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다.
다정하고 열렬하고 푸근했던 계절들을 뒤로 하고 겨울이 성큼 다가섰다. 대지가 온통 흰색으로 단장하고 동장군이 맹렬하게 우리의 피부를 자극한다. 흔히 겨울을 가리켜 이지의 계절이라고 한다. 봄에는 정서적으로 따뜻함에 매료되어 들뜬 기분이 들기 십상이고 여름에는 뜨거운 열기에 저도 모르게 감염되어 분별을 잃기 쉬우며 가을에는 황금빛의 들녘을 바라보며 나이에 상관없이 감상에 젖게 되는데 반해 겨울은 차가움과 냉철함으로 우리에게 반성과 추억의 시간을 가져다준다.
이 성찰의 계절에 지난 2006년 일 년 간 ≪도라지≫잡지에 실린 수필들을 다시 읽으며 우리 수필의 오늘을 점검하고 내일을 전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축복이었다. 될수록이면 계절에 어울리게 냉정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생각하려 했지만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유지했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지난 일 년 간 ≪도라지≫잡지는 수필에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조어대국빈관에서 가졌던 장락주문학상 시상식을 통해서도 나타났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작품들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필자는 지난 한해사이 ≪도라지≫잡지를 통해 발표된 수필들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 다양성의 획득
≪도라지≫의 수필적 성과를 가늠하기 위해서 일단 이 잡지에서 수필에 할애한 지면을 살펴보았다. 지난 한해사이 ≪도라지≫잡지에는 수필이라는 타이틀로 발표된 조선족 작가 작품이 무려 71편이나 된다. 작품의 질이 꼭 량을 통해 보장된다는 보증은 없지만 일정한 량의 축적이 없이 다양성이란 확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71편의 작품이라면 이것은 평균 매호마다 근 12편의 수필작품을 선보였다는 말이 된다. 이 외에도 중국수필, 한국수필, 외국수필이 10여 편 소개되었으며 거기에 김재국의 장편수필연재, 조광명의 사진으로 읽는 수필, 류연산의 칼럼, 박진엽의 옥중수기까지 합치면 수필의 편폭은 가히 압도적이라 할만하다. 거기에 수편에 달하는 수필평론까지 가세하여 명실공히 수필전문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할 수 있다.
≪도라지≫는 이러한 방대한 량의 수필작품을 게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 작가에 대한 집중조명이나 연재, 또는 개별작가의 작품묶음과 같은 다양한 형식을 통해 작가의 개성을 조명하고 전반 수필문단을 점검하는 역할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따라서 ≪도라지≫는 조선족 수필문학의 현황을 반영하는 바로미터로서 손색이 없으며 ≪도라지≫를 통해 우리 중국 조선족 수필문학을 진단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도라지≫수필의 다양성은 일단 다양한 작가층을 통해 확인된다. 장정일, 산천, 김영금으로 대표되는 원로 수필가들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김관웅, 남호손으로 대표되는 교수층이 수필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키고 수필에 철학적 깊이를 주입시켜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조광명, 양은희, 허무궁, 남복실, 심매화로 대표되는 중견수필가들이 끊임없는 탐구로 새로운 수필의 경지를 개척하고 있고, 리진화를 대표로 하는 신진작가들이 무서운 기량으로 수필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도라지≫수필의 다양성은 또한 수필의 형식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장편수필의 형식을 빌어 일본문화론 나아가서는 중일한 비교문화론을 펼쳐보이고 있는 김재국의 ≪딸아, 일본은 바로 이러한 나라다≫는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객관적인 입장, 일상적인 사건이나 현상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통찰해보는 문화인류학적인 시각, 류창한 문맥과 핵을 찌르는 비유로 문학적 성취와 학문적 진실성을 동시에 획득한 수작으로서 우리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일찍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한국은 없다≫에서 가끔 보이던 감상적이고 즉흥적인 모습이 많이 사라지고 훨씬 성숙하고 완숙한 필치로 담담히 일본이라는 나라를 파헤친 이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뒤로 미루고 다만 형식적인 면에서 이 수필이 우리 수필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였다는 점만은 집고 넘어가기로 한다.
조광명의 ≪사진으로 읽는 수필≫ 또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조광명의 수필이 지닌 문학적 독창성은 이미 정평이 나있지만 이번에 선보인 연재는 사진과 수필이라는 두 예술장르의 이색적인 만남에서 출발한 전혀 새로운 시도이다. 문학적 심성의 고양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에서 볼 때 우리 문학은 여러 가지 형식의 실험이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 ≪사진으로 읽는 수필≫은 저자의 안목으로 직접 취사선택을 한 대상(사진)으로부터 출발하여 사유의 폭을 인생으로 넓혀나가 독자들에게 다중적인 감수를 안겨주는 작품이다. 조광명의 능력으로 봤을 때 우리는 그에게서 ≪사진으로 읽는 수필≫이나 ≪사진으로 읽는 시≫만이 아닌 ≪시가 있는 수필≫, ≪만화로 읽는 수필≫ 같은 것들도 역시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박진엽의 옥중수기나 류연산의 칼럼묶음도 이색적인 수필에 속한다. 혹자는 이러한 작품들도 수필이냐고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지만 필자는 수필의 범주를 한정함에 있어서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수필이냐 수필이 아니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동과 메시지의 유무이며 나아가서는 수필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이라 생각된다.
