중대한 임무를 무정에게 맡겼다.
무정은 지남침 하나만을 지닌채 북으로 걸음을 재우쳤다. 망망초원에는 길잡이도 없었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설산과 초지를 지날 때는 가는 곳마다 홍군전사들의 시체가 묻혀있었다. 시체를 만날 때마다 거수경례를 하고 돌아서는 무정의 두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며칠을 걸었는지, 얼마를 걸었는지 앞에 가마터가 나타났다. 손을 대보니 얼마전에 사용했던 모양으로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무정이 걸음을 재우쳐 언덕을 넘어서니 홍군부대가 보였다. 제1군단이였다. 무정은 무전암호를 넘겨주고 제1군단이 무전기로 모택동과 수신련락이 된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고 돌아섰다.
홍군중에 조선인 10여명이 장정에 참가했으나 장정도중 거의 희생되였고 섬북까지 도착한 사람은 양림과 무정뿐이였다. 양림과 무정은 1936년 2월 모택동의 직접적인 령도아래 팽덕회가 지휘한 동정항일에도 참가했다. 무정은 정찰사업에서 용감하고 민첩하게 사업하면서 팽덕회의 둘도 없는 조수역할을 해냈다. 무정은 또 홍군 제15군단 75사의 참모장이였던 양림이 황하를 건너는데 좋은 참모였고 선봉이였다.
양림은 홍군 주력부대와 모택동의 도하를 엄호한후 다음 등륙지점인 하가요를 떠나 적들의 중심진지를 향해 돌격할 때 부상당해 희생되였다. 이리하여 장정에 참가한 조선인으로는 무정 한사람이 남았고 연안에 들어온 첫 조선인이였다. 무정에 이어 연안에 온 조선인은 서안사변시 장학량의 슬하에서 장개석을 구금하는데 기여한 조선인 리휘였다. 리휘는 서안사변후 《나의 고향 고려》란 글을 신문에 발표한바 있다.
양상곤의 소개로 무정은 리휘를 만나게 되였고 리휘를 통하여 국민당구역에 있는 조선인상황과 한위건 등 혁명동지들에 대해 알게 되였다. 무정은 리휘에게 조선청년들을 많이 홍군에 끌어들여 혁명리론, 군사리론, 기술을 배워 인재를 양성해야 하며 중국을 해방하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력량을 키워 앞으로 조선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등 열변을 토했다. 그는 홍군대학에서 특과영 영장을 담임하고 포병수를 양성했다.
1937년 8월 중국로농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 무정은 팔로군총부 작전과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성급하고 과격한 성격도 있었지만 군인의 강인한 의지력을 갖고있어 주덕과 팽덕회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으며 팽덕회의 주선으로 직속 포병퇀 지도원과 결혼했다.
1938년 1월 팔로군총부는 림분부근에서 성대한 의식을 갖고 사상 첫 포병퇀의 창립을 선언했다. 1939년 2월 무정은 총부의 지시로 3련, 4련, 관통대를 거느리고 진동남에 가 일제침략군과 싸웠다.
1940년 중외를 진감하는 백퇀대전이 일어났다. 4월 무정은 포병퇀을 이끌고 진동남 적진지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포병을 배치하고 적의 또치까를 격파함으로써 보병의 진격로를 열어주었다.
백퇀대전이 끝난후 무정은 당중앙의 지시에 좇아 관내 여러 지방에서 활동하고있는 조선인항일단체들의 통일과 련합을 위한 지도사업을 맡아나섰다.
1941년 1월 10일 기열료군구 태항산분구 동욕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가 설립되였는데 무정, 진광화가 각각 회장, 부회장을 맡았다. 그해 7월 9일에는 련합회 섬감녕변구지회가 연안에서 건립, 무정이 회장의 신분으로 연설했다.
1942년말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임명된 무정은 태항산에서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장을 겸임했다.
1945년 7월 연안팔로군총부에서는 무정사령원을 불렀다. 연안으로 간 무정은 8월 1일 연안포병학교 개교식에 참석하여 연설했다.
1945년 8월 11일 주덕총사령은 연안총부 제6호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좇아 무정은 즉시 화북과 화중의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동북으로 진군했다.
조선의용군 연안총부와 연안조선혁명군정학교의 300여명은 8월말에 출발해 60일간의 강행군끝에 10월말에 심양 유국역에 도착하여 조선족마을에서 숙영했으며 장가구와 태항산에서 온 100여명과 진기예와 태항산에서 제2차로 북상한 의용군 300여명과 합세했다.
이에 앞서 선두부대로 주연이 인솔한 기열료 조선의용군 450여명은 리운창사령원의 명령에 의해 료양에 도착, 위만군경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곳을 해방한후 9월초에 심양에 입성해 한청이 심양에서 이미 조직한 조선의용군 1,000여명과 합세해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를 조직(지대장에 한청, 정치부주임에 주연)했다.
1945년 11월 7일 조선의용군은 심양역에서 개최된 쏘련 10월혁명기념 검열식에 참가했다. 11월 10일 심양시 우홍구 오가황조선족소학교에서 합세한 조선의용군 전체 장병들과 독립동맹 전체 맹원 대회가 성대히 개최되였다.
이 대회에서 무정사령원은 당면한 세계정세와 국내정세를 론술한후 조선독립동맹의 조선으로의 귀국과 조선의용군의 동북체류 및 확군을 선언했다. 이 대회에서 조선의용군은 1, 3, 5지대로 새로 개편, 1지대는 남만에, 3지대는 북만에, 5지대는 동만으로 각각 진출하여 확군과 조선족인민의 보위를 책임졌다.
이 대회는 조선의용군이 가졌던 처음이자 마지막 전체 대회이미 특별한 력사적전환점으로 되는 대회로서 력사에 길이 남을것이다.
요녕인터넷신문/서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