2. 완숙의 향기
지난해 ≪도라지≫에 발표된 수필들은 저자층의 다양화나 작품형식의 다양화 못지않게 독특한 개성의 작품도 많았다. 다음은 그중에서 필자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 주제적 성향과 의미화 기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주목할 작품은 조광명의 ≪딸아, 무지개 없는 하늘이래도 너는 사랑하여라≫이다. 필자가 이 작품에 각별한 주의를 돌리게 된 것은 결코 이 수필의 빼어난 모티브 때문이 아니라 이 모티브를 의미화하는 기법과 저자의 주제의식 때문이다. 이 작품은 저자가 세 살 난 딸이 무지개를 모른다는 사실에 놀라며 그것이 자기의 잘못이라고 스스로 자책하는데서 시작된다. 이러한 착상으로 시작되는 수필의 경우 우리 수필들은 대체적으로 오늘날 도시의 환경을 비판하고 자신이 어렸을 때 경험했던, 고향의 맑고 푸른 하늘에 걸려있던 아름다운 무지개를 회상하면서 과거와의 대조 속에서 현실의 회색세계에 대한 감상적인 비탄에 빠지기가 십상이다. 그것으로 문명비판의 작가적 소임을 다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광명의 이 작품은 그러한 직무유기에서 벗어나 철저히 독자들의 선입견을 뛰어넘는다. 그는 일단 자신이 이 도시를 선택하여 무지개 없는 이곳에서 삶을 영위함으로써 딸에게서 무지개를 앗아갔다고 반성한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무지개는 무엇이고 내 아이에게 무지개는 무엇일가? 나의 무지개와 내 아이의 무지개는 어떻게 다른걸가?”하고 반문한다. 물론 그도 어린 시절 고향의 무지개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과의 대조를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이 어렸을 때 무지개를 보면서 키워오던 꿈은 도시에로의 동경과 환상이었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끊임없는 노력 끝에 저자는 끝내 도시인이 된다. 다시 말하면 저자는 무지개를 보면서 키워오던 그 꿈을 실현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아이에게서 무지개를 앗아갔던 것이다. 꿈이 현실이 되면서 그 꿈을 잃어버리고 자식에게서마저 그 꿈을 빼앗아가버리게 되는 이 아이러니, 이 소외, 이 괴리! 저자는 결코 과거를 떠올리며 무턱대고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저자가 도시인이 되어서 다시 고향에 돌아갔을 때 거기서 무지개를 발견하지 못하는데서도 다시 한번 확인된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저자는 기억속에서 아름답게 채색된 과거를 등장시켜 그것을 참조물로 하여 오늘을 개탄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장 안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저자가 모르지는 않지만 그것은 오늘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현실도피적인 발상이라는 사실을 더 잘 아는 까닭이다.
그는 “딸이 무지개 없는 저 칙칙한 하늘을 영원히 이고 살게 될지 모르”며 딸이 “무지개 있는 하늘보다 칙칙한 하늘을 더 사랑해 저 하늘아래 세상을 더 영악하고 지혜롭게 살아갈지도 모르”며 “어쩌면 내 딸에게는 그 푸른 하늘과 그 푸른 하늘에 걸린 무지개가 과거형도 아닌 아예 인간의 아름다운 환상이야기로만 남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실망스럽고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이러한 처절한 인식을 바탕에 깔았기 때문에 저자는 오히려 딸에게 “무지개 없는 하늘이래도 너는 사랑하여라” 하고 긍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철저한 부정 뒤에 오는 긍정, 현실 도피적이지도 않고 현실 타협적이지도 않은 인간정신의 무게와 지성인의 자세가 여기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안일한 사고방식에 대한 지속적인 거부의 몸짓 끝에 이러한 수작(秀作)이 얻어지는 것이리라 믿는다.
이와는 별도로 김광웅의 일련의 수필들은 해박한 지식, 넘치는 위트, 적절한 비유, 일관된 론리성으로 주제의식의 심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지난해 5호에 실린 ≪혼 보내기와 락엽귀근≫,≪디아스포라, 박쥐 그리고 꽃나무≫,≪내가 연변을 떠나지 않는 리유≫ 이 세 작품은 하나같이 우리 조선족의 정체성 문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시각과 접근방법에 있어서는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 우수한 작품들이다. 저자 개인의 신변적인 사건들을 통해 구체성을 획득한 다른 두 작품과는 달리 ≪디아스포라, 박쥐 그리고 꽃나무≫는 일련의 전형적인 에피소드들을 통해 정체성의 문제를 성적 아이덴티티, 가정적 아이덴티티, 인종적 아이덴티티, 민족적 아이덴티티, 사회적 아이덴티티로 점진적으로 확장시켜 나가다가 결국에는 조선족들의 정체성에 대한 집중적인 사고로 연결시킨다. 정체성의 어느 측면을 설명하든지 모두 적재적소에 고금중외의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 뒷받침하면서 설득력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얼핏 잡다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러한 인용이 전혀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저자의 일관된 론리적 치밀함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겠다. 필자는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한 저자의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나아가 이것이 조선족 사회에서 공감대를 형성하여 우리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의 주제를 둘러싸고 집중적인 사고와 면밀한 구도배치를 병행하였기 때문에 얻어질 수 있는, 학자수필의 전형으로 지목되기에 손색없는 작품이라 하겠다.
3. 정신의 무게
조광명과 김관웅의 수필이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완숙에 가까운 경지를 보임으로써 문학적 향기를 지니게 되었다면 박진엽의 옥중수기는 사실적인 체험에 대한 진실한 기록과 아픔에 대한 냉철한 사고를 통해 정신적인 무게를 획득한 경우라 하겠다.
사실 지난해 ≪도라지≫에 발표된 작품들 중에서 가장 충격을 안겨준 작품은 바로 박진엽의 옥중수기 ≪지옥에서 본 인간세상≫이었다. 문학에 심취할 수 있는 순수성을 잃어버린 탓이기도 하겠지만 필자는 최근 년간 문학작품들을 읽고나서 며칠씩 그 작품세계에 빠져버리는 경험을 한 지 오래다. 하지만 박진엽의 글을 읽고나서는 거의 일주일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뭔가 묵직한 것이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나는 그 답답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슬픔 같기도 하고 아픔 같기도 하고 분노 같기도 하고 아니면 무기력감에서 오는 자포포기 같기도 했다. 우울한 일주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저자 박진엽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이 옥중수기는 우리가 아픔을 헛되이 랑비하지 않고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지혜나 철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옥중수기는 저자가 이른바 “사기죄”로 할빈수용소에서 1112일을 보낸 진실한 삶의 기록이다. 거기에는 저자 자신의 체포과정, 예심과정, 감옥생활, 출옥과정 등이 자상하게 적혀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은 단순히 저자가 처한 곤경에 대한 동정이나 사회적으로 만연되어있는 공권력 비리에 대한 울분이 아니다. 우리는 이 글에서 무소불위의 공권력과 약자의 무기력, 집단이라는 이름의 사회와 구체적인 삶의 한 형태로서의 개인, 거대한 사회제도의 부조리와 구체적인 한 인물의 존엄성과의 대결구도를 보게 된다. 이러한 대결과정에서 저자는 익명성의 집단이 아닌, 한 실존적인 개인의 존엄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것이 현실세계에서 지켜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그리고 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개인과 세계와의 대립에서 개인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보여준 작품이다.
사실 중국 조선족은 많은 고난의 년대를 거치면서 아픔과 슬픔을 몸으로 익히고 그것을 달관으로 극복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달관의 경지가 잘못된 것은 아니나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아픔을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는 점이다. 아픔을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가볍고 경박한 민족이 되기 쉽다. 이런 의미에서 봤을 때 박진엽의 옥중수기는 우리에게 커다란 자산이 된다. 개인적인 아픔을 하나의 력사로 기억하려는 작은 움직임, 필자는 거기에서 정신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4. 수필시학의 필요성
이 외에도 수필적인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 많이 있었지만 편폭의 제한으로 구체적인 분석을 략하기로 한다. 김인덕의 ≪조선족과 진달룻, 최균선의 ≪지자의 덕성≫, 도규섭의 ≪시골 봄날의 인상≫, 오설추의 ≪누구랑?≫은 모두 각자의 독특한 매력이나 빼어난 감수성을 지닌 글들로 평가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우리 수필은 그 량적인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외화내빈의 모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주제적인 깊이에서도 그렇고, 사물에 대한 집중적인 사고력에서도 그렇고, 또 수필시학적인 견지에서도 그렇다. 원로 수필가들이나 중견 수필가들의 수필이 안정적이고 무난하게 우리 수필의 일정한 수준을 유지시켜준다면 신진수필가들의 수필은 착상이 독특하고 아이디어가 기발한 반면 그 완성도가 많이 떨어짐을 볼 수 있다. 수필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너무 즉흥적으로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하루 저녁에 서너편의 수필을 써내는듯한 인상을 독자들에게 준다면 좋은 수필이 태어날 확률은 그만큼 줄어든다고 하겠다.
오경희의 ≪가슴과 잔등≫을 례로 들어보기로 한다. 필자가 이 작품을 선택한 리유는 깔끔한 착상으로 시작한 이 수필이 좋은 작품으로 마무리되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인체의 앞뒤면에 해당하는 가슴과 잔등을 이원대립의 시각에서 분석하면서 가슴을 안해나 어머니에, 잔등을 남편이나 아버지에 비유하고 있다. 가슴과 잔등이 한몸으로 살아가듯이 안해와 남편, 어머니와 아버지가 조화롭게 살아야만 자식들도 반듯하게 자라난다는 도리를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착상으로 시작된 수필이지만 작품을 읽고나면 뒷맛이 개운치가 않고 별로 수긍이 가지 않는다. 왜 그럴까?
먼저 이 작품에는 화자인 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숨은 화자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은 보편성의 원리로서의 가슴과 잔등만 있지 구체성을 획득한, 나만의 가슴과 잔등은 없는 것이다. 수필을 자화상이라고도 하는데 이 수필을 통해 우리가 어떤 자화상을 발견할 수 있는가? 나의 가슴과 잔등도, 우리의 가슴과 잔등도 없는 인류의 가슴과 잔등만 남아있다. 수필이라는 장르는 구체성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하는 장르이다. 그런데 그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으니 감동이 전달되지 않고 설득력이 반감되는 것이다.
그러면 집중적인 사고력은 어떤가? 본문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가슴이 따뜻한 난로라면 잔등은 우듬직한 소나무이리라.”
여기에서 “우듬직하다”는 낱말이 우리 말에 없음은 차치하고 가슴과 잔등을 난로와 소나무에 비유한 것이 적절한가 하는 것만 살펴보기로 한다. 가슴이 지닌 따뜻한 면을 난로에, 잔등이 지닌 강직함과 믿음직스러움을 소나무에 비유하려는 의도가 안겨오기는 하지만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 세상에 따뜻함을 내재한 사물은 난로 외에도 얼마든지 있고 강직하고 믿음직스러움을 내재한 사물도 많고 많다. 그러면 그러한 사물들이 얼마든지 가슴과 잔등의 비유로 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저자가 가슴과 잔등을 택한 리유는 그것이 모두 한몸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라면 비유되는 대상도 서로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난로와 소나무의 연관성은 어디에 있는가? 소나무가 난로의 연료로 쓰이는 것만 제외하면 아무런 상관성이 없다. 이것은 집중적인 사고력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조금 더 생각하고, 조금 더 다듬는 작업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같은 호에 실린 한국 수필가 김국자의 ≪왼손과 오른손≫이라는 수필과 비교해보면 좋은 대조가 된다. 이 작품도 왼손과 오른손을 안해와 남편으로 환치시키고 있지만 그 의미화의 기법면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외에 또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수필의 언어다. 평론을 쓸 때마다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호전되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한편의 작품을 대충 훑어보아도 여기 저기 비문이 눈에 띈다. ≪와인 한잔≫이란 작품을 보기로 하자.
①“소주처럼 독하지도 않고 물처럼 슴슴하지도 않은 촉감 부드러운 와인향이 그립다.”
②“인내한 세월의 크기에 따라 값이 틀리다는 와인, 그래서 맛이 틀리다는 와인 한잔.”
③“그 한잔의 부드러움으로 지친 심상을 어루쓸고싶다. 세상의 추함만이 하나같이 시야에 들어오는 날에는 한잔의 와인, 그 감미로움으로 내 령혼의 아름다움을 지키고싶다.”
①의 경우 촉감이 부드러울 수도 있고 와인향이 부드러울 수도 있지만 향이 촉감이 될 수는 없다. ②에서 “틀리다”는 말은 진짜 틀린 말이고 맞는 말은 “다르다”가 될 것이다. 한국인들이 구두어로 쓰는 말이라고 하여 다 맞는 말은 아니다. ③의 경우 “심상”이란 말은 있지만 “지치다”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못하는 말이고, “어루”는 “만지다”나 “더듬다‘와는 어울리지만 “쓸다”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감미로움으로 내 령혼의 아름다움을 지키고싶다”는 말은 비문은 아니지만 어색하다. “내 영혼의 아름다움”이란 표현도 이상하지만 와인 한잔의 감미로움으로 그 아름다움을 지켜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수필시학의 결여는 이 외에도 반전의 부재, 유머나 위트의 부재, 환유의 부재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에 대한 언급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다만 우리 수필이 이제는 화려한 외면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수필시학에도 관심을 가져 내실을 다져야 할 때라는 점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음을 밝힌다.